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노크맨 VS 치타맨
(53/110)
53화. 노크맨 VS 치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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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노크맨 VS 치타맨
2022.06.03.
참관객이 지나다니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케이원 부스와 CTM 부스가 마주 보고 있었다.
케이원 부스의 두 배는 될법한 CTM 행사장은 화려한 조명과 광고 영상, 배달용 드론 쇼로 참관객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개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부스 안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에 반해 케이원 부스는 아직 조용했다.
지안은 적막한 부스 안을 맴돌며 맞은편 부스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 CTM 부스 쪽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나오셨습니까, 대표님. 사모님.”
지안은 가만히 그쪽을 응시했다.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세준과 언제 봐도 화려한 하린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
부스 안을 살피던 두 사람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맞은편 케이원 부스 쪽으로 옮겨왔다.
두 사람은 금세 케이원 부스 안을 스캔하고, 그 안에 서 있는 지안을 비웃음 띤 눈으로 바라봤다. 지안은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가벼운 미소로 응수했다.
잠시 CTM의 화려하고 커다란 부스에 주눅 들었던 마음이 두 사람을 보는 순간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행사장은 주인처럼 겉모습이 화려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그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자꾸 우월감을 느낄 대상을 찾거나, 남의 것을 빼앗아 채워 넣으려 한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안이 근거 없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자, 세준과 하린의 얼굴은 금세 차게 식었다.
불편한 시선을 등지고 그녀가 돌아선 순간, 저만치 앞에 그녀의 허리춤에도 차지 않을 것 같은 파란 눈의 꼬마가 보였다.
가만히 보니, 꼬마는 케이원 부스 앞에 전시된 곰돌이 풍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꼬마, 네가 우리 첫 번째 손님이구나.”
지안은 나직이 혼잣말하며, 아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아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있는 풍선을 꺼내 작은 품에 안겨주었다.
“이건, 우리 케이원 부스를 방문한 첫 손님에게 주는 선물이야.”
지안이 짧은 영어를 동원해 말하자, 꼬마의 얼굴에 둥근 미소가 피어올랐다.
꼬마는 수줍게 ‘땡큐’라고 말하며, 풍선 아래에 달린 끈을 잡고서 저만치로 뛰어갔다.
아이들의 천진함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구나.
지안은 콩콩 뛰어 어딘가로 사라지는 꼬마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
“박람회 동안 선보일 한국식 딜리버리 시범 서비스에 대한 기대가 아주 큽니다.”
은발의 박람회 위원장의 말에 도하가 즉각 영어로 답했다.
“행사 기간 동안 이벤트성으로 운영되는 서비스이기에, 실제 한국 상황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도하의 말에 운영진은 이해한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여태껏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이벤트이기에 우리 박람회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으로 기록될 겁니다.”
미팅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세준을 본 도하의 눈언저리에 저도 모르게 힘이 바짝 들어갔다.
운영회 측 임원들과 인사를 나눈 세준은 가장 나중에 도하를 향해 형식적인 눈인사를 건넸다.
세준이 자리에 앉자, 위원장이 그를 치하하듯 말했다.
“이번 박람회, 최고의 아이디어를 내주신 지 대표님이 아니신가.”
세준은 겸손한 척 대꾸했다.
“아닙니다. 한국식 딜리버리 서비스를 미국에 선보일 기회를 주신 위원장님 이하 임직원분들이 더 훌륭하시지요.”
도하는 그제야 이 모든 게 세준이 낸 아이디어였다는 걸 알게 됐다.
박람회 측에서 갑작스럽게 현지 서비스 시연을 부탁해왔고, 박람회에 참가한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번 박람회에서 케이원은 꼭 잠재력을 인정받아 해외 투자 파트너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박람회 측의 부탁을 거절하면, 좋은 바이어와의 미팅이 성사되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현재 한창 서비스가 가동 중인 CTM과 3년 전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케이원의 상황은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초에 좌절할 필요도 없었다.
도하는 CTM의 치명적인 문제를 간파하고 있었다. 겉으론 성공 가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위태로운 레이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럼, 두 한국 대표님들만 믿고 있겠습니다.”
기대에 찬 위원장의 말을 끝으로 미팅은 끝이 났다.
회의장을 나온 도하의 뒤통수로 세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우뚝 걸음을 멈춘 도하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스스로한테 하는 말인가?”
도하의 사늘한 응수에 세준이 입꼬리를 가늘게 떨며 말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아직 현실 파악을 못 하나 본데, 지금 이 상황에서 무리하는 게 진짜 누구인지 몰라?”
“…….”
도하는 대꾸 없이 서 있었다.
“3년간 최고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는 우리 CTM이 무리하는 걸까, 3년간 방치된 낡고 녹슨 시스템을 미국에서 선보이려는 케이원이 무리하는 걸까.”
세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는 그의 말을 따라 하며 조소를 흘렸다.
“업계 1위, 최고의 시스템. 하하.”
“지금 그 웃음! 무슨 뜻이지?”
세준이 어금니를 물고 묻자, 도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구보다 CTM의 현 실정을, 내부 상황을 잘 아는 대표의 입에서 그런 가증스러운 단어들이 나오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그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
도하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세준은 가슴으로 불덩이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케이원이 급하게 박람회 참가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준은 누구보다 환호했었다.
현실 물정을 모르는 도하에게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CTM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초라한 케이원의 현실을 낱낱이 까발려 모든 기회를 앗아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초연하고 여유가 있어 보이는 도하의 모습에 세준은 되려 제가 더 당황했다.
도하가 먼저 자리를 뜨자, 그 자리에 혼자 남은 세준은 핏기가 가실 정도로 굳게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이었다.
타악!
“어!”
어디선가 바람처럼 달려온 꼬마 하나가 그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세준은 꼬마를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너! 어딜 보고 다니는 거야!”
뜨끔, 놀란 꼬마가 주눅 든 얼굴로 바짝 얼어붙었다.
세준이 화난 걸음을 저벅저벅 옮겨 자리를 떠나고, 꼬마는 바닥에 떨어진 곰돌이 풍선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저만치 앞 회의룸 문이 열리고 박람회 운영진들이 나왔다.
누군가를 발견한 꼬마가 풍선을 흔들며 앞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꼬마를 본 은발의 신사가 두 팔을 크게 벌렸다.
***
부스로 돌아온 도하의 눈이 무언가를 보고는 휘둥그레졌다.
한 시간 전, 미팅을 위해 자리를 비울 때만 해도 휑했던 부스 안이 어느새 참관객들로 가득했다.
놀란 그의 곁으로 승훈이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사모님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승훈의 말에 도하는 사람들로 복작복작한 부스 안에서 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을 읽은 승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 안 계시고, 저기 계십니다.”
승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본 도하의 눈이 순간 커졌다.
얼른 걸음을 옮겨 그녀가 있는 곳 가까이로 간 도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지안을 눈에 담았다.
“익스큐즈 미.”
지안이 싱긋 웃으며 행사장 안으로 입장하는 참관객들에게 케이원 팸플릿을 나눠주고 있는 게 보였다.
도하가 그녀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지안은 관성처럼 ‘익스큐즈 미’ 하며 팸플릿을 내밀었다.
“서지안.”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그녀가 놀란 듯 뱉었다.
“도하 씨!”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알면서 묻는 그의 말에 지안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부스에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 좀 더 생산적인 일이 없을까 해서요.”
“그래서 홍보 요원을 자청한 거라고?”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에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좀 오래 했었거든요. 예전 실력 좀 발휘해봤죠.”
“……뭐?”
“전단지 아르바이트의 성패는 좋은 자리 선점에 달렸거든요. 근데 여기 봐요. 제일 좋은 입구를 차지한 거 있죠!”
신이 나서 말하는 지안의 모습에 도하는 저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표정을 애써 가다듬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하고 와서 부스로 돌아와. 비서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홍보가 아니라 내 옆을 지키는 일이니까.”
두 사람이 부스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모니터 화면에 딜리버리 서비스 시작 알림이 떴다.
박람회 동안 현지 주민들에게 케이원의 노크맨과, CTM의 치타맨 앱을 설치하게 하고, 마트 물류창고에서 각종 생필품과 식품을 빠르게 배송하는 시범 서비스였다.
그때 승훈이 다급히 도하를 찾았다.
“대표님, 노크맨 첫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말에 모니터 앞으로 달려온 도하가 침착하게 말했다.
“물류센터에 파견된 우리 쪽 직원은요?”
“네. 조금 전 확인 결과 작업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배달 담당 직원은요?”
“대표님께서 당부한 사항 전부 전달했고, 오전 시범 운행에서도 문제없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주문 승낙하고 진행하도록 하세요.”
도하의 말에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30분 후.
케이원이 첫 주문을 받은 시간과 동시에 또 다른 주문을 받은 CTM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준은 부스 한 편에서 생각에 잠긴 채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크맨으로 들어간 첫 주문은 세준이 현지 주민을 매수해 넣은 가짜 주문이었다.
그리고 배달 경로에 노크맨의 오토바이로 뛰어들어, 가짜 사고를 낼 스턴트맨 출신도 미리 섭외해 둔 상황이었다.
3년 만에 재기를 노리는 노크맨의 첫 배달은 비참한 사고로 끝이 날 것이다.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은 자국에 있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분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케이원은 나라 망신을 준 민폐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라 자부한 세준의 입가로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 현지 배달 서비스 총괄을 맡은 매니저의 전화였다.
“그래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여유로운 세준의 목소리와 달리 수화기 너머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일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차질이라니!”
-노크맨 배달원이 저희가 대기하고 있던 예상 경로를 벗어나, 다른 길로 이미 배달을 마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빠른 배달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름길을 두고, 먼 길로 돌아갔다는 얘기였다.
-알아보니, 좁은 골목이나 지름길은 이용하지 말고, 크고 안전한 길로만 운행하라는 권 대표의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뭐?”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던 저희 쪽 배달원이 박람회장 바로 앞에 도착해 자전거와 접촉사고를 낸 모양입니다.
“접촉사고라니!”
-죄송합니다. 노크맨 쪽보다 빨리 복귀하려고 서두르다 그만. 아무래도 일을 수습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수습은 나중에 하고 빨리 박람회장에 복귀부터 하라고 하세요! 노크맨보다 늦게 돌아와선 절대 안 됩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하필 자전거 운전자가 아직 어린…….
“빨리! 무슨 수를 써서든 빨리 복귀하게 하라고!”
광분한 세준이 소리치던 그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은발 머리 남자가 복도를 미친 듯 뛰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