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찾았다, 내 남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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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찾았다, 내 남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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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찾았다, 내 남은 한 조각
2022.07.15.
“제, 제이슨을 도하 씨가 어떻게…….”
하린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갈라져 흘러나왔다.
도하는 살얼음이 낀 듯 차가운 눈동자로 하린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3년 전에 나를 찾아왔었어. 누나가 자기랑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연락까지 끊었다면서.”
“……!”
하린의 텅 빈 눈동자가 숨을 곳을 찾듯 요동치는 게 보였다. 그러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 애 말을 믿는 건 아니지? 걔, 어렸을 때부터 문제가 많던 녀석이야. 소년원을 제집 드나들듯 다니고, 보호관찰 대상자로…….”
도하가 날 선 칼처럼 매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그런 파렴치한 자작극의 공범으로 삼기 딱이었겠지.”
“……!”
도하의 기에 눌린 하린은 변명을 하려는 듯 입술을 뻐끔대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게 닫았다.
“제이슨 얘길 듣고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아?”
도하의 말에 하린은 한껏 억눌린 눈동자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
“분노와 배신감은 잠깐이었고, 가슴에 얹혀 있던 무거운 뭔가가 싹 내려가는 기분. 안도감이 들었어.”
“……!”
“더 이상 죄책감과 의무감 때문에 널 곁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촌철살인 격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도하 씨. 내가 다 잘못했어.”
하린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빌었다. 도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내 잘못이야.”
“…….”
“진작 널 깨끗이 정리하는 건데. 그랬어야 했는데.”
“……도하 씨!”
“무시하거나 외면할 게 아니라. 진작 이렇게 얼굴을 보고 확실히 말해줬어야 했어.”
“……왜 그래, 도하 씨. 무섭게.”
“단 한순간도 민하린 너를 여자로 느껴본 적 없어.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
“…….”
“여자 아니, 사람으로도 느껴지지 않아. 그러니까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평소에도 차갑고 매몰찬 남자였지만, 지금의 도하는 제 안의 서늘하고 냉한 기운을 모두 모아 쏟아내는 듯했다.
하린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도하 씨, 내가 이렇게 빌잖아. 잘못했다고 그러잖아. 아무리 내가 싫어도 나타나지도 말라는 건 너무해.”
그녀의 울먹임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이어받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이제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서.”
“……!”
“내 전부를 알 수 있는 곳에 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내 오점 같은 너를 보고, 알고, 느끼게 할 수 없어.”
“…….”
“그 사람한텐 내 안의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주고 싶으니까.”
“……도하 씨!”
“그러니까 당장 사라져. 내 인생의 오점, 민하린.”
“…….”
“한국 들어가는 대로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할 거야.”
“……무, 뭐?”
“다신 마주치지 말자. 마지막 부탁이야.”
도하는 그 말을 끝으로 바람처럼 쌩 돌아섰다.
눈물로 얼룩진 하린의 시야에 멀어지는 도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하린은 오기와 분함이 뒤엉킨 얼굴로 끅끅 울먹이며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도하 씨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
4분 55초, 56초, 57초…….
시계를 보던 지안의 앞으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다가와 멈추어 섰다.
“아직 5분 안 됐지?”
도하가 허리를 폴더처럼 접어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확히 딱 맞춰 왔어요.”
지안이 놀란 듯 말하자, 도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누가 내린 분부인데.”
얼마나 번개처럼 뛰어왔는지, 위로 정갈하게 넘겨 올렸던 헤어 스타일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이마를 조금 가리고 있었다.
지안의 눈에는 그 모습마저 소년처럼 사랑스러워 보였다.
말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녀는 도하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선을 옮겼다.
도하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시 잠들어 줄까?”
“……네?”
“그럼 당신, 지금처럼 놀라지 않고 마음껏 나 훔쳐볼 수 있을 거 아냐.”
“훔쳐보긴 누가 훔쳐봤다고 그래요!”
지안이 발끈하자 도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놀리듯 말했다.
“화내는 거 봐, 수상하잖아.”
“수상하긴 뭐가 수상하다고 그래요. 그리고……!”
지안이 무슨 까닭인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다신 그런 말 하지 마요.”
“……?”
“다시 잠들다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요! 농담이라도 절대, 절대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요.”
“……서지안.”
“아까 자유의 종 앞에서 그랬죠. 도하 씨 3년 동안 자유를 잃고 답답한 육체 안에 갇혀 있었다고.”
“……응.”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알아요?”
“…….”
농담처럼 뱉은 한마디에 지안이 눈가가 붉어지자, 도하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 난 그저.”
할 말이 많은 지안이 다시 말을 빼앗아 왔다.
“그땐 도하 씨를 몰랐으니까, 3년이나 버틴 거예요. 도하 씨한테 듣고 싶은 말도, 보고 싶은 눈빛도, 그리워질 추억도 없으니까 버틸 수 있었던 거라고요. 근데 만약 지금 또다시 그렇게 되면…… 난, 난 자신 없어요.”
“……서지안.”
도하가 팔을 뻗어 지안의 손을 꾹 잡았다.
지안은 그의 손을 쿡 때리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차라리, 아까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
“……아까 그거?”
“자유의 종 앞에서 손을 잡으면, 영원히 함께하게 된다던 거짓말요.”
“……!”
“그럼 어디도 마음대로 못 갈 테니까. 멋대로 잠들어 버리지도 않을 테니까.”
지안의 투정 아닌 투정을 들으며, 도하는 마음으로 속삭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
그의 심장은 이미 그녀의 앞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구속 상태였다.
그녀가 뱉는 별거 아닌 한마디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쪼그라들었다가, 또 다른 한마디에 세상을 다 안을 듯 한껏 커지는 가슴.
도하는 그 넓은 가슴으로 다가가 지안을 꼭 안아주었다.
도하의 품에 안긴 지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따스한 햇볕과 이국적인 풍경으로 가득 찬 공원 그리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남자.
건강하게 뛰고 있는 심장박동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며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도 지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간이 멈춘 듯 한동안 그렇게 머물러 있던 도하가 그녀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몸은 좀 어때, 더 돌아다녀도 괜찮겠어?”
“그럼요.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
활기를 띤 그녀의 대답이 도하의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곳을, 다음 투어 코스를 떠올리는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민 끝에 도하가 선택한 다음 투어 장소는 매직 가든이었다.
도시와 길거리 곳곳이 살아 있는 미술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필라델피아에서도 매직 가든은 가장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었다.
가는 길목마다 거대한 벽화가 시선을 붙잡는 곳.
크기부터 그림의 완성도까지 이전에 봤던 벽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3층짜리 건물 벽면 전체에 그려진 완성도 높은 그림 앞에서 지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술관에 걸려 있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그림이 길거리에, 그것도 평범한 건물 벽면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지안이 감탄하며 멈춰 서 있자, 도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이 감격스러운 듯 멍하니 바라봤다.
벽화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걸음이 매직 가든에 다다랐다.
유명한 모자이크 아티스트가 버려진 유리나 타일 조각을 활용해 만든 공간은 오색찬란한 색감과 눈부신 반짝임으로 극강의 화려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와, 이런 공간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그녀가 뱉는 감탄사 한마디 한마디가 도하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자신을 쉽게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뜻밖의 예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들뜨고, 쉽게 흥분하고, 또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색상도 모양도 다른 조각들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모자이크 세상. 그야말로 매직이었다.
미로 같은 모자이크 공간 속을 아이처럼 누비는 지안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가혹한 아픔과 풍파 속에서 조각나버렸던 제 심장의, 잃어버린 한 조각을 비로소 찾게 된 것 같다고.
색깔도 모양도 완전히 다르지만, 그 한 조각이 제 안에 들어와 그야말로 기적이 되었다고.
감상에 젖은 그의 귓가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 씨 뭐해요? 빨리 이리 와봐요.”
“어. 지금 가.”
거미줄이 쳐진 듯 층고가 낮은 천장 위도 모자이크로 가득 찬 공간.
지안은 처음 경험하는 낯선 아름다움에 마음을 전부 뺏긴 표정이었다.
그 얼굴이 여태껏 본 그 어떤 모습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도하는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오래전, 지안의 첫 출근 준비를 위해 백화점에 동행했던 날.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사진 찍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아름다움을 작은 사진 속에 담아 간직한다는 게,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하고 일인지.
도하는 잽싸게 휴대폰을 꺼내,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그의 손가락도 바삐 움직였다.
전문 작가는 아니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경이로움과 진심 어린 미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도하가 있는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선 순간, 갤러리 안에 있는 무수한 것 중, 가장 반짝이고 아름다운 보석 하나가 도하의 휴대폰 렌즈에 담겼다.
도하는 지체하지 않고 힘껏 촬영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당황한 지안이 눈썹 사이를 좁히며 말했다.
“도하 씨, 그렇게 마음대로 찍으면 어떡해요!”
그녀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도하는 조금 전 찍은 지안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예쁘잖아.”
필터 없는 남자의 직언에 지안은 두 뺨을 붉히다가, 혼자만 당한 게 조금 분하다는 듯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복수심이 다분한 손놀림으로 도하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인정사정없이 연속촬영을 누르자, 도하가 그만하라며 한달음에 그녀 앞으로 달려왔다.
지안은 그를 피해 저만치 멀리 달아나면서도 끝내 촬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도하도 다시 휴대폰을 들어 맞대응했다. 마치 물총 싸움을 하는 아이들처럼 서로를 필사적으로 찍어대는 둘의 모습이 모자이크 유리 조각 안에 조각조각 담겼다.
이곳이 서울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유치한 장난.
낯선 나라, 낭만이 있는 여행지이기에 가능한 천진난만한 사랑싸움(?)이었다.
그때 두 사람 옆을 지나던 중절모의 중년 신사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그러지들 말고, 두 분이 같이 서세요. 내가 찍어드릴 테니까.”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도하의 얼굴로 순간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도하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남자에게 제 휴대폰을 건넸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찍는 커플 사진.
도하는 지안의 손목을 잡아당겨 제 옆으로 바짝 오게끔 이끌었다.
“자, 그럼 찍습니다!”
오색찬란한 모자이크 풍경 속에서, 두 손을 꼭 잡은 채 하나의 조각이 된 두 사람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