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나도 재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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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나도 재워 줘
2022.07.22.
노아는 기다란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절실한 눈빛으로 지안을 보고 있었다.
지안이 명쾌한 답을 들려주지 않자 아이는 살짝 토라진 듯 작은 입술을 샐쭉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생일.
아이를 상심하게 할 순 없다는 생각에 지안은 고개를 돌려 도하에게 물었다.
“노아가 오늘 여기서 자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도하 씨 생각은 어때요?”
“뭐? 여, 여기서?”
도하의 눈썹 사이가 급격히 좁아 들었다.
“그게 노아가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이래요.”
“……!”
어른으로서 아이를, 그것도 생일을 맞은 아이를 실망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호텔로 돌아가 그녀와 함께할 밤에 대한 기대로 차올랐던 가슴이 쉽게 말을 듣지 않았다.
“전 상관없는데, 도하 씨는요?”
“…….”
본인은 상관없다는 그녀의 말이 도하의 귀에는 더없이 매정한 소리로 들렸다.
‘사람 가슴을, 심장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본인은 상관없다니!’
고민스러운 듯 그가 시선을 돌린 곳에 노아의 얼굴이 보였다.
한국어는 몰라도 눈치 빠른 아이는 지안이 그의 허락을 구하고 있다는 걸 벌써 알아차린 것 같았다.
노아는 금세 타깃을 바꿔, 조금 전 지안에게 보내던 간절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두 눈동자.
NO, 라고 말하면 당장에라도 눈물을 똑똑 떨어뜨릴 것 같은 위험한 눈빛이었다.
그 눈을 보자, 오늘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도하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아서가 끼어들었다.
“노아, 생일 선물은 이 할아버지가 사줄 테니 두 분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렴.”
아서의 말에 노아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사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 말을 툭 뱉은 아이는 테이블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지켜보던 지안이 눈언저리에 힘을 한껏 넣고 도하를 휙 쏘아봤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이렇게 핀잔을 놓는 것 같았다.
‘생일에 아이를 기어코 울려야겠어요? 자고 가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원망이 가득 실린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도하는 깨달았다. 이대로 모든 걸 등지고 호텔에 돌아간다 해도 자신이 원했던 그런 밤은 보낼 수 없을 거라는 걸.
결국 체념한 그가 낮게 뱉었다.
“노아, 이 아저씨도 자고 가도 되는 거지?”
풀이 한껏 죽어 푹 꺼지고 있던 아이의 숨소리가 순간 커졌다.
“물론이죠!”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의 얼굴로 해사한 미소가 번지자, 지안도 그제야 건치를 드러내고 웃었다.
신이 난 아이가 아서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은 곰돌이 풍선 누나랑 아저씨랑 같이 잘게요! 그래도 되죠?”
“녀석, 언제는 할아버지 품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더니. 생일 선물로 그런 부탁을 한 거야?”
“생일은 1년에 딱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잖아요. 누나랑 놀게 해 주세요!”
노아가 아서의 옷을 잡아 흔들자 아서는 잠시 고개를 돌려 도하에게 말했다.
“정말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겠나?”
“…….”
도하는 아서가 괜찮다며 호텔로 돌려 보내주길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기대는 소리 없이 깨져버렸다.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게. 뭐, 두 사람도 머지않아 부모가 될 테니, 일일 부모 체험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군. 아이랑 놀아주고, 재우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미리 경험해보고.”
아서의 입가엔 뜻밖의 육아 퇴근으로 들뜬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조심하십시오. 대표님.”
노 실장이 세준의 한쪽 팔을 부축해 병실을 나오고 있었다.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하고 얼굴 곳곳에 붉고 퍼런 상처가 남은 세준은 힘겹게 걸음을 뗐다.
“아!”
한 발짝 걸음을 내딛던 그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터뜨리자, 노 실장이 급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의사 말대로 며칠 더 병원에 머물며 치료를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세준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떼며 말했다.
“병원에서 썩힐 시간 따위 없다는 거, 노 실장이 더 잘 알 텐데!”
세준이 흉터로 얼룩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짖어대자 노 실장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무함마드 회장과 노크맨의 투자 계약 건 때문에 마음이 급해지신 건 이해합니다만, 대표님이 치료를 받지 않고 무리하게 퇴원하신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오늘따라 그의 입바른 소리가 귀에 더 거슬렸다.
세준은 거친 숨을 씨근대며 노 실장의 팔을 거칠게 내쳤다.
“뭐? 방금 뭐라고 했지!”
“……몸에 무리가 오면, 판단력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가지고 치료에만 전념하시는 게.”
한마디를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하는 오만방자한 입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꼴이 된 것도 저 잘난 노 실장 때문이었다.
제때 10만 달러를 부쳤더라면, 노스 필리에 끌려가 굶주린 사자 같은 녀석들의 먹잇감이 될 이유가 없었다.
계획대로 도하가 그들의 밥이 되었다면, 무함마드의 투자 약속도 당연히 무산되었을 거다.
기업 대표의 건강 악화만큼 최악의 투자 불안요소는 없었다. 전문 투자가인 무함마드라면 그런 위험요소가 있는 곳에 투자를 진행할 리 없었다.
10만 달러, 고작 1억으로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었는데, 노 실장은 다 된 밥에 더러운 재를 뿌렸다.
굶주린 사자들의 손에 죽음을 엿보던 순간, 세준은 이를 바득 갈며 노 실장의 얼굴을 떠올렸었다.
운 좋게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노 실장을 잘라버릴 거라고.
세준은 그 각오를 되새기며 소리쳤다.
“……노 실장! 아니 노형근! 당신은 해고야!”
“…….”
노 실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되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세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좀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몸에 무리가 오면, 판단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라고. 이럴 땐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가르치려 드는 그 말투! 그 입 다물고 썩 꺼지라고!”
노 실장은 서릿발처럼 냉기 도는 목소리로 뱉었다.
“……진정하시지요. 대표님.”
“당장 꺼지라는 말 못 알아들어? 사람을 불러서 끌어내야 알아먹겠나? 아니면 나처럼, 이 꼴로 만들어주면 그땐 알겠어?”
세준이 발악하듯 소리치자, 노 실장은 픽 입꼬리를 들며 말했다.
“10만 달러로 저까지 없애시려고요?”
누구보다 훤히 제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는 노 실장의 말에 세준은 벙찐 듯 잠시 굳었다.
“아쉽군요. 서울에 돌아가면 제가 먼저 사직서를 드리려고 했는데, 대표님께 선수를 빼앗겨서.”
“……뭐?”
“인제 보니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더라고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해서 머리가 핑 도는 것도 같고.”
“……갑자기 그게 무슨!”
“올라갈 땐 위만 쳐다봐서 몰랐죠. 하지만 그 반대는…… 높이 올라간 만큼 아래를 보니 끔찍한 현기증이 돌더라고요.”
“……!”
“그럼, 부디 무탈하십시오.”
노 실장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곤 유유히 병실 복도를 떠나갔다.
세준은 벙찐 표정으로 사라지는 노 실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노 실장이 병원 로비를 나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표정 없이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던 그가 가볍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래.”
-실장님, 저번에 황정순 회장을 처리하려다 운전기사가 대신 다친 사고 말입니다.
“그래, 그게 왜?”
-황 회장 쪽 사람이 그때 운전을 했던 심부름센터 직원의 가족부터 주변 지인들까지 전부 만나고 다니며, 운전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렇게 있다간, 그자가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부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전화를 받던 노 실장의 눈빛이 순간 의미심장하게 번쩍였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낮게 내뱉었다.
“일단…… 더 지켜보도록 해.”
-네? 그랬다가 황 회장 쪽이 먼저 알게 되면…….
“더 지켜보라는 말, 못 알아들었어?”
-아, 아닙니다.
통화를 마친 노 실장은 허공을 향해 파안대소했다. 한바탕 미친 사람처럼 웃고 난 후 병원 쪽으로 몸을 돌려 거칠게 쏘아붙였다.
“멍청한 자식! 제 등에 누가 날개를 달아줬는지 모르고.”
***
“아저씨! 빨리, 빨리 와봐요! 이거 빨리 조립하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이번에는 레고 조립이었다.
도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노아를 바라봤다.
야외 풀 물놀이를 시작으로 실내 소프트볼 게임과 카드놀이 그리고 레고 조립까지.
노아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만큼 싫증도 잘 내는 그 나이 또래의 평범한 아이였다.
하지만 체력만큼은 어른을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했다.
눈 밑에 눈그늘이 짙게 내려온 도하는 여전히 쌩쌩한 노아를 보며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밤 11시 반.
그의 계획대로라면, 아이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잠들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기왕 노아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이상, 최대한 빨리 아이를 재우고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기자기하게 놀아주려는 지안을 가만있으라고 말린 그는 직접 몸을 쓰며 노아와 놀아주었다.
먼저 물놀이를 하자고 한 것도, 소프트볼 게임을 제안한 것도 모두 도하였다.
신나게 뛰어놀고 나면 금세 지쳐 일찍 곯아떨어질 거로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자라나는 아이의 체력은 자극하면 할수록 강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잠옷 차림으로 나온 지안은 도하의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괜찮아요, 도하 씨?”
“……응?”
“너무 피곤해 보여서요. 안 되겠어요. 노아는 제가 재울 테니, 도하 씨는 게스트 룸 가서 먼저 자요.”
“…….”
도하의 두 어깨가 아래로 푹 꺼졌다.
게스트룸에서 독수공방이나 하자고 몸도 사리지 않고 그렇게 놀아준 게 아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치던 아서가 도하의 얼굴을 보더니 픽 웃으며 말했다.
“이게 초보 아빠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라네.”
“……?”
“처음엔 의욕이 넘쳐서 몸을 써가며 놀아주는데, 아이들의 체력은 어른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나 해야 할까.”
도하는 대답할 힘조차 없는지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한 시간 뒤.
혼자 게스트룸에 있던 도하는 노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아의 방, 열린 문틈 사이로 은은한 스탠드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 안을 보자, 새근새근 잠든 노아와 그 옆에 눈을 붙이고 있는 지안이 보였다.
모자 관계라고 해도 믿길 만큼 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던 그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침대 앞에서 우뚝 멈춰선 도하는 소리 없이 팔을 뻗어 잠든 지안의 등을 툭 건드렸다.
그녀가 아무 미동이 없자, 다시 한번 툭.
정확히 세 번째 두드림 만에 지안이 몸을 가늘게 떨며 눈을 떴다.
바로 앞에 도둑고양이처럼 다가와 있는 남자를 보고 놀란 그녀가 소리를 내려 하자, 도하는 얼른 검지를 입술에 갖다 붙였다.
그러곤 그녀의 귓가로 가만히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나도 좀 재워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