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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내 손을 잡아 (69/110)


69화. 내 손을 잡아
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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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기운 도하의 고개가 아찔한 각도로 다가와 지안의 입술 위에 안착했다.

갈고리처럼 입술을 낚아챈 그는 입안에 감춰져 있던 더운 숨을 모두 집어삼킨 뒤 폭주했다.

심장을 휘젓듯 빗발치는 입술의 움직임에 지안은 정수리 끝이 바짝 섰다. 온몸의 감각을 전부 소환하는 아찔한 감촉은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마저 아뜩하게 만들었다.

뜨거운 숨결이 입안 곳곳을 빠짐없이 훑고 지나가자, 달궈질 대로 달궈진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가빠진 숨에 더는 버틸 수 없어진 그녀가 팔을 뻗어 도하를 밀어냈다. 그러곤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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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방에 노아가 자고 있어요.”

그러니까 더는 다가오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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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문제라면 지금 당장 호텔로 돌아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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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을 하는 도하의 입술은 평소보다 더 선정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아침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긴 어둠 속에서 파도쳤던 어느 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본 그의 입술은 지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발견한 듯 거칠게 달려들던 입술. 그 입술의 집요하고 끈질기던 유혹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지안은 긴장이 역력한 눈빛으로 빠르게 속눈썹을 깜빡였다.

호텔로 돌아가면 분명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서른넷 남자의 진한 놀이로부터 밤새 자유로울 수 없는 시간이 또다시…….

지안은 본능적으로 핑계를 찾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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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깨어났을 때 우리가 없으면 실망할 거예요!”

도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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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생일파티였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생일도 다 지났고.”

도하의 눈길이 벽에 걸려 있는 전자시계를 향하고 있었다.

새벽 1시 반.

24시가 지났으니 엄연히 다른 날이었다.

쓸데없이 예리하긴.

하지만 이렇게 호텔로 돌아가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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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렇게 가는 건 좀…….”

지안이 머뭇거리며 뱉자, 도하가 불쑥 끼어들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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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를 위해서도 이편이 더 나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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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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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깊이 들어버리면 헤어질 때 더 힘들 테니까. 아이들은 그렇잖아. 금세 정을 주고 또 떨어지기 힘들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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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정말 노아를 위한 건지 아니면 도하 자신을 위한 건지 몰라도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지안의 표정이 숙연해지자, 도하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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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두고 아침에 떠나는 것보다, 간밤에 다녀간 산타클로스처럼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게 낫지 않겠어?”

그 말을 듣고 나니, 지안은 마음이 더 크게 일렁였다.

어린 시절, 명절 때마다 고모가 할머니를 보러 왔을 때 지안은 그 짧은 며칠 동안 고모의 붙박이가 되어 따라다녔었다.

그러다 고모가 이제 가야 한다며 돌아설 때면, 떨어지기 싫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외로운 아이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쉽게 정을 주고, 헤어짐을 견디기 힘들어하는지 잘 알기에 지안은 어쩌면 도하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마지막 노파심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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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서 위원장님께 인사는 하고 가야 하잖아요.”

도하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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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걱정하지 마. 내일 박람회장에 나가야 해서 일찍 호텔로 돌아갈 거라고 아까 다 말씀드려 놓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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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말을 마친 그는 한껏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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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호텔로 가는 거지?”

 

***

객실 문이 열리고 세준이 들어오자, 하린의 눈동자는 벌레를 발견한 듯 순간 혐오로 물들었다.

세준도 한껏 날 선 눈빛으로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며칠 전 병실에 들렀던 하린이 저를 한낱 쓸모없는 인간 취급하고 떠났던 걸 떠올리자, 입매가 절로 비딱하게 뒤틀렸다.

하린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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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준 씨, 벌써 퇴원한 거야?”

그런 그녀를 향해 세준은 목소리를 꾹 눌러 섬뜩하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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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방금 벌써라고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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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물어볼 수 있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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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벌써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지? 병원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그 며칠이 환자한테는 얼마나 괴롭고 힘든 시간인데!”

예민함이 물씬 풍기는 그의 말에 하린은 같잖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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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누가 보면 도하 씨처럼 한 3년은 의식불명이었는 줄 알겠네.”

하린도 세준이 눈엣가시 같긴 마찬가지였다.

도하를 추락시킬 거라고, 그리하여 지안이 그의 곁을 떠나게 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건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계적인 부호이자 유명한 투자가는 CTM이 아닌 케이원을 택했고, 케이원은 승승장구를, CTM은 박람회 퇴출을 당했다.

도하는 일도 사랑도 날로 꽃피워가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세준은 그 반대의 나락만 걷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파트너로 생각하고 동맹까지 맺었다니!

처참하게 멍들고 찢긴 몰골을 보자 하린은 잠시나마 그를 믿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린은 입안에 감도는 쓴맛을 꾹 삼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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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위자료 보내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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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뭘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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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관계 이제 청산할 때도 됐잖아. 깨끗하게 끝내려면 돈 얘길 안 할 수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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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돈! 민하린, 너 나한테 돈이라도 맡겨 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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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하게 도하 씨랑 잘 만나고 있던 사람 꼬드겨 낸 게 누군데. 약혼까지 하게 만들고, 결혼도 몇 달 안 남은 이 상황에서 파혼녀가 되게 생겼는데 위자료라도 두둑이 챙겨줘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세준은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그녀를 두고 생겨난 말이 아닌가 싶었다.

기가 찬 듯 황소 숨을 몰아쉬던 그가 거칠게 목청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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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업이 승승장구하니까 초조해져서 약혼해달라, 결혼해달라고 안달복달한 게 누군데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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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복달? 내가 언제 안달복달했다고 그래! 진짜 미쳤나 봐!”

하린은 지지 않고 소리쳤다.

서로의 거친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불같이 들끓는 기운이 가득 번지고 있었다.

하린은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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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껏 부치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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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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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럼, 전부 다 불어버릴 테니까!”

그녀가 목에 힘을 잔뜩 주어 뱉자 가늘게 뜬 그의 눈이 빠르게 흔들리다 다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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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불어? 불긴 뭘 불겠단 거야!”

하린은 씩, 우월한 미소를 짓다가 어느 순간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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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인가. 왜, CTM 물류창고에서 40대 남자 하나가 과로사로 죽었었지? 아들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라고 혼자 남은 할아버지가 매일같이 회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가 나오자, 세준은 소스라치게 놀란 듯 잿빛 얼굴이 되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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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나 눈이 오나 CTM 앞에 출근하던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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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린! 지금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선을 넘는 이야기에 그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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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궁금하네. 그 폐쇄 병동엔 할아버지 말고, 몇 명이나 더 있을까? 그 안에서 CTM 피해자연맹이라도 만든 건 아니겠지? 하하.”

위험천만한 이야기를 우스갯소리처럼 뱉는 그녀의 모습에 세준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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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배송 치타맨을 탄생시킨 지세준 대표님이니까 신속함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는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겠죠?”

말 몇 마디로 세준의 멱살을 잡아챈 하린은 더욱더 자신만만하게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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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빨리, 성의껏 부쳐. 나를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하면 똑같이 갚아줄 테니까.”

앙다문 세준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처음 하린을 유혹했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 얕은수에 넘어와 제 여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미처 몰랐다.

도하를 배신한 그녀라면, 언제라도 저 또한 가차 없이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서로가 배신을 일삼는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먼저 뒤통수를 치는 쪽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도.

지금 세준은 그녀에게 철저히 선수를 빼앗겼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하린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느른하게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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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난 마당에 같은 객실을 쓰는 것도 좀 웃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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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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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내가 쓸 테니, 세준 씨는 좀 나가 줄래?”

하린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세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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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싫어? 그럼 내가 나갈까?”

하린이 눈에 힘을 주어 날카롭게 흘겨보자 세준은 천천히 몸을 문 쪽으로 돌렸다.

세준이 홀연히 사라지고 방금 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는 하린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정보를 얻는 데 필요한 1억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의외로 가까운 곳에 답이 있었다.

하린은 세준과 만나는 동안 종종 노 실장과 그가 나누는 대화를 훔쳐 듣곤 했었다.

가장 절친한 친구인 도하를 가볍게 배신하고 저를 유혹해온 남자를 그녀라고 모두 믿을 수 없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수집한 정보가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이다니.

하린은 먼 곳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

도하는 제 몸을 파고드는 손길에 놀란 듯 숨을 꾹 참았다.

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이는 팔이 보기보다 저돌적이고 거칠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부드러운 뺨이 그의 온몸에 찰싹 붙어왔다.

가까이 붙은 몸에서 풍겨오는 은은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기를 그는 코끝까지 깊이 들이마셨다.

매일 맡아도 질릴 것 같지 않은 그런 향기, 인위적인 향수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싱그러운 살 냄새였다.

도하는 이제 막 잠든 누군가의 일정한 숨소리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같은 침대 위, 저만치 떨어진 곳에 여전히 저처럼 눈을 뜨고 있는 지안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말없이 도하의 품에 안겨 잠든 작은 아이를 애틋하게 바라봤다.

30분 전.

두 사람이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잠이 깬 노아가 뒤에서 후다닥 달려왔다. 그러곤 도하의 다리를 사수하듯 꼭 붙잡아 버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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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요.’

그 한마디에 산타클로스처럼 다녀가겠다던 결심은 무참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둘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온종일 뜨거웠던 육체의 빗장을 풀고자 했던 계획도 모두 무산되었고.

도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을 향해 긴 팔을 쭉 뻗었다.

몸의 반 이상은 노아가 차지하고 있어 닿을 수 없지만, 손이라도 잡아야 위안이 될 것 같았다.

도하의 신호를 눈치챈 지안도 천천히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두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따듯했다.

그녀의 손가락과 손등을 연신 쓸어내리는 아쉬움 가득한 남자의 손길이 한동안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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