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간병은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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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간병은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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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간병은 아무나 하나
2022.07.04.
현란한 비트 사운드가 심장을 쾅쾅 찍어대는 호텔 지하 클럽 안.
하린은 화려한 섬광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스테이지를 구경하던 그녀의 대학 동기 하나가 하린의 휴대폰을 높이 흔들어 보였다.
번쩍이는 불빛 사이로 그 광경을 본 하린의 눈매가 순간 일그러졌다.
벌써 여러 번째였다.
“대체 누군데 자꾸 전화질이야!”
오랜만에 찾은 자유를 방해하는 전화에 하린은 거친 숨을 씨근거리며 테이블로 돌아왔다.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던 그녀의 눈동자로 매서운 빛이 번졌다.
[노 실장님]
“노 실장? 노 실장이 나한테 부재중 전화를 다섯 통이나 남길 이유가 뭐가 있어!”
거절 버튼을 누르려던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하는 수 없는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집요하기로 유명한 노 실장이라면,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괴롭혀 올 게 분명했다.
자꾸 흐름이 끊기는 것보다 일찍이 전화를 받고 신경 끄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린은 곧장 휴대폰을 가지고 복도로 나갔다.
고막을 찌르는 현란한 사운드가 문틈을 비집고 순간순간 끼어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휴대폰 스피커로 노 실장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모님!
“무슨 일이죠?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쉴 새 없이 전화를 거시냐고요!”
그녀가 불편한 심기를 가득 담아 내뱉자, 잠시 침묵이 흐르다 이내 노 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하지만, 꼭 전해야 할 소식이 있었습니다.
“……꼭 전해야 할 소식이요?”
-네. 대표님께서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뭐요? 세준 씨가 왜 병원에……!”
하린의 목청이 제법 커지자, 지나가던 다른 인종의 남자들이 그녀를 힐끗 돌아봤다.
하린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노스 필리 지역에서 현지인에게 폭행당하셨습니다.
“뭐라고요?”
-뉴스에서는 아시안 혐오 범죄라고 나왔지만, 자세한 건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그럼 세준 씨 상태는요?”
-의식은 돌아오셨지만, 아직 거동이 불편하십니다.
“지금 있는 병원이 어디죠?”
하린은 급하게 클럽을 빠져나갔다.
***
허벅지 중간 위로 올라간 짧은 기장의 치마와 번쩍이는 스팽글이 촘촘하게 달린 슬림핏 원피스는 병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화려한 패션이었다.
“뭘 자꾸 쳐다보는 거야!”
하린은 저에게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애써 외면한 채 병원 복도를 걸어갔다.
세준의 소식에 놀랐던 가슴이 조금 진정되자, 괜한 분노가 솟구쳤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박람회에서 강제 추방된 거로 모자라서, 바보처럼 두들겨 맞고 다녀?!’
그런 한심한 사람과 섣불리 동맹을 맺은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권도하를 무너뜨릴 거라더니, 왜 자기가 더…….’
원망 어린 생각을 이어가던 하린의 눈에 병실 복도 앞에 나와 있는 노 실장이 보였다.
또각또각.
그녀가 다가가자 노 실장은 화려한 스팽글 장식이 눈부신 듯 순간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떴다. 그리고 말했다.
“오셨습니까, 사모님.”
“여긴가요, 세준 씨 병실이?”
하린이 고갯짓으로 병실을 가리키자 노 실장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하린과 세준이 무늬만 약혼자일 뿐, 서로 애틋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노 실장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옷차림이나 표정은 쇼윈도 연인의 자격도 없을 만큼 무성의했다.
노 실장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는 하린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며 생각했다.
하린이 1인실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을 향해 로봇처럼 누워 있는 세준이 보였다.
그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간 하린의 세준의 얼굴을 보곤 경악했다.
“……세, 세준 씨! 얼굴이 이, 이게 뭐야!”
예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한 몰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노 실장이 그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병실을 잘못 찾은 줄 알고 뛰쳐나가고도 남을만한 상황이었다.
이목구비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붓고 일그러진 모습에 하린의 안면도 함께 구겨졌다.
잠시 충격을 받은 듯 벙쪄 있던 그녀가 어느 순간 코를 킁킁거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세준을 가만히 관찰하던 그녀의 눈에 얼굴과 목 곳곳에 굳은 핏자국과 땀자국이 보였다.
한마디로 피와 땀에 전 냄새가 그의 주변에서 진동했다.
그녀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세준은 무거운 팔을 힘겹게 들어 그녀 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나직이 불렀다.
“……미, 민……하……린.”
사람이 보이기나 할까 싶은 정도로 퉁퉁 부어 작아진 눈 사이로 흐릿한 눈동자가 보였다.
하린은 한걸음 물러선 곳에서 대답했다.
“어, 어 그래. 세준 씨. 나 왔어.”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는지 저를 알아보고 손을 잡으려 내미는 모습을 보자, 날이 선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하린의 눈빛은 다시금 사늘해졌다.
“무울, 네 뒤에 있는 물…… 좀…… 줘.”
다시 보니 상처가 난 그의 손이 가리키는 건, 그녀가 아닌 협탁 위에 놓인 물이었다.
하린은 김샌 표정으로 허공을 쏘아보며 말했다.
“아, 물.”
그러곤 거친 손놀림으로 물을 종이컵에 따라 그의 앞으로 가져갔다.
생각 없이 그의 입가로 컵을 가져가 먹여주려는데, 그는 몸을 일으킬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상태였다.
대충 입에 닿는 종이컵 부분을 뾰족하게 만들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지만, 고개 각도가 맞지 않는지 한 모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린은 세준을 재촉하며 말했다.
“물 마시고 싶다며, 세준 씨가 좀 빨아당겨 봐.”
“……끙.”
한번 시도해본 세준이 엷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스, 스트로.”
“스트로? 빨대?”
그의 말에 주변을 휙 둘러보던 하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빨대가 여기 어디 있어. 그냥 마셔. 자, 다시 해봐.”
그러곤 종이컵이 입술에 닿는 부위를 좀 더 뾰족하게 접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자, 얼른 마셔 봐.”
그녀의 말대로 해 보던 세준은 이번에도 쉽지 않자,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닿아 있던 종이컵이 매가리 없이 옆으로 떨어지며, 하린의 얼굴로 물방울이 후두둑 튀었다.
“아악! 세준 씨!”
길게 붙인 인조 속눈썹이 물에 젖어 축축하게 눌어붙자, 하린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환자라고 나한테 유세 떠는 거야?”
“……끙.”
“아픈 게 뭐 벼슬이라고!”
잠시 잊고 있던 기억하기 싫은 악몽이 하린의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양손 가득 커피를 사 들고 CTM 부스를 찾았을 때, 강제 철거로 성난 세준이 그녀의 팔을 거세게 걷어내 커피가 제 옷으로 몽땅 쏟아졌던 기억.
지안이 적선하듯 건넨 스카프를 거지처럼 주워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던 일이 떠오르자 다시금 부아가 치밀었다.
“후우!”
아픈 데 없이 멀쩡했던 시절의 세준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피 냄새에 절어 미동도 못 하는 그의 곁을 지키는 건, 도저히 못 할 짓이었다.
하린은 침대 위에 떨어진 종이컵을 집어 세준의 피투성이가 된 손에 탁 올려두고 말했다.
“물은 직접 떠다가 드세요! 지세준 대표님!”
병실에 들어선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하린은 매몰차게 그곳을 떠났다.
“……미, 민……하……린.”
이번에는 정확히 하린을 향해 뻗은 세준의 손이 허공에 붕 떠 있다가 그대로 매가리 없이 툭 떨어졌다.
***
은은한 시폰 커튼 사이로 필라델피아의 아침 해가 드리우고 있었다.
도하는 단잠에서 깬 듯 기분 좋은 표정으로 스르르 눈을 떴다.
동이 트기 직전에 잠들었으니, 겨우 두세 시간쯤 눈을 붙였을 텐데 더 오래, 더 깊이 잔 듯 몸이 개운했다.
살짝 돌린 시선 끝에 지안의 희고 고운 살결이 보였다.
길었던 지난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제 옆에 아이처럼 잠든 얼굴을 보자, 가슴 깊은 곳에 햇살이 비친 듯 따스했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 위로 내리쬔 한줄기 볕을 발견하곤 분주히 손을 들어 올렸다.
도하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 위를 양산 씌우듯 살포시 가려주었다. 조막만 한 얼굴이라 한 손만으로도 충분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햇빛이 따가운 듯 힘이 들어가 있던 그녀의 눈가 근육이 느슨하게 풀리며 편안해지는 게 보였다.
포근한 그늘에 잠든 지안의 얼굴을 보느라, 도하는 양산을 자처한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새근새근.
하다못해 잠든 숨소리마저 이토록 예쁠 수 있다니.
밤새 온몸이 부서지도록 안고도, 다시 눈 뜨자마자 남자의 진한 욕망이 고개를 들어 꿈틀거렸다.
그녀가 안다면, 더는 저를 환자로 보지 않을 테지. 아닌가. 더 큰 문제가 생긴 중환자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솟구치는 뜨거운 마음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다.
참다못한 도하는 지안의 이마로 살포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딴에는 최대한 부드럽게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뜨겁게 달궈진 입술이, 더운 숨결이 그녀를 그만 깨우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동그란 이마에 닿는 순간, 지안은 찡긋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그러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라며 소리쳤다.
“엄마야!”
“……!”
도하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굳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이불로 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지안도 힐끗 협탁 위를 돌아봤다.
도하는 가만히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시 액정 화면을 확인하던 그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리고 말했다.
“……할머니께서 영상통화를 거셨는데?”
영상통화라는 말에 지안은 잠시 벙쪄 있다가, 황급하게 말했다.
“……얼른 옷 입어요! 도하 씨!”
지안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도하는 그녀의 반대쪽으로 돌아선 채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곤 숨을 돌리지도 못한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