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조작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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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조작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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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조작된 첫사랑
2022.07.08.
손바닥만 한 휴대폰 화면에 정순의 인자한 얼굴이 담겨 나왔다.
정순의 화면에는 아직 두 사람의 얼굴이 뜨지 않았는지, 정순은 휴대폰 화면을 거울삼아 제 얼굴을 점검하고 있었다.
뭉게구름처럼 볼륨을 넣은 머리칼을 만지는 주름진 손길이 모처럼 들떠 보였다.
도하와 지안은 씩 미소를 머금은 채 정순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먼 곳에 있는 손주 내외를 좀 더 자세히 보려는 듯, 돋보기안경까지 찾아 쓰는 정순의 모습에 도하가 불쑥 던졌다.
“할머니,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아이코, 깜짝이야! 너희 언제 나온 거니? 나 다 보고 있었던 거야?
“그야 당연히…….”
도하가 곧이곧대로 말하려 하자 지안이 끼어들어 대신 말했다.
“아뇨. 할머님, 지금 막 연결됐어요!”
천연덕스럽게 선의의 거짓말을 던지는 지안을 보며 도하는 픽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세상에서 제일 곱고 참한 우리 손주며느리 아니야!”
오랜만에 듣는 정순의 목소리에 지안은 왠지 모를 위안을 느꼈다.
낯선 나라에 와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 틈에 있다 보니, 정순의 구수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지안은 아련하고 애틋한 마음을 눈빛에 담아 말했다.
“할머님,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이 할미도 우리 지안이 많이 보고 싶었어. 어떻게 된 게 80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가버렸는데, 너희 출장 간 열흘은 이리도 더디게 가는지.”
정순이 푸념 아닌 푸념을 뱉자 지안은 씩 웃으며 말했다.
“사흘만 꾹 참고 계세요. 제가 가면 안마도 해드리고, 네일도 예쁘게 다시 해드릴게요.”
“……그래. 지안아, 할미 잘 참고 있을게.”
화면을 보며 싱긋 웃던 정순의 눈이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곤 번뜩 반짝였다.
정순이 무의식적으로 카메라 가까이에 고개를 들이미는 게 보였다.
뭔가를 자세히 보려는 듯 다가온 탓에 도하의 휴대폰에는 그녀의 주름진 이마 부분만이 화면을 가득 채워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
도하가 나직이 부르자, 정순은 화면에서 천천히 고개를 물리며 말했다.
“어, 어 그래.”
“……뭘 그렇게 보세요?”
손자의 물음에 정순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 너희 둘 다 그새 많이 핼쑥해진 것 같아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도하와 지안은 화면 속 저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순의 말마따나 턱선이 또렷이 살아나고, 볼도 쏙 들어가 보였다.
어젯밤 욕실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나온 얼굴과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이 벙찐 듯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자, 정순이 걱정스럽게 뱉었다.
“현지 음식이 입에 안 맞니? 아니면 박람회 일이 너무 힘든 건 아니고? 특히 도하 너 말이야. 얼굴이 어쩜 그리 퀭한 거야! 꼭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네?”
도하가 놀란 듯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며칠 밤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난밤은 꼬박 새운 게 맞았다.
매의 눈보다 날카로운 정순의 지적에 도하와 지안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바짝 얼어 있었다.
“……!”
정순의 화면에도 당황한 두 사람의 얼굴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못 하고 굳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무언가 확신이 생긴 정순이 조심스럽게 뱉었다.
“너희…… 혹시……!”
정순이 말끝을 흐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자, 도하의 목젖이 순간 쿨렁거렸다.
지안은 당황한 듯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생각했다.
지난밤 도하와 나눈 뜨겁고 진득했던 육체의 교류. 그 후덥지근하고 숨 막히는 순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게 없다던데.
비로소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걸, 두 사람이 함께 보낸 많은 밤들 중, 어젯밤만은 평소와 완전히 다른 빛깔의 밤이었다는 걸 혹시 눈치챈 것은 아닐까.
설마……,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을까.
초조해진 그녀의 귓가로 미친 듯 빨라진 심장 박동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때 정순이 툭 뱉었다.
“혹시 말이다…… 너희…… 싸웠니?”
“……!”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완전히 어긋난 오답.
졸였던 가슴이 맥없이 풀리면서 허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안은 애써 표정을 밝게 만들어 말했다.
“싸우다뇨! 저희 안 싸웠어요. 싸울 시간도 없이 바빴는걸요.”
지안의 해명에 정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난 너희가 서로 눈도 쳐다보지 않고 딱딱하게 있길래. 혹시 싸웠나 했지.”
도하가 쐐기를 박듯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말대로 싸울 시간도 없었어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보다 더 생산적인 활동에 써야지요.”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말을 힘주어 뱉은 도하가 비릿하게 씩 웃자, 지안은 화들짝 놀라 그를 휙 쏘아보곤 아무 일도 없는 척 허공을 응시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두 사람의 모습을 생중계로 보고 있던 정순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
……생산적인 활동?
도하의 의미심장한 말이 정순의 예리한 촉을 자극했다.
다시 들여다본 두 사람의 얼굴에 왠지 모를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싸운 게 아닌가 생각했던 건, 전에 없던 낯선 기운을 오해해서였다.
분명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다.
서로 시선을 피하고 있지만, 왠지 촉촉한 눈동자와 연신 입술을 다시는 초조한 입술이 둘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심증뿐이던 정순의 시야로 곧 물증이 포착되었다.
정순은 다시금 휴대폰 화면 앞으로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주름이 앉은 콧잔등과 가늘게 뜬 정순의 눈이 도하의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정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화면에서 멀어졌다.
정순은 화면 속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이랑 날씨도 차이가 크니까, 옷도 잘 챙겨입고.”
평범한 안부 인사 같았지만, 그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정순은 의미심장한 빛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화면 속 어딘가를 유심히 봤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지안과 도하의 상의였다.
옷 안쪽 봉제선과 상표가 드러난 부분이 밖으로 오게 뒤집어 입은 도하의 웃옷.
그리고 첫 단추부터 잘못 잠가 옷 밑단이 삐딱하게 올라간 지안의 잠옷 윗도리.
평소 빈틈없는 두 사람을 생각하면, 옷을 저 모양으로 입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딱 하나의 경우만 빼고.
영상통화를 종료한 정순은 씩 웃으며 허공에 나직이 뱉었다.
“그래, 젊은 사람들이 생산적인 활동에 부단히 힘써야지!”
***
점심시간이 막 지난 오후, 하린은 홀로 워싱턴 스퀘어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호텔에 박혀 있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고, 세준이 있는 병원에 가자니 생각만으로도 어제 맡은 피 냄새가 떠올라 속이 역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공원을 걷던 그녀는 분수대 앞에서 가만히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오니 옛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원 안 분수대 앞은 도하와의 인연이 처음 시작된 장소였다.
절친 세준의 손에 이끌려 한인 유학생 모임에 나온 도하는 말수가 적고 도도한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분위기 하나로 모든 이들을 단박에 제압했고, 가끔씩 내뱉는 차가운 한마디가 이지적이면서도 스마트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었다.
완벽한 외모는 물론이고, 나중에 알게 된 재벌 3세라는 탄탄한 배경까지.
모든 걸 걸어서라도 쟁취하고 싶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틈을 주지 않아서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었다.
그렇게 수개월을 도하의 주변만 맴돌며 흘려보내던 어느 날, 하린은 기가 막힌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그 시절, 도하는 수년간 준비해온 논문의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다. 그래서 유학생 모임에 올 때도, 가방에 노트북과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많은 서류 꾸러미를 꼭 챙겨 왔었다.
그에게 그 논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기에 하린은 말도 안 되는 계획을 꾸며낼 수 있었다.
남학생들이 농구를 하러 나간 사이, 하린은 사촌 동생을 시켜 도하의 로커룸을 털게 했다.
그리고 우연히 자신이 그 현장을 지나가다 목격하고 강도를 쫓아가 가방을 끝까지 사수한 것으로 시나리오를 꾸몄다.
모든 것은 현장에 있던 CCTV에 생생하게 담기고 있었다.
뜨거운 감동을 위해 사촌 동생에게 칼로 제 손을 살짝 찌르라고도 시켰다.
따끔을 넘어,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아찔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잠깐의 고통으로 도하를 얻을 수 있다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통증을 떠올리던 하린의 이마가 한껏 구겨졌다.
스물. 무엇도 두렵지 않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 세상 경험이 쌓인 지금은 엄두도 내지 못할 광기였다.
로커룸 앞에서 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하린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눈에 발견되었다.
소식을 들은 도하도 급하게 그곳으로 뛰어왔다.
피 묻은 손으로 도하의 가방을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순정 그 자체였다.
‘너 미쳤어? 그깟 가방 하나 때문에 강도한테 덤비는 게 말이 되냐고!’
도하는 예상대로 버럭 화를 냈고, 하린은 미리 짜둔 각본대로 힘겹게 내뱉었다.
‘도하 씨한테 소중한 거잖아.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책임감 있는 그는 하린이 치료받으러 병원에 갈 때마다 동행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둘 사이에는 벽이 존재했고, 하린은 그 벽을 부수기 위해 또다시 거짓말을 해야 했다.
‘치료가 끝나도 오른손을 전처럼 쓰긴 힘들 거래. 그럼 난 이제 옷을 만들 수 없을지도 몰라.’
패션 디자인 스쿨에 다니는 학생이 손을 쓸 수 없다는 건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도하는 큰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린은 그런 그의 죄책감 사이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도하 씨, 그래도 난 그때 강도한테서 도하 씨 가방 지킨 일, 후회하지 않아.’
그 말을 듣고 흔들리던 도하의 눈빛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했다.
도하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끌어내 연인으로 발전시킨 관계였기에, 그에게서 특별한 애정 같은 건 당연히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권도하의 여자친구로 사는 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가 지옥 같은 사고를 겪지만 않았어도.
옛 추억에 잠겼던 하린은 잠시 머물렀던 벤치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정면을 응시한 순간 저만치 앞에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