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마흔다섯 (52/110)


52화. 마흔다섯
2022.05.30.


침대로 돌아간 지안은 긴장한 듯 숨죽였다.

옆자리에서 이불이 사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정수리 끝이 절로 곤두섰다.

그때 옆에서 도하의 길고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16584914733573.png

“후우.”

천천히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소리 없이 맞닿은 두 시선이 한동안 서로를 향해 가만히 머물렀다.

출구 없는 곳에 갇힌 듯 그의 시선에 묶여 있던 지안이 힘겹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1658491473369.jpg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죠? 옆에서 지켜보니 호흡도 일정하지 않은 것 같던데.”

16584914733573.png

“…….”

그 순간 도하가 그녀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려 누우며 말했다.

16584914733573.png

“언제까지 모른 척할 셈이지?”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란 거 당신도 알잖아.”

1658491473369.jpg

“……도, 도하 씨.”

16584914733573.png

“좋아한다고, 당신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잖아.”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좋아하는 여자와 이렇게 먼 나라로 떠나와 함께 누워 있는데, 호흡이 일정한 게 더 비정상 아닌가?”

갑작스러운 도하의 돌직구에 그녀는 뒤늦게 후회했다.

차라리 모르는 척 잠들걸.

하지만 이렇게 어색하고 심장 떨리는 분위기에선 단 한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지안은 망설임 끝에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8491473369.jpg

“도하 씨, 저 지금 좀 많이 불편해요.”

16584914733573.png

“……뭐?”

1658491473369.jpg

“그래요. 도하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요. 저도 성인이고 눈치가 있는데, 왜 모르겠어요.”

16584914733573.png

“…….”

1658491473369.jpg

“하지만…….”

지안이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자, 도하가 말을 가로채 물었다.

16584914733573.png

“여전히…… 내가 불편하고 싫어?”

불시에 날아온 질문에 잠시 굳어 있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8491473369.jpg

“싫은 게 아녜요.”

16584914733573.png

“……!”

1658491473369.jpg

“도하 씨가 걱정되고, 신경 쓰이고, 자꾸 눈에 밟혀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도하의 눈이 순간 커졌다. 짙은 어둠을 뚫고 그의 커다란 눈에 고인 생기가 조금씩 넘실거렸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1658491473369.jpg

“근데 이게 간병인으로서 몸에 밴 습관인지, 아니면 저도 도하 씨와 같은 마음인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최악의 경우, 그녀가 저에게 선을 그을 수도 있다고 예상했던 그는 기대 이상의 대답에 흡족한 표정이었다.

수선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도하가 나직이 말했다.

16584914733573.png

“그거면 됐어. 천천히 오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다만, 지금처럼 조금씩 조금씩 내 앞으로 걸어와야 해. 멈춰 있지 말고, 돌아서지도 말고.”

그 말을 하며 도하는 단숨에 팔을 벌려 그녀를 제 품으로 꼭 끌어왔다.

1658491473369.jpg

“……어!”

놀란 지안이 짧게 내뱉자,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16584914733573.png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큼만 다가와 줘.”

크고 널따란 품속에 갇힌 그녀가 낑낑대며 말했다.

1658491473369.jpg

“……도하 씨, 숨 막혀요!”

16584914733573.png

“당신은 착한 여자니까 이 정도 자비심은 베풀 수 있잖아.”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지금 이 상황에, 이 정도 거리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건 나보고 남자이길 포기하라는 거나 다름없어.”

한동안 그의 품을 벗어나려 낑낑대던 지안의 몸짓이 어느샌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분하고 고른 숨소리가 객실 안을 울렸다.

쌔근쌔근 듣기 좋은 숨소리를 귀에 담으며 도하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16584914754705.png

 

***

하린은 붉은 와인이 든 잔을 세준의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16584914771801.png

“뭐해, 세준 씨. 오늘이 우리 동맹 기념일인데 축배 정도는 들어야지.”

세준은 불퉁한 미소를 뱉으며, 천천히 와인잔을 들었다.

서로를 추궁하고 원망하던 자리가, 하나로 뜻을 모으는 자리가 된 건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16584914771801.png

“자, 짠.”

하린의 부추김에 세준은 못 이기는 듯 잔을 부딪쳤다.

째앵.

청아하고 영롱한 소리가 흩어지자마자 다시 그녀가 말했다.

16584914771801.png

“그래서, 세준 씨는 생각해둔 계획이 뭐야?”

16584914771813.png

“뭐?”

16584914771801.png

“……권도하 여자를 뺏고 싶다며. 겨우 레스토랑 한번 데려가는 거로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하린이 조롱하듯 뱉자 세준이 발끈하며 말했다.

16584914771813.png

“누굴 바보로 알아?”

16584914771801.png

“……그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하린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세준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세준이 권도하의 여자를 뺏는다면, 저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도하의 곁을 파고들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오늘의 동맹이 실로 의미 있게 느껴졌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세준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6584914771813.png

“케이원 그룹, 권도하의 배경을 산산조각낼 거야.”

16584914771801.png

“……!”

하린이 놀란 듯 눈썹을 높이 치켜들었다.

16584914771813.png

“이번 박람회에서 케이원이 침몰 직전의 배라는 걸 보여주면, 서지안 그 여자도 제 살길을 찾아 도망치겠지. 권도하 사고 때. 민하린, 네가 그랬듯.”

16584914771801.png

“……!”

16584914771813.png

“내가 아는 한 권도하는 자기 사람이 불행해지는 걸 견디지 못해. 침몰하는 배에서 자기 여자를 가장 먼저 내보낼 사람이라고.”

서지안을 유혹하는 방법이 아니라, 도하를 몰락시키겠단 그의 말에 하린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16584914771801.png

“세준 씨!”

그녀가 노한 이유를 모를 리 없는 세준이 여유롭게 말했다.

16584914771813.png

“권도하 배경 보고 다시 돌아가려던 건 아니잖아? 케이원보다 우리 CTM이 한참 앞서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16584914771801.png

“……그렇다고 침몰이 임박한 걸 알면서 그 배에 올라탈 만큼 미친 사랑도 아니야!”

하린이 악에 받쳐 소리치자, 세준은 진정하라는 손 제스처를 보이며 말했다.

16584914771813.png

“워워. 걱정하지 마. 한때 나랑 약혼까지 한 너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16584914771801.png

“…….”

16584914771813.png

“권도하와 멀리 떠나 새 출발 할 수 있게 위자료를 챙겨줄게. 평생 돈 걱정할 일은 없을 정도로.”

돈 이야기에 그나마 위안을 받은 듯 하린의 붉으락푸르락했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16584914771801.png

“그래서, 이번 박람회에서 뭘 어떻게 하려고?”

그녀가 다시 눈을 치뜨고 묻자, 무언가를 떠올리던 세준의 안면 위로 저열한 미소가 번졌다.

***

이른 아침, 도하와 지안은 객실 룸서비스로 나온 조식을 먹고 있었다.

지안은 샌드위치를 한입 작게 베어 물며, 머릿속으로 지난 밤을 떠올렸다.

밤새 도하의 팔을 베개 삼아 배고, 그의 품에 한 몸처럼 꼭 붙어 잤다는 사실이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최대한 그와 눈길이 닿지 않게 시선을 절제하는 그녀와 달리, 도하는 식사 내내 지안을 노골적으로 보고 있었다.

아침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은 도하가 물었다.

16584914733573.png

“그 말, 정말이야?”

1658491473369.jpg

“뭐가요?”

16584914733573.png

“내가 걱정되고, 신경 쓰이고, 자꾸 눈에 밟힌다던 말.”

1658491473369.jpg

“……!”

지난 새벽. 감성에 취해, 어색한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지안은 가장 솔직한 진심을 고백했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 또렷한 정신으로 그 말을 들으니 온몸에 닭살이 돋을 만큼 민망했다.

1658491473369.jpg

“커, 컥.”

지안이 사레들린 기침을 뱉자, 도하는 픽 웃으며 말했다.

16584914733573.png

“박람회장 가보면 알겠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바쁠 거야. 오가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정신도 없고.”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더군다나 대표는 주최 측 미팅과 업체 미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1658491473369.jpg

“……네.”

16584914733573.png

“그러니까 오늘도 내 걱정 많이 해주라고.”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내가 눈에 보일 때도, 보이지 않을 때도. 계속 내가 신경 쓰이고, 눈에 밟혔으면 좋겠어.”

1658491473369.jpg

“……!”

상사의 명령이라 하기에도,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애정 표현이라 하기에도 모호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심장을 툭 건드렸다.

지안은 왠지 모를 민망함에 꾸역꾸역 샌드위치를 입속에 밀어 넣었다.

볼이 터질 듯 빵을 욱여넣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도하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곤 그녀의 입술 옆 발그레한 뺨에 붙은 빵 조각을 손으로 가볍게 털어내며 말했다.

16584914733573.png

“행사장에 있으면 바빠서 빵으로 간단히 식사를 때울 때가 많을 거야.”

1658491473369.jpg

“……알아요.”

16584914733573.png

“그때마다 이렇게 아이처럼 묻히고 먹으면 곤란하다고.”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나도 모르게 지금처럼 손이 나가면 안 되니까.”

그 말을 하는 도하의 눈이 어제보다 한결 더 깊어졌다는 걸, 입가에 스민 미소의 온도가 1도 이상 따뜻해졌다는 걸 지안은 가슴으로 느꼈다.

주체할 수 없는 심장 박동에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지안의 고개가 분주히 돌아갔다.

시선을 한곳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다이나믹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형 규모의 박람회장은 수백여 개의 부스가 복작복작하게 설치돼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커머스 기업부터 리테일, 물류 체인회사와 운송사 등 각종 딜리버리 사업체들의 이름이 보였다.

그때 옆에 있던 도하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16584914733573.png

“저기 한번 봐볼래?”

도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1658491473369.jpg

“……와!”

행사장 한가운데에 전시된 거대한 크기의 자율주행 운송 트럭과 배송 로봇.

박람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전시품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보는 사람들을 압도시켰다.

지안은 한국에서 다른 주제로 열린 박람회를 몇 번 참관해본 적 있었지만, 규모부터 모든 것이 차원이 달랐다.

케이원 부스를 찾아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 앞에 웬 금발 머리 남자가 다가왔다.

1658491481367.jpg

“제이크!”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도하를 ‘제이크’라고 부르며 격하게 포옹했다.

지안은 한 발자국 떨어져 두 남자를 지켜보았다.

구슬 굴러가듯 빠른 원어민의 영어는 그녀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알아듣기 힘든 속도였다.

하지만 도하는 현지인처럼 능숙하고 유창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유려한 발음과 상대를 웃기는 현지식 유머까지, 그의 영어 실력은 영어 초보의 눈에도 완벽해 보였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듯 두 남자를 지켜보던 그녀가 순간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두 남자의 시선이 어느 순간, 저를 향해 고정된 것이었다.

어.

그때 금발 머리 남자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두 남자의 깜짝 만남은 종료되었다.

지안의 옆으로 돌아온 도하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16584914733573.png

“안경 없어?”

뜬금없는 질문에 지안이 눈을 크게 뜨고 대꾸했다.

1658491473369.jpg

“안경이요? 저는…… 시력이 나쁘지 않아서 안경 안 쓰는데.”

16584914733573.png

“이따 잠깐 나가서 도수 없는 거로 하나 맞추고 오자고. 진한 뿔테 안경으로.”

1658491473369.jpg

“네? 갑자기 안경은 왜?”

지안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묻자, 그도 따라 서며 말했다.

16584914733573.png

“예쁜 건 만국 공통인가.”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방금 그 녀석, 내 와튼 스쿨 동기인데, 예쁜 여자 추종자로 유명했다고. 동서양 가리지 않는 건 물론이고.”

1658491473369.jpg

“그걸 왜…….”

16584914733573.png

“저 녀석이 자꾸 당신을 묻잖아. 예쁘다고, 애인 있냐면서.”

1658491473369.jpg

“……네?”

지안이 놀란 듯 눈썹을 높이 올리자, 도하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16584914733573.png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듣게 잘 얘기했으니까.”

1658491473369.jpg

“……네?”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가 눈을 연신 깜빡이자,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84914733573.png

“애 셋 딸린 아줌마라고 했어. 나이는 마흔다섯.”

1658491473369.jpg

“……!”

16584914733573.png

“어디서 동양인이 어려 보인다는 소릴 들었는지, 바보 같은 녀석이 쉽게 믿더군.”

말을 마친 도하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흘렀다.

16584914835408.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