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미국 감옥을 구경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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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미국 감옥을 구경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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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미국 감옥을 구경하고 싶다면
2022.06.10.
병실 앞 복도에서 박람회 위원장인 아서 로저스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 아서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CCTV 확인 결과, 노아를 친 오토바이에서 CTM이라는 회사 로고가 확인되었습니다.
“CTM? 지 대표의 CTM 말인가!”
-네. 처음엔 배달원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사고를 수습하려는 듯하다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뭐?"
노신사의 눈썹 사이로 짙은 주름이 잡혔다.
“어떻게, 어떻게 피 흘리는 작은 아이를 두고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현지 첫 서비스 시범에서 노크맨에 앞서기 위해 CTM이 악수를 둔 것 같습니다.
“그깟 속도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외면하다니! CTM이 추구하는 스피드가 이런 거라면 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네!”
-그리고 좀 전에는 웬 스턴트맨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스턴트맨이라니?”
-저희 박람회 측에서 배달 안전 주의 홍보 영상을 위해 전문 스턴트맨을 섭외했다고 하더군요.
“안전 주의 홍보 영상? 우린 그런 걸 준비한 적 없지 않나! 처음 듣는 소리인데.”
-그렇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확인했더니, CTM의 지세준 대표 이름을 말하더군요.
“지 대표를?”
-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스턴트맨이 대기하고 있던 곳이 노크맨이 배달을 나간 곳의 동선과 겹쳤습니다.
“아니, 어떻게!”
-스턴트맨이 말하길, 노크맨이라는 로고가 박힌 오토바이 앞에 뛰어드는 게 자신이 맡은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설마 노크맨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지 대표가 그런 짓을 꾸몄단 건가!”
-정황상 그렇습니다.
“그럼 노크맨은 그 동선을 지나가지 않은 건가?”
-스턴트맨이 대기하고 있던 곳이 시간을 단축하기에 유리한 지름길이 맞지만 워낙에 길이 좁고, 시야 확보가 잘되지 않는 곳이라 사고 위험 다발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노크맨은 그 길을 애초에 동선에서 제외한 듯합니다.
전화를 받던 아서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배달에 대한 CTM과 케이원 두 회사의 완전히 다른 자세가 단적으로 보였다.
“아무리 성공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사람이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 있게 마련이거늘!”
날 선 그의 눈빛이 매섭게 허공을 찔렀다.
-어떻게 할까요. 위원장님.
“…….”
두말할 것 없이 경찰에 넘기는 게 당연했다. 오토바이로 아이를 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 건 엄연한 뺑소니였다.
강경하던 아서의 눈빛이 얼마 못 가 맥없이 흔들렸다.
오늘 막 문을 연 박람회에 이번 사고가 이슈가 되면, 그동안 고생해온 수백 명의 박람회 관계자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뺑소니를 저지르는 딜리버리 회사를 참가 기업으로 승인한 박람회 측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이 일을 공론화시켜 마땅한 벌을 주고 싶었지만, 위원장으로서 수많은 사람의 노력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다행히 노아의 상태는 양호했다. 아이는 금세 의식을 되찾았고, 간단한 상처 봉합 시술 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씩씩하게 회복 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CTM 부스를 바로 철거시키고, 지 대표를 당장 한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게. CTM과 예약되어 있던 투자자 미팅도 모두 취소시켜야 한다네. 물론 지 대표가 바이어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하고.”
-네. 위원장님!
아서가 무거운 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위원장님!
“그래, 뭐가 더 남았나.”
-한 가지 전달 못 드린 게 있습니다. 아까 노아가 오토바이에 치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동양인 여자가 제 옷을 찢어 아이를 지혈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혔습니다. 그 여자가 구급차가 올 때까지 노아의 곁을 지켰던 것 같습니다.
“뭐?”
아서는 미간을 좁히며 몇 시간 전의 다급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넋이 나간 채 구급차를 향해 뛰어가던 그때, 어렴풋이 한 여자를 본 것 같았다. 작은 체구의 동양인 여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구급차 쪽을 보고 있었다.
아서가 목에 힘을 주어 뱉었다.
“그 여자를 찾아주게. 꼭 찾아야 하네.”
-네. 알겠습니다.
***
하린은 양손에 음료가 든 캐리어를 들고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노크맨과 치타맨에 첫 주문이 들어오는 걸 보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오는 길이었다.
계획에 대해 절대 말해주지 않으려는 세준을 끈질기게 졸라 그의 계획을 듣게 됐다.
보기보다 영악하고 치밀하게 설계한 계획에 아직 버리긴 아까운 남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맞은편 부스로 어렴풋이 보이는 도하의 집중한 얼굴에선 세준에겐 없는 열정과 섹시함이 느껴졌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마력이었다.
세준의 계획대로라면,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시간.
하린은 추락한 도하에게 천사처럼 손을 내밀어, 지난날 그를 외면하고 도망친 흑역사를 세탁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스미는 미소를 감추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두 회사의 부스가 함께 눈에 들어오는 복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먼저 케이원 쪽 부스를 살폈다.
세준의 계획대로 됐다면,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부스 안이 무슨 영문인지 조용하고 차분했다.
직원들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고, 서류를 검토하는 도하의 모습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순간, 소란한 소음이 귓가로 끼어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격앙된 세준의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난장판이 된 CTM 부스가 보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색 정장의 장정들이 부스 안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팸플릿과 각종 서류가 올려져 있던 테이블이 쓰러져 바닥이 엉망이었다.
부스 안을 훑던 하린의 눈이 자연스레 세준에게로 향했다.
세준은 장정들에게 영어로 거칠게 항의했다.
“부스를 철거하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자 위압적인 덩치의 흑인 남자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울림 좋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위원장님 지시입니다. 부스를 철거하고 떠나든지, 아니면 경찰서에 함께 가시든지 알아서 선택하면 됩니다.”
경찰서라는 말에 벙찐 세준의 눈이 중심을 잃고 정처 없이 흔들렸다.
“……!”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린이 급히 부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세준 씨!”
“…….”
세준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볼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세준 씨, 강제 철거라니! CTM이 왜 철거해야 하는데!”
하린이 세준의 팔을 붙잡아 흔들자, 세준은 귀찮다는 듯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탁!
그가 허공을 향해 휘두른 팔이 하린의 손에 들린 음료 캐리어를 정확히 강타했다.
순식간에 허공으로 튀어 오른 음료가 그녀의 하얀색 원피스를 그대로 적시고 바닥으로 쏟아졌다.
“앗 뜨거워! 으악!”
“……!”
“지금 뭐 하는 거야!”
원피스 배꼽 아랫부분이 짙게 젖은 하린이 팔짝 뛰며 소리쳤다.
그녀가 몸부림치며 손으로 옷을 문지를수록 젖은 부위가 민망하게 번져갔다.
마치 옷에 실수한 것처럼 생긴 자국은 볼수록 더 황당했다. 그녀가 수습을 위해 화장실에 가려고 황급히 몸을 돌리는 순간, 맞은편 부스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썹 사이를 좁히고 저를 한심하게 보고 있는 도하와 동정하는 건지 안타까워하는 건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서지안.
들키고 싶지 않은 꼴을, 가장 보이기 싫은 사람들에게 들킨 하린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하린은 배꼽 아랫부분이 처참하게 젖은 옷을 손으로 거칠게 붙잡고 도망치듯 화장실로 뛰어갔다.
***
위원장의 손자가 입원한 병원을 어렵게 알아낸 세준은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서는 한국의 딜리버리 사업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고, 그 선두에 있는 CTM과 세준을 누구보다 신뢰했었다.
그래서 굵직굵직한 해외 투자자들과 CTM을 연결시켜주는 중개인 역할을 자처했고, 이번 박람회에서 첫 미팅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D그룹 도 회장이 갑작스럽게 투자를 철회한 일로, 이번 해외 투자자들과의 만남은 CTM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데, 그 역사적인 순간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병실 앞에 도착한 세준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노크했다.
똑똑.
얼마 후 병실 문이 열리고 아서의 얼굴이 보였다.
세준을 발견한 그의 눈이 순간 매서운 빛을 띠며 가늘어졌다.
세준은 금세 닫히려는 문을 다급히 막으며 소리쳤다.
“위원장님, 오해가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십시오.”
아서는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며 대꾸했다.
“내 목숨보다 귀한 손자를 버리고 간 자의 말은 듣고 싶지 않네. 당장 썩 꺼지게나!”
“……오해입니다, 위원장님. 배달원이 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저도 정말 의문입니다.”
“듣기 싫네, 당장 여길 떠나게!”
아서의 목소리가 커지자, 병실 안에 있던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 쪽을 유심히 봤다. 그러다 세준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 아저씨! 저 아저씨예요! 나한테 괴팍하게 소리친 아저씨가!”
병실에서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에 세준의 눈이 순간 커졌다.
핏기없이 희멀건 한 낯빛으로, 머리 쪽에 붕대를 감은 아이는 그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회의룸 앞에서 바람처럼 날아와 제 몸에 부딪혔던 꼬마 아이.
‘너! 어딜 보고 다니는 거야!’
도하 때문에 끓어오른 화를 모두 담아 애먼 아이에게 윽박을 쳤던 기억이 빠르게 스쳐 갔다.
노아의 이야기를 들은 아서의 눈빛은 전보다 더 독기를 품고 날카로워졌다.
“당장 사라지게. 또 내 눈앞에 나타났다가는, 그땐 미국 감옥이 어떤 곳인지 구경하게 해줄 테니!”
“……!”
아서는 거칠게 병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복도에 혼자 남겨진 세준은 온몸을 파르르 떨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 나갔다.
세준을 돌려보낸 아서의 낯빛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가볍게 휴대폰을 귀로 가져다 대자 익숙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원장님, 노아를 구해준 사람을 찾았습니다!”
“정말인가?”
그의 어둡던 안색이 순간 밝아졌다.
“참관객이었다면 찾기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 박람회에 참가한 기업 소속이었습니다.”
“그래! 어디 소속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