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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꾀병 눈에는 꾀병만 보인다 (57/110)


57화. 꾀병 눈에는 꾀병만 보인다
2022.06.17.


지안이 병실로 들어서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이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곰돌이 풍선!”

우렁찬 노아의 목소리에 지안은 안도한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몇 시간 전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씩씩한 모습이었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도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곰돌이 풍선?”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게 있어요. 우리끼리만 아는.”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 도하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뭔데 그래, 말 안 해 줄 거야?”

“…….”

지안은 대꾸 없이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 노아의 작은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꼬마, 너 아까 많이 놀랐지? 나쁜 오토바이! 누나가 때찌 해 줄게.”

지안은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말하고 있었지만, 노아는 그녀의 표정과 따사로운 눈빛만으로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를 초월한 두 사람의 남다른 우정에 도하의 입꼬리도 부드러운 곡선 모양으로 휘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서가 도하의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에 우리가 낄 구석은 없어 보이는군.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나눌까, 권 대표?”

“네. 그러시죠.”

두 남자는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도하가 복도 의자에 앉기 무섭게 아서는 입을 열었다.


“우리 노아를 오토바이로 치고 도망친 게…… 바로 CTM 사람이었다네.”

“……네? 그게 정말입니까!”

놀란 도하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아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말했다.


“CTM의 경영 철학은 주객이 전도된 게 분명하네. 본래 이 딜리버리 사업이라는 건, 사람들을 편리하게 만들어주고, 만족시키기 위해 시작된 건데, 그 일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구조가 되었으니.”

“……!”

“CTM의 만행은 이게 다가 아니라네. 놀라지 말게.”

“……?”

“오늘 시범 서비스 때 노크맨에 들어온 첫 주문 말일세.”

“네.”

“그 주문도 CTM이 조작한 주문이었다고 하더군. 노크맨이 이동할 경로에, 오토바이로 뛰어들 스턴트맨까지 구해두었단 경악스러운 얘길 들었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렴치한 계획에 도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 대표가 어떻게 한국 1위 딜리버리 기업이 되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겠더군.”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런 일까지 꾸몄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마 몹시 두려운 걸 테야.”

“……네?”

“노크맨이, 권 대표가 다시 일어서는 게 두려워서 발악하는 것 같단 소리네.”

한때는 친구였던, 이제는 괴물이 되어버린 세준을 생각하며 도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는 세준과 상종하지 않고 제 길만 우직하게 가다 보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점점 더 광기로 변해가는 세준의 질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단순히 회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곁에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이상, 누군가의 광기로,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일을 볼 수는 없었다.

도하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쟁 회사이자, 지 대표의 오랜 친구로서 이제 더는 방관하지 않을 겁니다. 위원장님 말씀처럼 CTM이 어떻게 저 자리에 올랐는지 낱낱이 밝혀내야겠습니다.”

심지 굳은 도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났다.

아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



“누나.”

“눈……아?”

“잘하네, 노아. 다시 한번 해볼까? 누나!”

지안이 아이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노아는 생긋 웃으며 서툰 한국말을 신나게 따라 했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두 남자가 다시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지안과 노아는 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 보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서가 도하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말했다.


“노아가 저렇게 밝게 웃는 걸 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

“할아버지 손에 자라서 아이가 무뚝뚝한가 했는데,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도 아는 아이였어.”

아서의 말에 도하의 눈이 순간 커졌다.


“위원장님께서 아이를 직접 키우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군. 우리 노아는 지안 양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인데. 저 녀석, 한 번 마음에 든 건 절대 놓지 않으려 하거든. 그게 장난감이 됐든, 사람이 됐든.”

“……네?”

도하의 눈에 지안의 팔을 붙들고 있는 작은 고사리손이 보였다.

그때 노아가 아서를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 누나랑 더 놀아도 돼요?”

아서는 그것 보라는 눈빛을 도하에게 보내며 말했다.


“아서,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 누나도 그만 돌아가 봐야 하고.”

“싫어요! 누나가 옆에서 간호해주면 안 돼요?”

노아는 갑자기 콧잔등을 찌푸리며 아픈 듯 붕대 위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녀석, 아깐 하나도 아프지 않다더니.”

“아파요, 아직 아파요. 할아버지!”

아프다며 억지떼를 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도하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저도 언젠가 지안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 다 낫지 않았다고, 전부 다 낫기 전까지 어디 가지 말고 곁에 머물러 달라고.

작은 노아의 얼굴 위로 제 얼굴이 겹쳐 보이자,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안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힐끗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누나랑 놀게 해줘요!”

노아가 지치지 않고 졸라대자, 한동안 머리를 굴리던 아서는 묘안을 떠올린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노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병원은 너무 재미없잖아. 누나를 우리 집에 초대하는 거야.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노아 장난감도 같이 가지고 놀고.”

그 말에 느릿하게 속눈썹을 깜빡이던 노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누나가 우리 집에 오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아서는 도하를 향해 말했다.


“노아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네와 지안 양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어때, 괜찮겠나?”

저만치서 지안이 상황을 파악했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만 좋다면, 그는 어디든 프리패스였다.


“물론이죠. 저녁 초대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

저녁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병원을 나온 지안이 어깨를 살짝 웅크리며 가늘게 떨자, 도하는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그녀의 작은 어깨에 걸쳐줬다.


“어, 저 괜찮은데.”

“괜찮긴, 한 팀장이 너무 얇은 옷을 사 왔어. 여긴 일교차가 큰 편인데 말이야.”

그의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코트를 걸치자 제법 추운 기운이 가셨다.

곳곳으로 조명이 들어온 낯선 나라, 낯선 도시의 야경. 고즈넉한 거리를 나란히 걷는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때 도하가 나직이 말했다.


“미처 몰라봤네. 이렇게 만인이 탐내는 글로벌 간병 인재인 줄은.”

“……뭐라구요?”

지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도하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까 노아가 계속 붙잡았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뭘요?”

“옆에 남아 간호를 해줬을 거냐고.”

“……아이가 그렇게 원하는데, 어른으로서 당연히 있어 줘야죠.”

지안의 흔쾌한 대답이 조금 못마땅한 듯 도하가 비딱하게 말했다.


“그거 계약 위반이야. 이중계약은 곤란하다고.”

“……네? 계약 위반, 이중계약?”

지안이 딱딱한 말을 따라 하며 되묻자, 도하가 말했다.


“내가 먼저 당신을 간병인으로 계약했단 거 잊었어? 계약 기간 중에 다른 사람을 간병하러 가는 건 안 되지.”

“……!”

“노아가 정말 많이 아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녀석 딱 봐도 꾀병 같던데.”

계약을 거창하게 들먹이고 있었지만, 본질은 유치한 질투였다. 보다 못한 지안이 핵심을 찔렀다.


“……꾀병 눈엔 꾀병만 보이나 보죠?”

“뭐?”

“도하 씨도 아까 꾀병 부렸잖아요. 심장이 아프다고. 전 정말 어디가 잘못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꾀병 아니야.”

“……네?”

“누구만 보면 진짜 심장이 고장 난 것 같거든.”

“……!”

도하는 그 말을 하며 지그시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러곤 살짝 어깨를 웅크리며 말했다.


“영화에선 남자 주인공이 이렇게 옷을 벗어줘도 하나도 안 추워 보이던데.”

“……?”

“현실은 영 아니군.”

그 말을 하며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내가 감기 걸리면, 내 간병인이 힘들어질 테니까.”

“…….”

“미리 예방 접종.”

아이의 병문안을 다녀온 건지, 자기가 아이가 되어 나온 건지.

유치해진 도하의 모습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지안도 픽 웃음을 흘렸다.

***

다음 날. 케이원 부스는 바이어 미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CTM의 하차로 바이어들은 대안을 찾았고, 아서가 제 이름을 걸고 케이원의 노크맨을 추천한 덕분이었다.

박람회 전 온라인으로 들어온 사전 미팅은 고작 세 건에 불과했지만, 현장 미팅 신청이 스무 건 가까이 들어왔다.

도하가 정신없이 상황판을 보며 직원들과 미팅 스케줄을 조율하고 있던 그때, 저만치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까만 모자를 눌러쓴 세준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케이원 부스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서 위원장과 두꺼운 금장식을 온몸에 치장한 아랍계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크맨은 한국 최초로 혁신적인 딜리버리 사업을 고안해낸 기업입니다. 장담컨대, 앞으로 세계시장을 이끌어나갈 기업으로 성장할 겁니다. 무함마드 회장님께서 일찍이 알아보시고 투자하신다면, 후회 없으실 거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무함마드 회장’이라는 말에 모자 속 세준의 눈이 희번득하게 빛났다.

CTM이 예정대로 박람회 일정을 소화했더라면, 가장 공들여 미팅했을 1순위가 바로 석유 재벌 무함마드 회장이었다.

유망한 사업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공격적으로 투자하기로 소문난 무함마드는, 기업인이라면 누구나 함께 하고 싶어 하는 1순위 투자자였다.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릴 만큼 그가 손을 대는 사업은 무조건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그가 투자했다는 소문이 나면, 따라 하려는 투자자들이 넘쳐났다.

한마디로 무함마드의 간택을 받게 된 기업은, 투자에 있어서 모든 물꼬가 트이는 격이었다.

세준의 눈이 무섭게 두 남자를 향해 고정되었다.

무함마드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다가 나직이 말했다.


“케이원이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요.”

“네. 아마도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진짜 고수는 아직 미개척된 땅을 찾아 나서는 법 아닙니까?”

아서가 살짝 도발하듯 내뱉자, 자극받은 무함마드가 바로 말했다.


“아서 위원장께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곳이니,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한번 만나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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