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원하는 건 하나 (51/110)


51화. 원하는 건 하나
2022.05.27.


16584914582562.jpg

 
옆으로 뜨거운 온기가 훅 밀려오자, 지안은 놀란 듯 어깨를 웅크렸다.

남자의 커다란 몸이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매트리스의 진동으로 느껴졌다.

16584914582567.jpg

‘설마 잠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머릿속에 아찔한 경보음이 울리자 지안은 붉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단단한 팔에 허리가 속절없이 붙잡히기 일보 직전, 그녀는 쓱 매트리스 위를 벗어났다.

커다란 남자의 팔이 허공 위로 툭 떨어졌다.

16584914582571.png

“……!”

당황한 도하가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하자, 지안은 협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잽싸게 들며 어색하게 말했다.

16584914582567.jpg

“어머, 내 정신 좀 봐. 호텔에 도착하면 할머님께 영상 통화 걸기로 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네.”

16584914582571.png

“…….”

16584914582567.jpg

“지금 여기 시간이 오전 1시 50분이니까. 한국은 오후 2시 50분쯤 됐겠네요. 이 시간이면, 할머님 낮잠 주무시다 깨실 시간이겠어요.”

지안은 조금 전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주한 듯 보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눈에 담던 도하가 의기소침하게 뱉었다.

16584914582571.png

“……할머니가 진짜 기다리는 건, 그깟 영상 통화가 아닐 텐데.”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파묻히듯 흘러나오자, 제대로 듣지 못한 지안이 눈썹을 높이 올리며 물었다.

16584914582567.jpg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도하는 불퉁한 목소리로 대충 답했다.

16584914582571.png

“……아냐, 아무것도.”

잠시 후, 통화 연결음이 휴대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다가, 액정 속 까만 화면이 익숙한 정원 풍경으로 바뀌었다.

연결을 알리는 노이즈 섞인 소리에 지안이 외쳤다.

16584914582567.jpg

“어, 연결됐다! 도하 씨 얼른 와봐요.”

그녀의 다급한 손짓에, 도하는 김샌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휴대폰 앞에 고개를 내밀었다.

지안은 정순 대신 여전히 화면을 가득 채운 초록빛 정원을 보며 말했다.

16584914582567.jpg

“할머님!”

화면은 정원을 향하고 있었지만, 분명 스피커에선 정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84914593876.png

-그래 지안아! 할미 보이니?

16584914582567.jpg

“어. 카메라 방향이 바뀐 것 같아요. 할머님은 안 보이고 정원만 보이는데요.”

영상 통화 경험이 없는 정순의 미숙한 실수에 지안은 싱긋 웃으며 도하를 쳐다봤다.

목표 근처에는 다가가 보지도 못하고 꺾인 그의 입가에는 허탈한 미소만이 흐르고 있었다.

휴대폰 스피커로 정순을 돕는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정순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16584914582567.jpg

“어, 할머님 이제 잘 보여요!”

16584914593876.png

-그래! 지안아, 잘 도착했니?

16584914582567.jpg

“네. 아까 도착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이제 연락드렸어요. 죄송해요, 할머님.”

16584914593876.png

-죄송은 무슨. 정신없을 텐데 잊지 않고 전화 준 것만도 고맙지. 근데…….

갑자기 화면 속 정순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16584914582567.jpg

“왜요, 할머님?”

16584914593876.png

-도하 녀석, 표정이 왜 저런다니?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정순의 말에 도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생각했다.

몸 상태가 아주 좋다고, 주체할 수 없이 좋은데, 누가 자꾸 못 본 척 외면하는 탓에 괴롭다고.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긴 숨을 내쉰 그가 나직이 말했다.

16584914582571.png

“아녜요. 할머니. 오랜만에 장시간 비행기를 탔더니 좀 피곤했나 봐요.”

도하가 안심시키듯 말하자, 화면 너머의 정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6584914593876.png

-그래. 어서 쉬어야지. 비행 피로는 쉬는 것밖엔 없어. 너희 내외 잘 도착한 것 봤으니 이제 됐다. 어서 들어가 보렴.

정순이 빨리 전화를 끊으려 하자, 지안은 도하의 눈치를 살피며 냉큼 대화를 이어 나갔다.

16584914582567.jpg

“할머님! 식사 제때 잘하시고, 식사 후엔 귀찮아도 꼭 정원 산책 가볍게 하셔야 해요. 너무 실내에만 계시면 비타민D가 결핍되니까…….”

지안은 밤새 통화를 할 작정인지, 정순이 전화를 끊으려 할 때마다, 화제를 전환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16584914582567.jpg

“할머님, 그러니까 그건…….”

밤새 계속될 것 같은 통화에 문제가 생긴 건 정순 쪽이었다.

16584914593876.png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안아?

16584914582567.jpg

“네 할머님! 제 목소리 안 들리세요?”

16584914593876.png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왜 이게 이러지. 오류가 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영상 통화로나마 정순이 곁에 있다 느끼던 지안은 금세 외딴곳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홀로 남겨진 이곳에 저를 녹일 듯 뜨겁게 응시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더 숨 막히게 했다.

***

영상 통화를 끊은 정순은 후끈할 정도로 뜨거워진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곤 피식 웃었다.

16584914593876.png

‘미안하다. 지안아. 이번에는 할미가 도움이 못 되어주겠구나. 이제 이 늙은 할미보다는 도하 녀석이랑 더 정을 붙여야지.’

잠시 엷은 미소가 흐르던 정순의 얼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뭇 어두워졌다.

1658491460523.jpg

“회장님.”

그녀의 일을 돕는 정 실장이 뒤로 다가와 나직이 불렀다.

16584914593876.png

“그래, 어떻게 되었나?”

무언가를 확인하는 정순의 안면 위로 비장한 기운이 맴돌았다.

1658491460523.jpg

“자세한 건 CT와 MRI 검사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골절상 정도로 보인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대화도 될 만큼 김 기사 상태도 나빠 보이지 않고요.”

정 실장의 말에 정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16584914593876.png

“큰 문제 없어야 할 텐데.”

1658491460523.jpg

“너무 염려 마십시오. 회장님. 괜찮을 겁니다.”

16584914593876.png

“그래.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넘기지 말고, 확실히 조사해야 하네. 이건 우연한 사고가 아니야.”

1658491460523.jpg

“네. 회장님. 샅샅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정 실장이 물러가고 홀로 남은 정순은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낯선 자동차가 미행하듯 제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처음 느낀 건 2, 3일 전이었다.

정순이 팔십 가까운 나이에도 회사 일을 놓지 않을 수 있던 건 누구보다 발달한 예리한 촉과 영민함 덕분이었다.

그런 그녀의 레이더에 걸린 낯선 자동차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기어코 문제를 일으켰다.

정순이 지인을 만나고 나오던 길, 차 한 대가 그녀 앞으로 무섭게 돌진했다.

앞에 나와 대기하고 있던 김 기사가 달려와 그녀를 밀치지 않았더라면, 차에 치인 건 김 기사가 아닌, 그녀였을 거다.

운전사는 급발진 사고라고 변명했지만, 며칠 전부터 제 뒤를 밟던 운전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이 사고가 우연이 아니라면…….

정순은 미간을 좁히며 곰곰이 생각했다.

16584914593876.png

‘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꾸몄단 말이지?’

자신이 손해를 볼지언정, 남에게 피해를 주는 법 없이 살아온 한평생이었다.

골똘해진 그녀의 뇌리로 잊고 있던 한 통의 연락이 떠올랐다.

며칠 전 D그룹 도 회장이 늦은 시간 전화를 걸어온 일이 있었다.

1658491460523.jpg

‘황 회장님, 회장님 덕분에 우리 딸 아이를 위험한 구렁텅이에 몰아넣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16584914593876.png

‘그게 무슨 말입니까?’

1658491460523.jpg

‘사람의 진가는 밝은 빛에 있을 때가 아니라 어둠 속에 있을 때 나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잘 둘러보라고요.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니, 제가 딸아이를 소개하려던 자리가 형편없는 구렁텅이였습니다. 그런 곳에 우리 딸을 몰아넣을 뻔했다니 다시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16584914593876.png

‘그럼…….’

1658491460523.jpg

‘CTM과 맺기로 한 모든 투자 계획을 접기로 했습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그보다 더한 사상누각이 없더군요. CTM은 그야말로 모래 위에 지어진 집입니다. 언제 어떤 바람이 불어와 무너질지 모를 곳 말입니다. 지 대표,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정순의 눈이 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


16584914635231.png

“이거 놓으란 말, 안 들려요!”

건장한 남자들의 손에 붙잡혀 객실로 끌려온 하린이 빽 소리쳤다.

두 남자는 소파에 앉아 있던 세준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제야 하린의 손을 놓았다.

세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을 응시하자, 두 남자는 조금 전 들어온 문으로 다시 돌아 나갔다.

객실 안에 둘만 오롯이 남겨지자, 하린은 바락 소리쳤다.

16584914635231.png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세준 씨, 미쳤어?”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말없이 다가왔다.

그러곤 가느다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리며 말했다.

16584914635243.png

“미쳐? 감히 내가 미쳤다는 말이 나와?”

세준의 위압적인 태도에 놀란 하린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16584914635231.png

“……세, 세준 씨. 대체 나한테 왜 이래.”

16584914635243.png

“그러는 민하린 넌, 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세준은 턱짓으로 바로 옆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을 가리켰다.

하린은 불안한 시선을 천천히 옮겨 그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가져갔다.

태블릿 화면을 가득 채운 한 장의 사진.

16584914635231.png

“……!”

사진을 본 하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사진 속 제 옷차림은 거울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천박하고 선정적이었다.

세준은 벙찐 하린의 얼굴로 바짝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16584914635243.png

“권도하가 그리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고!”

하린은 사늘한 세준의 목소리에, 기가 질린 듯 간신히 도리질했다.

16584914635231.png

“그런 거 아니야, 세준 씨.”

16584914635243.png

“그럼. 그런 게 아니면 이 사진은 뭐지?”

16584914635231.png

“…….”

16584914635243.png

“미국 출장에 따라나선 것도, 호텔을 따로 잡은 것도 다 권도하 때문이 아니라고?”

궁지에 몰려 딱히 변명할 여지가 없어지자, 하린은 저도 모르게 악다구니가 생겼다.

왜 저 혼자만 세준의 추궁을 받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몰랐다. 저라고 따져 묻고 싶은 게 없지도 않은데.

하린은 눈빛을 바꾸며 적반하장으로 내뱉었다.

16584914635231.png

“그러는 세준 씨는? 서지안! 그 여자한테 왜 먼저 접근한 건데! 레스토랑도 당신이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가 데려간 거라며!”

16584914635243.png

“……!”

16584914635231.png

“왜, 권도하 여자라면 다 탐나고 그래? 다 뺏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고!”

정곡을 찔린 세준이 잠시 굳었다가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16584914635243.png

“민하린, 말 가려 해.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말고!”

16584914635231.png

“고상한 척하지 마! 남의 여자 뺏기, 아니 훔치기가 취미인 주제에!”

16584914635243.png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16584914635231.png

“한번 솔직해져 보지 그래. 도하 씨가 이제 다른 여자한테 흥미를 두는 거 같으니까, 그쪽으로 구미가 당긴 거잖아! 안 그래?”

16584914635243.png

“……!”

세준이 기가 찬 듯 말을 잇지 못하자, 하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아냥대듯 말했다.

16584914635231.png

“잘됐네. 서로 원하는 게 상충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무심코 뱉은 말에서 의외의 답을 찾은 듯 하린의 눈이 순간 이글거렸다.

16584914635231.png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나, 도하 씨 깨어난 거 보고 많이 흔들렸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고. 때마침 당신도 도하 씨 옆에 있는 여자가 마음에 든 모양이니. 우리가 원하는 게, 결국은 하나라는 거잖아.”

하린의 말을 가만히 듣던 세준의 눈이 순간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16584914635243.png

“……!”

무심코 내뱉은 말에서 생각지도 못한 길을 찾은 하린은 들뜬 듯 말했다.

16584914635231.png

“어때, 한번 해볼래? 우리 함께하는 동안 제법 잘 맞았잖아. 이번에도 그럴 거 같은데.”

16584914635243.png

“……그게 무슨 말이지? 뭘 어떻게 하자는 건데.”

16584914635231.png

“한 팀이 돼 서로 원하는 걸 가져 보자고.”

16584914635243.png

“……!”

16584914635231.png

“나는 권도하를, 당신은 권도하 여자를.”

16584914635243.png

“민하린,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16584914635231.png

“진심이길 누구보다 바라는 건 세준 씨일 텐데. 왜, 내 말이 틀려?”

16584914635243.png

“……!”

 

16584914685898.pn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