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자고 가요! (66/110)


66화. 자고 가요!
202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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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돌아간 하린은 이를 바득 갈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늘 로봇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던 남자가 못 본 사이에 시인이 다 되어 있었다.

도하는 붉은 입술로 사랑 시를 쓰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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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한텐 내 안의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주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당장 사라져. 내 인생의 오점, 민하린.’

지겹도록 되살아나는 목소리에 하린은 귀를 틀어막고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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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인생의 오점? 내가 오점이라고?”

3년 동안 의식이 없었으니 그가 지안과 가까이 지내게 된 건, 불과 한두 달 정도밖에 안 된 일이었다.

그런데 아까 본 그의 눈빛은 천 년의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깊고 단단해 보였다.

전에 지안을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근거 없는 자신감과 당당함이 모두 도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단 생각을 하자, 가슴 속에 불덩이가 치솟는 것 같았다.

추억이 있는 도시에서 다시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건 모두 낭패였다.

추억이라고 여겼던 시간 속에 감춰져 있던 추악한 진실을 알아버린 그는, 지난 기억을 모조리 도려낸 듯 차가웠다.

그리고 새 종이 위에 새로운 추억을 그려가고 있었다.

하린은 무섭게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기 위해 잠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본능적으로 발견한 기사 헤드라인에 그녀의 눈이 희번뜩 매서운 빛을 띠며 커졌다.

[석유 재벌 겸 기업 투자가 무함마드, 韓 케이원 그룹 딜리버리 사업 전폭적인 투자지원 약속]

미국 필라델피아 현지에서 열린 국제 딜리버리 사업 박람회 투자 미팅에서 케이원 그룹 딜리버리 사업팀의 ‘노크맨’이 전문 투자가 무함마드와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무함마드는 ‘노크맨’의 사업 비전에 크게 공감하며, 수천억 원에 달하는 투자 계약은 물론, 10년간 장기적으로 후속 지원하겠다고 밝혀왔다.

박람회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지세준 대표의 CTM은 내부 사정으로 일찍이 박람회 일정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큰 규모의 투자 성공으로 힘찬 신호탄을 알린 케이원의 ‘노크맨’과 D그룹의 투자 철회로 성장에 제동이 걸린 CTM을 두고, 일각에선 케이원의 역전 가능성에 대해 입을 모으고 있다. 한국 딜리버리 업계에 어떤 이변이 일어날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기사를 빠르게 읽어내린 하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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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경이 될 때까지 지세준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고 손이 바들거렸다.

사랑은 물론, 사업까지 탄탄대로를 향해 가고 있는 도하를, 그리고 그 옆자리에 있을 지안을 생각하면 배알이 꼴렸다.

3년 전, 도하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누구보다 민첩하게 썩은 동아줄에서 내려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또다시 썩은 동아줄 위였다.

하린은 극도의 초조함에 연신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까맣게 잊고 있던 무언가가 번개처럼 떨어졌다.

***

해가 어스름 지기 시작할 무렵, 도하와 지안은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촌에 있는 아서 위원장의 집이 오늘 도하 투어의 마지막 코스였다.

손자를 구해준 지안에게 꼭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아서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안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집을 한눈에 담았다.

미국 영화에서 본 듯한 클래식하고 우아한 느낌의 2층 단독주택은 건물 전체가 크림빛이 도는 상아색으로, 지붕만 주황색으로 포인트를 준 디자인이었다.

밝고 화사한 느낌의 집은 그곳에 사는 노아의 미소만큼이나 상큼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실바람을 타고 전해져 온 고소한 바비큐 냄새에 잠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도하를 따라 도시의 명소를 둘러보느라 허기가 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대문 앞으로 다가간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쩔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 몇 개의 돌계단을 오르자, 초록의 정원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잔디밭 한가운데 펼쳐진 바비큐 파티장을 본 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얀 가운을 입은 전문 요리사들이 기다란 꼬챙이에 끼워 구운 고기와 각종 채소를 먹음직스럽게 자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비큐장 뒤, 상아색 하우스 입구에서 바쁘게 걸어 나오는 두 남자가 보였다.

손님맞이를 위해 격식 있는 옷을 입은 아서 위원장과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노아가 보였다.

아기자기한 아동용 정장에 귀여운 나비넥타이와 하얀색 반 스타킹을 신은 모습이 그야말로 꼬마 신사가 따로 없었다.

지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더니 완연한 엄마 미소가 완성되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온 아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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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두 분.”

도하가 고개를 엷게 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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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은요, 이런 멋진 저녁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옆에서 연신 눈치를 살피던 노아가 아서의 손을 슬쩍 빼더니, 지안의 품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지안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여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곤 노아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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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이제 아픈 거 다 나은 거야?”

지안이 한국말로 묻자, 옆에 있던 도하가 통역사보다 더 신속하게 영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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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나은 거냐고 누나가 물어본 거야.”

노아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튼튼함을 과시하듯 두 팔을 들어 뽀빠이 포즈를 했다.

지안은 아이의 기를 살려주려는 듯 과장된 표정으로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도하의 눈에는 그녀가 일곱 살 꼬마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로 보였다.

평소 누구보다 성숙하고 진지한 지안이 아이 앞에서 장난기 많은 소녀로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게 꽤 흥미롭기도 했다.

노아도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앞니가 빠져 우스꽝스러운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곤 지안의 손을 잡더니, 어딘가로 가자며 힘껏 당겼다.

지안이 눈썹을 높이 들어 올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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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려고.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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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정원 구경시켜 줄게요. 60년 된 나무 그네랑 물고기 사는 연못도요!”

쫑알대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지안은 저만치로 멀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아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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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 낯선 사람한테 저렇게 쉽게 정을 주는 녀석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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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런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도하의 말에 아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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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고픈 아이는 맞지만, 그 누구한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아 걱정이었다네. 하지만 지안 양만큼은 예외인 것 같군.”

지안은 정원 곳곳을 신나게 누비며 소개하는 노아를 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짠해졌다.

희미한 기억 속,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도 같았다.

그녀도 노아처럼 앞니가 빠져 우스꽝스럽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일 년 중 명절을 가장 많이 기다렸었다. 명절엔 유일한 친척인 고모가 할머니를 보러 집에 들르곤 했었다.

할머니의 사랑만으로 부족했는지, 어린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고모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고모의 손을 끌어당겨 동네 거리로 나갔다.

어린 마음에 ‘넌 엄마 없잖아’ 하고 놀리던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이렇게 손을 잡고 동네를 같이 활보할 수 있는 엄마가 있다고.

일 년에 한두 번뿐, 그마저도 고모가 암 투병을 하다 일찍이 세상을 떠나며 끝나버렸지만, 지안의 가슴속엔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행복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의 정이, 엄마의 품이 그리웠던 그 시절의 자신과 눈앞 노아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겹쳐져 보였다.

지안은 신이 나서 연못 속 물고기를 자랑하는 노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식사를 위해 지안과 노아를 찾으러 왔던 도하는 연못 앞에 있는 그녀를 보고 잠시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과 눈빛에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도하의 뒤를 따라왔던 아서가 같은 장면을 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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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양은 엄마가 될 준비가 다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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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도하가 눈을 크게 뜨고 아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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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네.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줄 준비가 다 된 느낌이야. 어른이 되었다고 다 그런 느낌이 나는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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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의 말을 곱씹던 도하의 입꼬리가 괜스레 주책없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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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대표야 당연히 좋은 아빠가 되어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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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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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도하는 노아와 놀아주는 지안의 모습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먼 미래가 스케치 되고 있었다.

배가 남산만큼 부풀어 정원을 거니는 지안의 해사한 미소.

부드러운 아기보 안, 아기의 말간 얼굴을 함께 들여다보는 부부의 모습.

아기가 ‘엄마’, ‘아빠’라고 처음 불러주는 날의 기적.

아직 걸음이 서툰 아이의 손을 한쪽씩 붙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

아이가 첫 자전거 타기를 시도할 때 뒤에서 단단히 붙잡아 주는 부부의 그림.

그렇게 아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늙어갈 미래.

상상만으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그림의 중심에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때 아서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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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라고. 저렇게 아이를 예뻐하는데, 자기 자식이면 얼마나 더 예뻐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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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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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 낳아서 키워야 고생을 덜 한다네. 내가 낳은 건 아니지만, 나처럼 나이 들어서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아서의 이마에 잡힌 깊은 주름이 그의 고충을 대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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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닮은 아기라면 정말 사랑스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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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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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분발해 보라고. 3년을 내리 푹 잤으니, 3배로 바쁘게 뛰어야지.”

그 말이 도하의 가슴에 쾅 박혀버렸다.

도하는 무슨 정신으로 식사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서의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아니면 마음을 다해 아이와 놀아주는 지안의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인지. 정확한 건 몰라도 몸이 내내 불끈했다.

불규칙하게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후끈거렸다.

도하가 식사 도중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홧홧한 기운을 몰아내려 하자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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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괜찮아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걱정하는 얼굴을 보자, 피가 전보다 더 뜨겁게 도는 기분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로 달려가야겠단 생각뿐이었다.

메인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 타임이 되자, 저만치서 누군가가 커다란 케익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무슨 케익이냐는 듯 지안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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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얘길 안 했는데, 사실 오늘이 우리 노아 생일이랍니다. 겸사겸사 파티하면 좋을 것 같아서.”

놀란 지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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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정말요? 이를 어쩌지. 선물도 못 준비했는데.”

아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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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무슨.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축하해 주는 게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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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잠깐 생각하던 지안이 서툰 영어로 노아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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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받고 싶은 생일 선물 있니?”

노아가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 그녀의 귓가로 바짝 다가와 조용조용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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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요? 같이 만화도 보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다가 여기서 자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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