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조금씩 선명해지는 (68/110)


68화. 조금씩 선명해지는
2022.07.25.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하린의 눈에서 검푸른 빛이 감돌았다.

좀처럼 통화가 연결되지 않자, 하린은 초조한 얼굴로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통화 불발을 알리는 기계적인 안내음에 그녀는 휴대폰을 소파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직업정신을 국 말아 드셨나!”

24시 상시 대기라던 심부름센터 직원이, 고객의 전화를 벌써 세 통째 받지 않고 있었다.

마치 갑을 관계가 바뀐 것처럼 하린은 전전긍긍 못 하고 객실 안을 빙빙 돌았다.

얼마 전, 지안의 뒷조사를 맡았던 남자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번에 서지안 아비에 대해 알아보다가 정말 굉장한 고급 정보 하나를 발견했거든요. 이거 하나면, 고객님 목표는 모두 이루실 것 같은데. 서지안을 권도하 대표 옆에서 떨어뜨리는 일, 그 집에서 쫓겨나게 하는 일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면 천년의 사랑이라도 깨져야 정상이거든요.’

당시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하지 않았던 말이 다시 떠오른 건 그만큼 상황이 절박해졌기 때문이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도하를 만난 후, 하린은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도하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안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굳건한지 그의 눈빛, 목소리, 숨소리에서 절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더 오기가 났다. 저에겐 단 한 순간도 허락되지 않았던 그의 열정이, 엉뚱한 여자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을 갈라놓을 확실한 정보가 있다면, 그녀는 제 영혼을 팔아서라도 알아낼 생각이었다.

저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인간에게 구질구질하게 전화를 거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하린은 다시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금니를 꽉 문 날렵한 턱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휴대폰 스피커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누구십니까? 위대한 CTM 사모님 아니신가요!

웃음 속에 조롱과 비아냥을 교묘히 감춰 뱉은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린은 화가 불끈 솟았지만, 꾹 눌러 삼킨 뒤 말했다.


“서지안에 대한 정보! 그러니까 천년의 사랑도 깨뜨릴 정보가 있다고 하셨죠?”

-아, 제가 그랬었나요?

사람을 가지고 놀 듯 반문하는 말투에 또 한 번 부아가 치밀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참고 말했다.


“네. 그러셨어요. 서지안 부친에 대해 알아보다가 결정적인 정보를 찾았다고. 그거면 두 사람 사이가 갈라지고도 남는다고!”

하린이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쏟아대자, 남자는 가물가물 느른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 뭐 그랬었던 것도 같고.

수화기 너머를 보지 않아도 보이는 남자의 굼뜬 태도에 참다못한 하린이 소리쳤다.


“이봐요! 지금 돈 벌기 싫어요? 계속 그렇게 모른 체하고만 있을 거냐고요!”

-돈 벌기 싫다뇨? 저만큼 돈 좋아하는 놈이 어디 있다고. 그럼 돈은 다 준비가 되셨나 보죠?

단도직입적인 남자의 물음에 하린은 잠시 건조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마지못해 답했다.


“그…… 그럼요.”

-그럼, 입금부터 하시고 문자 주십시오. 확인되면 바로 정보 넘겨 드릴 테니.

“자, 잠깐요!”

-말씀하시죠.

“그쪽이 알아냈다는 정보가 시답잖은 거면, 그땐 어떻게 할 거죠? 큰 거 한 장 값을 못 하는 정보라면…….”

하린의 말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럼 전액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도 정보를 보고 각기 등급을 매깁니다. 고객님께 드릴 정보는 특A급 정보가 확실하단 것만 말씀드리죠. 지금 통화, 말 안 해도 녹음하고 계시잖아요?

남자가 불시에 허를 찌르자 하린은 움찔 놀라 어깨를 떨었다.

잠시 귀에서 떼어낸 휴대폰 화면에 ‘녹음 중’이라는 붉은 글자가 보였다.

하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하다가 비장한 목소리로 뱉었다.


“그럼 입금 후 다시 통화하도록 하죠.”

 

***

안락의자에 기대앉은 정순은 태블릿 PC로 경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케이원 그룹이 무함마드 회장의 투자 계약을 유치했다는 기사가 뉴스 첫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기사 한 편에 자그마하게 박힌 도하의 얼굴을 보는 그녀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누구 손자인지 몰라도 인물이 아주 훤하다니까.”

다시 깨어나 준 것만도 고마운데, 건강을 되찾아 회사까지 잘 이끌어주니 정순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건 바로 도하의 곁에 지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자 내외를 떠올리는 정순의 눈가로 기분 좋은 주름이 잡히던 그때, 정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정순은 태블릿 PC를 협탁 위에 내려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 자네 왔나.”

“네. 잠시 이야기 괜찮으십니까?”

“그럼. 앉게나.”

정순의 맞은편에 앉은 정 실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회장님을 치려던 차량 운전자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운전자 아내가 따로 연락을 줬습니다.”

“그자 아내가?”

“네. 자라나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더는 감출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 뭐라던가!”

“남편이 사고 1, 2주 전부터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행동도 평소와 달라 위치가 공유되는 위치추적 앱을 깔아놓고 몰래 지켜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 위치가 반복적으로 잡힌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CTM 물류센터였답니다.”

“뭐?”

“처음에는 가족들 몰래 투잡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오는 남편 모습이 물류센터에서 일했다고 볼 수 없을 만큼 멀끔했다고 하더군요.”

“뭐라고? 내가 알기엔 물류창고 일이 그럴 수가 없는데?”

정순이 눈썹을 모은 채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자, 정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말을 받았다.


“네. 혹시나 해서 운전자가 물류센터에 갔던 날, 현장 인력 정보를 확인해 보니, 그자 이름이 없었습니다. 작업장 CCTV에도 모습이 담기지 않았고요.”

“뭐? 위치가 거기로 잡혔다지 않았나.”

“네. 아마도 물류 작업 현장에 투입된 게 아니라, 사무실이나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추측하기에는, 그날 사고에 대한 사전 조율을 위해 관계자와 만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본사보다는 아르바이트생 같은 뜨내기가 많은 물류센터가 서로 알리바이를 만들기에도 좋은 접선 장소였겠지요.”

“그럼 그날 그 사고의 배후가 정말……!”

정순의 이마 위에 깊은 주름이 앉았다.


“그리고……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회장님.”

정 실장이 비장하게 뱉은 후 잠시 뜸을 들이자, 정순은 눈을 크게 뜨고 대답을 재촉했다.


“뭔가?”

“운전자가 CTM 물류센터에 갈 때마다 타고 간 차량이 있는데, 그 차가 사고 당시에 운전한 차와 다르더군요. 그래서 알아보니 개인 차량이 아니고, 한 심부름센터 앞으로 등록된 회사 차였습니다.”

“심부름센터? 그자 직업은 택시 기사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가끔 투잡으로 심부름센터 일도 받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근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그 심부름센터가, 회사명을 여러 번 바꾸었더라고요. 현재 이름은 ‘빠르미’인데, 3년 전 사명은…… ‘헬프 119’라고.”

정 실장의 말에 정순의 눈이 순간 파도처럼 크게 일렁였다.


“무, 뭐어? 헬프 119?”

“네. 회장님이 기억하시는 그곳이 맞습니다.”

“……도하 사고를 낸 상대 운전자. 그자가 거기 소속이었잖나!”

“네. 이번에 회장님을 노린 차량 운전자도, 3년 전 도련님을 그렇게 만든 운전자도 같은 심부름 센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사람과 CTM쪽 사람이 은밀히 접촉한 정황도 파악되었고요.”

정순은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얼마 전, 저를 향해 돌진해오는 차를 발견했던 순간이 번쩍 되살아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번 사고에 대해선 마음속에 짚이는 확실한 배후가 있었다. 그래서 심증을 물증으로 바꾸기 위해 감행한 조사였다.

그 끝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연결고리를 찾게 될 줄이야.

3년 전 도하의 사고 원인은 마주 오던 차량 운전자의 음주운전이었다.

현장에서 운전자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만취 상태로 나왔고, 경찰 조사 결과도 의심의 여지 없이 음주운전에 의한 사고로 결론지어졌다.

게다가 상대 운전자는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전과 9범이었다.

하필 그런 사람과 만난 게 운이 없었다고, 그때 도하를 새벽에 나가게 두는 게 아니었다고 정순은 후회 아닌 후회를 했을 뿐,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를테면 그날의 사고가 계획되고 조작된 범죄일지도 모른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과연,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일까.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정순이 나직이 속삭였다.


“우리 도하 사고, 그때 그 운전자는 출소했나?”

“……그렇지 않아도 알아봤더니 곧, 출소를 앞두고 있다 합니다.”

“그때 그 사고도 다시 처음부터 샅샅이 파헤쳐보도록 하게. 운전자가 출소하면, 놓치지 말고 만나야 하네.”

정순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심지 굳게 빛나고 있었다.

***

지안은 도하의 손에 이끌려 살금살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잠든 노아를 살피고 있었다.

첩보작전을 펼치듯 숨죽여 가며 게스트 룸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도하의 퀭한 얼굴을 빠르게 스캔한 지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요, 잠이 잘 안 와요?”

“그걸 말이라고 해?”

도하가 불퉁한 목소리를 내자, 지안이 눈썹을 높이 들어 올렸다.


“왜 잠이 안 올까. 엄청나게 피곤해 보이는데.”

“습관이 이래서 무서운 거야.”

“……습관이요?”

“그래.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당신이 3년 동안 옆에 있어 줬잖아. 이젠 서지안 없으면 잠도 안 와.”

그 말을 하는 도하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절실해 보였다.

지안은 그 뜨거운 눈빛이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위험해 보여서 잽싸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도하 씨, 노아랑 덜 놀았나 보다. 며칠만 더 정신없이 놀아주면 잠이 안 온다는 말도 쏙 들어갈 텐데.”

그 말을 하며 그녀가 도하의 손에 붙들린 손을 슬쩍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사수한 그가 지안의 작은 몸을 제 몸에 바짝 밀착시켰다.

어!

도하는 놀라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묵직하게 속삭였다.


“왜 자꾸 노아랑 놀래, 내가 같이 놀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

“나랑도 놀자, 서지안.”

“도, 도하 씨!”

“7세 연령에 맞는 그런 시시한 놀이 말고.”

“……!”

“서른넷 남자에게 맞는 진지한 놀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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