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덫에 걸린 짐승
(54/110)
54화. 덫에 걸린 짐승
(54/110)
54화. 덫에 걸린 짐승
2022.06.06.
-대표님께서 사고 수습은 잠시 미뤄두고, 빨리 복귀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빨리 움직이세요! 안 그랬다간 우리 전부 다 밥줄 끊기게 생겼으니!
전화를 끊은 배달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바라봤다. 그러곤 애써 그곳을 외면한 채 다시 헬멧을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가 폭발적인 엔진 소음을 내며 날쌔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우우우우웅-.
귀청을 때리는 흉포한 엔진 소리에 지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현지 배달 서비스 오픈으로 정신없는 직원들을 위해 커피와 간단한 디저트를 사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조금 전, 오토바이가 지나간 자리를 보던 그녀의 눈이 순간 커졌다.
도로에 엎어진 자전거와 그 아래로 깔린 무언가가 보였다.
걸음을 옮길수록 자전거 아래 깔린 무언가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얀색 티셔츠와 회색 체크무늬 바지. 왠지 눈에 익은 옷차림의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작은 아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숨이 가쁠 정도로 달려 가까이 다가간 후의 일이었다.
“꼬마야!”
지안은 커피가 든 캐리어를 옆에 던져두고 급히 아이에게로 갔다.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아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지안은 급히 아이의 몸을 깔고 있는 자전거를 들어 옆으로 옮겼다.
우연히 시선이 닿은 자전거 바구니에 낯익은 물건이 보였다.
바람이 빠진 갈색 풍선 아래 달린 끈에 ‘케이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 이건.”
바닥에 쓰러진 아이는 오전에 케이원 부스를 방문했던 첫 손님,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던 꼬마가 분명했다.
지안은 잽싸게 아이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호흡은 정상이었다. 그러곤 지혈할 것을 찾듯 주변을 살피다 입고 있던 린넨 소재의 블라우스 자락을 다급히 찢어 아이의 이마에 흐르고 있는 피를 막았다.
때마침 옆을 지나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다가와 911에 전화를 걸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지안은 아이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며 구급차를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한 구급차.
구조대원들이 아이를 들것에 실어 옮기던 그때, 저만치서 누군가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지안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은발의 노신사가 상기된 얼굴로 구급차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이로 봐서 남자는 아이의 할아버지뻘이 되어 보였다.
넋이 반쯤 나간 노신사가 뛰어와 아이를 보곤 눈시울을 붉히다 함께 구급차에 올라탔다.
할아버지가 온 걸 알았는지, 의식 없던 꼬마의 눈꺼풀이 몇 차례 꿈틀거리다 이내 조금씩 뜨였다.
아이는 힘겹게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옆에서 울먹이는 노신사를 한 번, 저만치 먼 곳에 멍하니 서 있는 지안의 얼굴을 한 번, 눈에 담았다.
그러곤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속삭였다.
“곰돌이 풍선…….”
***
[노크맨 정상 배달 완료]
커다란 상황 모니터에 알림이 뜨자, 도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첫 현지 배달을 성공리에 완수한 그와 직원들은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흘렸다.
수십, 수백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준비했기에 당연한 결과였지만, 3년의 공백으로 마냥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야 한시름 놓은 도하는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지안과 눈이 마주쳤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거기에 그녀는 없었다. 길 잃은 눈동자가 방황하듯 흔들리다 이내 골똘해졌다.
혹시 또 입구에서 홍보 팸플릿을 나눠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그쪽도 둘러보았지만, 거기에도 지안은 보이지 않았다.
도하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눈치 빠른 승훈이 다가와 그에게만 들리게 나직이 속삭였다.
“사모님, 아까 직원들 줄 커피 사러 간다고 나가셨어요.”
가만히 듣던 도하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말입니까?”
“……네.”
도하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자, 승훈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영어도 서툴고, 이쪽 길도 잘 모르는데…….”
도하가 혼잣말처럼 뱉자, 승훈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네요.”
“아닙니다. 한 팀장 잘못이 아니에요. 사전에 주의하라고 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도하는 그 말을 하며 잠시 부스 안을 돌아봤다. 그러곤 그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주겠어요?”
승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는 돌진하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박람회장 출입문을 지나는 그의 안면 위로 어느 때보다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울이었다면, 이렇게 걱정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여긴 미국이었다.
영어도 어설프고, 이곳 지리도 어두운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 요소가 많은 곳.
게다가 쓸데없이 얼굴까지 예뻐서 추근대는 남자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점점 골치 아픈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던 그때, 행사장 밖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서지안!’
도하는 눈에 힘을 바짝 넣어 그곳을 응시했다.
눈을 씻고 봐도 그녀가 분명한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말끔히 올려 묶었던 머리는 반쯤 풀리다시피 헝클어져 있었고, 그녀의 맑은 피부만큼이나 하얗던 블라우스에도 웬 얼룩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하는 계단을 뛰어내리다시피 달려가 그녀의 앞에 단숨에 다다랐다.
“서지안!”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날아온 묵직한 음성에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하 씨.”
지친 기색이 역력한 눈빛과 이마에 밴 땀방울. 거기에 하얀 블라우스 곳곳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
붉은 자국을 따라가던 그의 시선이 그녀의 한쪽 블라우스 아래가 찢겨나간 것을 보곤 그대로 굳었다.
뒤통수를 둔중한 무언가로 두들겨 맞은 듯 멍한 그의 귓가로 지안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왜 나왔어요. 서비스 오픈해서 많이 바쁘잖아요.”
“…….”
도하는 대꾸 없이 텅 빈 눈동자로 그녀의 찢긴 옷을 여전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지안이 천천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와 완전히 일그러진 콧잔등, 매섭게 뒤틀린 입매까지.
놀란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하 씨, 무슨 일 있…….”
지안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도하가 그녀의 어깨 위로 두 손을 툭 얹으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냐고!”
“……!”
충혈된 듯 붉은 눈과 무섭게 선 목의 핏대가 그녀의 눈에 차례대로 박혀왔다.
도하는 거칠어진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내뱉었다.
“어서 말해! 누가 당신한테 이런 건지!”
그가 이렇게 흥분한 건, 눈빛에서 이토록 살기가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지안은 다급한 마음에 말했다.
“도하 씨,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녜요!”
“…….”
그녀의 말에 도하는 부서질 듯 흔들리는 시선을 애써 고정하고, 그녀의 입술을 주시했다.
지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차분하게 조금 전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잿빛처럼 어둡던 도하의 얼굴도 비 온 뒤 갠 하늘처럼 조금씩 변해갔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 전의 충격이 남은 듯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이 깨지는 줄 알았다고.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전 그저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핏자국이 묻든, 옷이 찢기든,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이를 구한 건 잘한 일이지만, 이렇게 사람 심장을 쥐었다 폈다 숨 막히게 한 건 혼날 일이야.”
“…….”
“이리 와.”
그러곤 거칠게 그녀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터억.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포옹에, 맥이 빠져 있던 그녀의 몸이 휘청, 부서질 듯 흔들렸다.
도하는 그 작은 흔들림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더 굳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부터 내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마.”
오가는 사람이 많은 박람회장 앞에서 나누는 진한 포옹.
그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소음과 쏟아지는 시선들이 현실감 없던 상황을 다시 현실로 데려다 놓았다.
시선을 의식한 지안은 그의 품 안에서 낑낑대며 말했다.
“……도하 씨, 사람들, 사람들이 보잖아요.”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보라고 해. 남편이 자기 아내를 좀 안는 게 뭐 어때서.”
“도하 씨…….”
“걱정하지 마, 여기 미국이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
잠시 짓궂은 미소를 흘리던 그가 다시금 나직이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를 구한 것도 좋지만, 당신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사람, 지켜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
“그러니까 함부로 사라지지 마. 내 눈이 닿는 곳, 그 안에만 있으라고.”
“……!”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격한 포옹에, 지금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도하는 꼭 껴안은 작은 품을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
툭, 툭, 툭.
세준은 초조함이 가득 깃든 손가락으로 연신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뒤로 노 실장이 다가왔다.
“대표님.”
그 어느 때보다 근엄한 표정의 노 실장은 세준의 귓가에 손을 받치고 조심스레 무언가를 전달했다.
노 실장의 이야기를 들은 세준의 눈이 순간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뭐요? 박람회 위원장 손자?”
“……현장을 수습하러 갔을 땐 이미 구급차가 떠난 후였습니다.”
놀란 세준의 동공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CCTV는! CCTV는 사수했습니까?”
그가 다급히 묻자, 노 실장은 곤란한 듯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행사 운영회 쪽에서 먼저 확인한 듯싶습니다.”
세준의 안면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다, 불안한 시선이 이따금 노 실장을 향해 고정되었다.
“노 실장이라면, 이번에도 빠져나갈 대안에 대해 생각해 놓은 게 있겠지요?”
입바른 소리를 너무 자주 해 신경을 건드리는 면이 있었지만, 노 실장은 위기 때마다 누구보다 신속하게 돌파구를 제시했었다.
비빌 구석이 하나도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세준은 희망을 걸듯 그를 불렀다.
“노 실장님?”
하지만 노 실장은 고개를 더 깊이 숙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번엔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조금 전에 박람회 측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고 합니다.”
“……전화라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노크맨 쪽 오토바이에 뛰어들려고 대기 중이던 스턴트맨이 박람회 측에 연락한 것 같습니다.”
“뭐? 뭐요?”
“처음에 그자를 섭외할 때, 딜리버리 박람회에서 상영할 안전 주의 홍보 영상이라고 설명했던 게 실수였습니다.”
“……!”
“혼자 대기하다 지친 스턴트맨이 박람회 측에 직접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저희 쪽에 전화했으나, 저희 모두 사고 수습 중이어서 연락을 못 받았고요.”
“……하아.”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세준은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