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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내게 자유를 준 사람 (64/110)


64화. 내게 자유를 준 사람
2022.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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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훈이 쓰러져 응급실에 다녀온 일로 도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남은 기간만큼은 부스에 최소한의 인원만 남게 하고, 돌아가며 직원들이 쉴 수 있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무함마드의 투자 계약 유치로, 노크맨은 박람회에 참가한 소기의 목적을 벌써 다 이뤘다.

남은 사흘간은 좀 더 여유롭게 즐기며 낯선 땅에서의 자유를 만끽하길 바랐다.

그건 직원들은 물론이고, 지안에게도 바라는 부분이었다.

서지안 인생의 첫 외국 방문을 일만 하다가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필라델피아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식.

호텔에서 가벼운 브런치를 해결하고 나온 두 사람은 근처 워싱턴 스퀘어 파크로 갔다.

필라델피아가 처음인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고, 데려가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도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혼이 쏙 빠져나갈 듯 격정적이었던 지난 밤의 여파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필라델피아에 온 이상, 다른 건 몰라도 ‘자유의 종’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

호텔에선 내내 멍하던 그녀의 눈동자도, 공원에 들어서자 활력을 되찾은 듯 차츰 빛이 감돌았다.

도하는 오랜만에 찾은 공원 안을 둘레둘레 둘러보았다.

따스한 햇볕 아래 초록의 싱그러운 나무와 잔디, 공원 곳곳에 보이는 유서 깊은 역사적 기념물들.

벤치 위에서 휴식 중인 현지인들의 평온한 얼굴과 나무 위를 돌아다니는 청설모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보고 있는 사람까지 평화롭게 만들었다.

저만치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길거리 악사의 연주 소리에 도하와 지안은 잠시 서로의 눈을 고즈넉이 바라봤다.

한국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낭만적인 분위기에 두 얼굴 위로 발그레한 생기가 피어올랐다.

공원을 조금 거닐다가 도하는 어딘가로 지안을 데려갔다.

우아하면서도 절제미가 느껴지는 어느 건축물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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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인디펜던스홀, 그러니까 미국 독립기념관이야.”

그의 설명에 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지나치듯 본 기억이 떠올랐다.

숭고한 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기념관 안은 경건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리고 바로 옆 건물로 걸음을 옮겨, 말로만 듣던 ‘자유의 종’을 만났다.

도하는 특유의 차분하고 지적인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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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선언이 공표됐을 때, 타종한 종이라는 건 들어봤을 거야.”

지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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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에 성경 구절 하나가 새겨져 주조됐대. 땅 위의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공표하라, 라는 구절이.”

그의 단단한 눈동자가 총명하게 빛났다.

지안은 종보다 더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자유의 종에 대해 그리고 미국의 독립과 노예제 폐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왠지 모를 설렘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아는 지식을 뽐내거나 과시하는 게 아닌, 마음을 다해 알려주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작은 손짓, 목소리, 눈빛을 신경 쓰느라 정작 역사적인 내용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충분히 가득 찼다.

그때 도하가 무거운 역사 이야기 대신 뜻밖의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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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유학할 때, 자유의 종은 셀 수 없이 많이 봤는데……, 오늘은 나한테 자유를 선물해준 사람이랑 보니까 느낌이 조금 새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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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선물해준 사람…….

지안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높이 들어 올렸다.

도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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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잖아. 3년간 내가 얼마나 답답한 곳에 갇혀 지냈는지. 내 의지로 내 몸 하나 컨트롤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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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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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덕분에 이렇게 자유로워졌다는 것도.”

그 말을 하며 도하는 손을 뻗어 그녀의 희고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뜻밖의 스킨십에 놀란 지안이 뻣뻣하게 경직되자, 도하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씩 미소를 머금은 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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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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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요?”

도하는 단단히 깍지 낀 두 손을 눈으로 쓱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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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종 앞에서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둘은 영원히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없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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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지안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자, 도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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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서로의 옆에만 있어야 한다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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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안이 고개를 숙여 맞잡은 두 손을 심각하게 바라보자, 도하가 입안에 감추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며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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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야.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어. 그저 내 바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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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예요. 놀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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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놀라? 설마 벌써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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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고. 사람 인생이라는 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데.”

지안이 인생을 여러 번 살아본 사람처럼 말하려 하자, 도하가 그녀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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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니, 더 단단히 서로를 붙잡고 있어야지.”

순식간에 웃음기를 싹 거둬낸 그가 진지한 눈을 반짝이며, 맞잡은 두 손을 잠시 들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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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금처럼 꼭. 그게 죽음 문턱까지 다녀와 본 내 깨달음이야.”

자유의 종 앞에서 훅 들어온 영원한 구속의 고백.

아이러니한 고백 앞에서 가슴이 속절없이 떨렸다. 지안의 두 뺨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순간 세상 어디에도 없을 영롱한 종소리가, 환청처럼 지안의 귓가와 심장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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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린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도하를 알아볼 수 있었다.

길가에 치일 듯 흔한 비율이 아니기도 했고, 오래전 그의 곁을 맴돌 때, 멀리서도 그를 알아보는 법을 터득했기에, 몸에 밴 습관이 툭 튀어나왔다.

도하를 발견하고 순간 번쩍였던 눈동자가 그 옆에 있는 작은 여자를 보곤 이내 흔들렸다.

마침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방향은 하린이 서 있는 쪽이었다.

실루엣에 불과하던 두 사람이 점점 더 가까워져 오자, 비로소 다정하게 맞잡은 두 손이 보였다.

이제 막 시작한 연인 특유의 어색한 손의 각도와 둘 사이에서 풍겨오는 간지러운 분위기.

눈앞의 광경에 하린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오래전 그녀가 도하의 연인이었던 시절, 둘 사이에는 남녀 간의 어떤 스킨십도 없었다.

도하는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의리와 책임을 다하려는 듯 그녀를 대했다. 어떨 때는 책임감뿐인 로봇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참다못한 하린이 알코올의 힘을 빌려 그에게 들이댔을 때도, 그는 바위처럼 꿈적 않고 그녀를 떨쳐냈다.

여자로서 자존감이 상할 대로 상한 하린은 문제의 원인을 도하에게서 찾았다.

모든 게 완벽한 남자이지만 딱 하나, 성적으로 치명적인 하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도하의 얼굴에선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기운이 가득했다.

지안을 향해 고정된 그의 눈빛에선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짙은 열망, 흥분 같은 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젊고 건강한 남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뿜어내는 눈빛 그 자체였다.

제 것을 움켜쥐듯, 여자의 손을 와락 잡아챈 손길 또한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자라기엔 짐승처럼 강인해 보였다.

하린이 잠시 벙쪄 있던 그때, 걸어오던 도하가 그녀를 알아보곤 잠시 눈살을 구겼다.

지안도 하린을 알아보고 조금 놀란 듯 시선을 고정했다.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을 지나치듯 하린의 옆을 유유히 지나갔다.

그가 저를 모른 체 하자, 하린은 서운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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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도하의 보폭이 순간 좁아지는 게 보였다.

그가 천천히 돌아서자, 하린은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잠시 물었다 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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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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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랑 할 이야기 없어. 가던 길, 그냥 가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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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아니 5분이면 돼. 도하 씨 제발.”

하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지만, 도하는 여전히 누그러짐 없는 눈빛으로 무시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지안이 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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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공원 좀 둘러보고 있을게요. 이야기 나누고 와요.”

지안이 의외의 소릴 하자, 도하가 놀란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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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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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또 마주쳤을 때, 민하린 씨가 지금처럼 당신 이름 부르며 글썽일 일 없게, 잘 정리하라고 주는 시간이에요. 딱 5분. 넘으면 삐질지도 몰라요.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이니까.”

단호하면서도 일리 있는 그녀의 생각에 도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거기에 덧붙인 삐질지도 모른다는 질투 섞인 애교. 그 말을 듣고 입꼬리가 휘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반칙이다.

둘만의 산책에 느닷없이 불청객이 나타난 건 최악이었지만, 그 덕에 지안의 질투를 보게 되었으니 불쾌한 기분이 조금은 상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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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러라면 그래야지. 내게 자유를 준 분의 분부인데.”

도하가 너스레를 떨자 지안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은 추억이 깃든 중앙분수대 앞으로 도하를 이끌었다.

그리고 애원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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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도하 씨 사고로 의식 없을 때, 나 혼자 도망친 거, 세준 씨 만난 거 정말 미안해. 시간을 돌리고 싶을 만큼 정말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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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분히 예상한 레퍼토리였지만, 직접 들으니 숨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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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 봐. 도하 씨. 내가 도하 씨를 위해서 어떻게까지 했었는지, 도하 씨, 잘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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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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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꿈도, 목숨도 전혀 아깝지 않았어. 강도가 눈앞에 칼을 들이밀어도 도하 씨를 생각하면 하나도 두렵지 않았었다고. 그때 일, 그때 내 마음 다 잊었어? 그런 거야?”

하린이 ‘강도’라는 말을 뱉는 순간, 도하는 순간 각성한 듯 눈을 번쩍 떴다.

3년 전 사고를 당하기 직전, 그가 하린에게 이별을 고하기로 결심했던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떠올랐다.

신사업 준비로 바쁜 도하의 앞에 나타난 20대 중반의 재미교포, 제이슨.

자신을 하린의 사촌 동생이라 밝힌 남자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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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이 누나가 연락을 끊어서, 예비 매형을 찾아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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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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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약속을 안 지키니까,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잖아요. 준다던 돈도 안 주고, 매형 회사에 취직시켜준다는 약속이랑 차를 뽑아준다던 약속도. 뭐 하나 지킨 게 없단 말이죠! 난 그때 정말 내 인생을 걸고 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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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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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커룸 강도 사건. 그거 내가 한 건데. 모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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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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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한 번만 도와달라고 애원해서 했어요. 우리끼리 짜고 전부.’

제이슨은 하린이 꾸민 그날의 사고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오른손을 쓸 수 없다던 하린의 병원 진단서가 조작되었다던 추가 고백을 들은 도하는 온종일 치를 떨었다.

긴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이후 그만 잊고 있었던, 그리하여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기억이 수면 위로 완전히 떠 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도하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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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이라고 했던가. 그래, 네 사촌 동생은 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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