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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잠 못 드는 밤 (50/110)


50화. 잠 못 드는 밤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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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가 객실 문 앞에서 카드키를 꺼내는데, 뒤에 있던 지안이 넌지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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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출장 안내문에 나와 있던 객실은요? 도하 씨랑 내 객실이 각자 배정되어 있던데.”

그녀의 말에 도하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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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당신 객실은 진작에 취소되었고, 내 객실엔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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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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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도하는 그 말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시간 전, 필라델피아 공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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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승훈은 도하를 불러 직원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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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입니까. 한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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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예약해 뒀습니다. 아무래도 직원들과 같은 곳에 있다 보면 사모님과 한방을 쓰시는 게 불편할 것 같아서요.’

승훈의 말에 도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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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출장 안내문에는 분명 같은 호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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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다른 객실로 두 분을 배정해 드렸습니다만,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모님 객실은 이미 취소했고, 대표님 객실은 제가 쓸 예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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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팀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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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혹시나 개인적인 미팅차 방문하시는 분이 있으면 제가 알아서 응대하겠습니다.’

작은 디테일까지도 놓치지 않는 승훈의 배려에 도하는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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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 준비만으로도 정신없었을 텐데, 언제 이런 것까지 다 신경 쓴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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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대표님 도와드리겠다고요. 비밀 관계가 오래 유지되려면 저처럼 빠릿빠릿한 조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승훈이 셀프 칭찬을 하고 민망한 듯 웃자, 도하가 환한 미소로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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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한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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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씀을요. 그런데 말입니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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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훈은 도하의 곁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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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두 분 관계를 지켜드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노력하겠지만, 딱 하나만은 어렵습니다.’

도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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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요? 그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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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승훈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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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눈빛이 거짓말을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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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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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을 보실 때 눈빛이 너무 진실되셔서 직원들이 눈치챌까 조금 걱정입니다.’

승훈의 말에 도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지안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제 눈빛이 대체 어떻길래.

때마침 그녀도 저를 보고 있었는지 두 시선이 한곳에서 정통으로 마주쳤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먼저 눈을 피하는 지안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 승훈이 다급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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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바로 지금! 그런 눈빛 말입니다.’

도하는 쓱 고개를 돌려 공항 앞 유리 벽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승훈의 말대로 제 눈빛이, 눈동자가 평소와 매우 달랐다.

평소에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비즈니스용 눈동자였다면, 지금은 멜로 영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빛이 눈동자에 한가득 고여 있었다.

비밀을 사수하기 위한 첩보 작전도 통하지 않을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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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생각에 잠긴 도하의 귓가로 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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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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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 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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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열어, 열어야지.”

카드키를 가져다 대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에서 보내는 첫날 밤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달콤한 꽃향기를 머금은 포트 와인이 복도 카펫을 완전히 적셨다.

룸서비스가 도착한 줄 알고 나왔던 승훈의 눈가가 누군가를 발견하곤 완전히 일그러졌다.

당연히 도하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하린도 경직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승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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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린 씨?”

승훈이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며 부르자, 하린은 천천히 눈을 치뜨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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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이 왜 거기에서 나오죠?”

하린의 맹랑한 목소리에 승훈은 잠시 입술을 꾹 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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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민하린 씨가 왜 여길 얼쩡거리고 있죠?”

승훈의 냉랭한 목소리에 하린은 기가 막힌 듯 눈에 힘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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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쩡? 방금 얼쩡이라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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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얼쩡이 아니고 뭡니까. 서울도 아니고, 필라델피아까지 와서 왜 권 대표님 객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겁니까?”

승훈은 하린을 모르지 않았다. 도하가 사고를 겪기 전에는 제법 자주 마주쳤었다.

신사업 관련 문제로 도하와 승훈이 밤늦도록 마라톤 회의하고 있을 때, 그녀는 멋대로 찾아와 못마땅한 듯 승훈을 노려봤었다. 마치 저를 사랑의 훼방꾼 정도로 취급하는 듯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중요한 바이어 미팅 장소까지 쫓아와 도하를 곤란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알기론 도하가 이별을 고한 것도 여러 차례였지만, 그녀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고 찰거머리처럼 도하의 곁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사고로 도하가 의식을 잃자,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잠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훈의 귀에 하린이 세준의 여자가 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업데이트된 정보에는 세준과 하린의 약혼 소식도 있었다.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살아선 도하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할 사람.

그런 사람이 입었는지 벗었는지 모를 옷차림으로 제 상사의 객실 앞을 맴도는 걸 승훈은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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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만나러 온 거예요. 친구가 친구 만나러 온 게 뭐 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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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승훈이 눈을 부릅뜨고 되묻자 하린은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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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잖아요. 도하 씨랑 나 여기, 이 도시에서 유학 생활했었던 거. 여기 오니까 추억도 좀 생각나고 해서, 그래서 들른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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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복장으로 추억팔이 하러 온 걸 지세준 대표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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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훈의 촌철살인에 하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도하가 아끼는 부하 직원이라는 걸 알았지만, 도하 못지않은 기세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대로 돌아설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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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그냥…… 현지 스타일대로 입은 것뿐이에요. 내가 그쪽한테 이런 것까지 지적받아야 하나요?”

하린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자, 승훈은 하찮은 것을 보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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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스타일이라…… 미국 어느 동네 스타일이 그런 란제리 차림이라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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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요? 하. 그쪽하고 이딴 입씨름 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도하 씨, 도하 씨 어딨어요!”

하린이 객실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하자, 승훈이 거칠게 그녀를 막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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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은 지금 아내분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승훈의 말에 하린의 눈빛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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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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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린 씨도 여기 계실 게 아니라, 지세준 대표와 좋은 시간 보내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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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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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길을 잃으신 거라면, 제가 지금 지 대표한테 연락하겠습니다. 민하린 씨께서 저희 권 대표님 객실 앞을 배회하고 계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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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사람이! 도하 씨가 당신한테 잘해준다고 지금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나대는 거야?!”

하린이 빽 소리치자, 승훈은 눈 하나도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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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시네요. 제가 권 대표님 수족이라는 걸. 아마도 권 대표님께서 지금 그쪽 모습을 보셨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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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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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벙찐 하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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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 했습니까!”

노 실장의 보고를 들은 세준의 눈동자에 불덩이가 치솟았다.

노 실장은 세준의 앞으로 다가와 태블릿 PC를 건넸다.

태블릿을 받아 든 세준의 눈에 생생한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속살이 보일 듯 야시시한 옷차림에, 막 샤워를 마친 듯 물기 어린 머리칼의 하린이 웬 남자와 호텔 객실 앞에 서 있었다.

사진 속 남자의 옆모습을 유심히 보던 세준의 눈이 순간 커졌다.

도하가 가장 신뢰하고 인정하던 부하 직원, 한승훈 팀장.

한때 세준도 그와 함께 케이원 딜리버리 사업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일 중독인지 한시도 쉬지 않고 업무에만 매달리던 승훈은 도하와 손발이 척척 맞는 파트너였다.

업무에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세준은 두 사람에게 남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결국 혼자 팀에서 겉돌았고, 승훈은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보곤 했었다. 그 걱정스러운 눈빛이 세준의 가슴에는 우월한 자의 비웃음처럼 느껴졌었다.

완전한 이탈을 꿈꾸게 된 건, 그리고 지금의 이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어쩌면 그때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일그러진 세준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노 실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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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객실은 권 대표 이름으로 예약되었지만, 권 대표가 아니라 부하 직원이 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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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권도하한테 접근하려고 혼자 다른 호텔을 잡아 도망쳤단 말입니까?”

세준의 입술 끝에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딘가 부자연스럽던 하린의 표정과 행동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하린에게 예전만큼 성취감을 느낄 순 없었지만, 기껏 잡은 물고기가 제멋대로 그물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그리 흥미롭진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돌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곳이 권도하의 곁이라면.

세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자, 노 실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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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요, 대표님?”

잠시 고민하던 세준이 나직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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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여기로 데려오세요. 안 온다고 버티면 끌어서라도 데려와야 합니다. 더는 내 꼴이 우스워져선 안 되니까.”

노 실장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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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표님.”

노 실장이 나가고, 혼자 남겨진 세준은 창밖의 짙은 어둠을 눈에 담으며 독한 위스키를 삼켰다.

***

불이 모두 꺼진 호텔 객실 안.

널따란 크기의 침대 위에서 지안은 습관처럼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붙어 누워 있었다.

정확히 한 시간을 채 잠들지 못하고 저절로 눈이 떠졌다.

비행기에서 많이 잔 까닭일까. 아니면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것일까.

시차 적응이라는 걸 해 본 적 없어서 어떤 느낌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정신에 더는 잠을 잘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뒤척이는 순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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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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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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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나도 못 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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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잤어요? 한 시간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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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유학과 해외 출장을 자주 경험한 몸이라 그는 어디서든 쉽게 잠들 줄 알았다.

한데 그 또한 잠들지 못했다니, 지안은 시차 적응이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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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참 신기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 깨어 있을 시간이라고 잠도 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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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몸이 참 신기하지.”

도하는 그 말을 하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가 여태껏 잠들지 못한 건 시차 적응과 무관했다.

침대에 눕기 전, 욕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었다.

살짝 젖은 눈썹 앞머리가, 촉촉한 눈동자와 붉고 통통한 입술이 오늘따라 더 섹시해 보였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온몸으로 가득 안고 싶을 정도로.

이미 성날 대로 성난 육체는 천천히 다가오라고, 기다리겠다던 자신의 지난 고백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때 지안이 나직이 혼잣말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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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일부터 일하려면 좀 더 자야 하는데.”

그녀의 말에 도하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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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데 도움이 되는 게 하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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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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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엉큼한 빛이 그의 얼굴로 드리운 순간,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저택을 나서기 전, 정순이 도하를 향해 우렁차게 외친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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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자 파이팅!’

누가 보면 도하가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떠나는 국가대표로 보일 만큼 정순의 ‘파이팅’에는 깊은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 염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도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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