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위기는 곧 기회
(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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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위기는 곧 기회
2022.08.01.
떠오르는 태양보다 더 뜨겁게 작열하는 남자의 눈빛이 잠든 지안을 깨웠다.
스르르 눈을 뜬 지안은 침대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도하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옆자리에서 잠들어 있던 노아도 보이지 않았다.
지안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노아는요?”
“아까 새벽에 깨서 할아버지 품으로 갔어.”
“……우리랑 자는 게 불편했나?”
“녀석, 그럴 거면 진작 거기서 잤으면 좋았잖아.”
도하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지안은 픽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 나이 땐 변덕이 심하잖아요. 도하 씨도 일곱 살 땐 아마 그랬을걸요?”
지안의 말에 도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야. 목표가 생기면 그것만 보고 가는 사람이니까.”
그 말을 할 때 도하의 눈동자는 묘한 빛을 띤 채 그녀의 얼굴로 고정되어 있었다.
지안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별안간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거칠게 달려들어 제 입술을 모조리 집어삼켰던 남자.
‘장소가 문제라면 지금 당장 호텔로 돌아가도 좋아.’
당장이라도 호텔로 돌아가자며, 그녀의 손을 와락 낚아채 방을 나섰던 남자.
노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제동장치도 그에게는 소용없었을 것이다.
그의 품에서 느껴지던 거친 심장박동과 홧홧한 열기를 떠올리자, 지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갔다.
문제는 절실한 눈동자가 어젯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한껏 억눌린 욕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눈동자. 밤새 눈덩이처럼 부푼 욕망이 위태롭게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쉽게 변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여전히 일렁이는 짙은 욕망을 느낀 그녀가 멋쩍은 듯 시선을 옮기려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자.”
“……네?”
“이제 더는 못 참겠어.”
“……!”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온 갈급한 목소리에 지안은 어떤 말도,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다시금 그의 손에 속절없이 이끌려 방을 나왔다.
미친 듯 달려 돌아온 호텔.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로 눈앞이 아득하고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객실 문이 닫히자마자 도하는 무섭게 폭주했다.
단숨에 그녀의 입술로 달려들어 거친 숨을 건네며, 손으로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자비 없이 걷어냈다.
객실 바닥을 덮은 모던한 느낌의 카펫 위로 허물처럼 벗겨진 옷들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친 입맞춤에 중심을 잃은 두 몸이 어느새 침대 위로 아찔하게 넘어갔다.
은은한 시폰 커튼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은 숨을 곳 하나 남겨두지 않고 적나라하게 침대 위를 비췄다.
도하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하얀 살결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그 무엇도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제야 어제의 위기가 오늘의 더 나은 기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커먼 밤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생명력 넘치는 아침의 사랑.
밤새 고요했을 객실 침대 위로 거친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
‘띵동.’
휴대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청량한 알림음에 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린은 잽싸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뜬 입금 알림 문자를 보는 그녀의 두 눈이 조명을 쬔 보석처럼 반짝였다.
3이라는 숫자 뒤에 따라붙은 ‘0’의 개수만 자그마치 여덟 개.
그녀가 생각한 위자료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지만, 하린은 급할 게 없었다.
세준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앞으로 돈 걱정 따윈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위자료를 따로 떼어 받지 않아도, 그의 돈이 모두 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총알같이 날아온 3억을 보며 그녀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천년의 사랑도 깨뜨릴 수 있다는 정보를 손에 넣으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전에 남자와 거래를 주고받았던 계좌번호를 입력하고, 이체금액에 1억을 입력했다.
0의 개수가 8개나 되는 거금은, 입금된 내역을 확인할 땐 짜릿했지만, 송금하려니 왠지 모르게 씁쓸하고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혹시 별거 아닌 정보에 큰돈을 날리는 건 아닌지.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달라질 게 없었다. 한판 도박에 운명을 내맡긴 사람처럼 그녀는 비장한 눈빛으로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기다란 검지를 천천히 ‘이체’ 버튼 앞으로 가져갔다.
화면에 살포시 댔던 손가락을 가볍게 떼자, ‘이체 완료’라는 안내 문구가 보였다.
후련한 마음이 잠깐 들다가 이상하게 보내기 전보다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정보를 손에 쥐게 될까.
한 시간, 두 시간…….
입금했다며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진작 ‘읽음’으로 바뀌었는데, 남자에게선 여전히 답이 없었다.
점점 불안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혹시 사기를 당한 건 아닌지. 천년의 사랑을 갈라놓을 만한 대단한 정보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게 아닌지.
초조한 마음에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당장 찾아가 만나보기라도 할 텐데, 미국에 있다는 게 이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하린은 기어이 부재중 전화를 여섯 통이나 남기고, 일곱 번째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연결음에 그녀가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순간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사모님!
차분하고 태연한 남자의 목소리에 하린은 결국 폭발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돈을 보낸 지가 언젠데!”
-아휴, 성미도 급하시지. 지금 미국이라고 하셨죠? 그럼 여기 시차도 생각해 주셔야죠. 이 꼭두새벽에.
“시, 시차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잠시 멍했다.
아, 시차가 있었지.
-그렇지 않아도 지금 벨 소리에 깨서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사정을 알게 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묻겠지만 확실한 정보 맞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저 이 일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라고. 속고만 사셨나 본데, 이번에는 믿으셔도 좋습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지금 빨리 보내주세요.”
전화를 끊은 하린은 그제야 길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돈을 받고도 변하지 않은 남자의 확신과 자신감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알림음이 연달아 두 번 울렸다.
‘딩동- 딩동-.’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 함을 눌렀다.
두 개의 이미지 파일.
무언가를 확인하는 그녀의 동공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심장하게 흔들렸다.
만면 가득 번지던 긴장감이 어느 순간 일제히 걷히고 세상을 얻은 듯 자신만만한 빛이 그 위로 깔렸다.
하린은 긴장으로 메말랐던 입술을 천천히 다시며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때 화면이 바뀌며 통화연결 화면이 떴다. 조금 전 통화한 남자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하린은 얼른 연결 버튼을 눌렀다.
-보내드린 건 확인하셨습니까?
하린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픽 터뜨리며 말했다.
“하, 그쪽 나한테 실수한 거 알아요?”
-실수요?
“이걸로 천년의 사랑을 깨뜨린다고?”
-…….
“고작 천 년이라니! 만 년 아니 더한 인연도 깨진다고 했었어야지. 그럼 고민 없이 질렀을 텐데.”
그제야 그녀의 의중을 알아챈 남자가 고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확실한 거라고!
휴대폰을 든 하린은 한동안 이성의 끈을 놓은 사람처럼 끝없이 웃어댔다.
***
미래 도시 느낌이 물씬 나는 CTM 사옥 안으로 낡고 헤진 복장의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계절감이 맞지 않는 두꺼운 외투 차림에 커다란 배낭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우중충한 차림에 흰 수염과 까만 수염이 지저분하게 뒤섞여 난 얼굴은 많은 이들 틈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로비 데스크 앞으로 다가간 남자는 한쪽 손에 들고 있던 피로회복제 상자를 위에 툭 내려놓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추레한 차림만으로 남자를 잡상인이라 확신한 여직원의 눈이 불퉁하게 가늘어졌다. 여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형식적인 질문을 뱉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생님.”
그러곤 귀찮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딴청을 피웠다. 남자는 그런 여직원을 잠깐 응시하다 나직이 말했다.
“지세준 대표를 만나러 왔소.”
이런 차림의 잡상인들은 꼭 평사원이 아닌, 임원급 이상의 높은 사람을 찾는 특성이 있었다.
여직원은 뻔한 레퍼토리가 따분한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희 대표님께선 현재 해외 출장 중이십니다.”
“해외 출장? 그럼 언제 돌아옵니까?”
“자세한 부분은 내부 규정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을 만나시려면 미리 사전에 약속을 잡고 오셔야…….”
남자는 여자의 비딱한 말을 단칼에 잘라내며 말했다.
“약속은 미리 잡아 뒀습니다.”
“네?”
여직원이 당황한 듯 눈썹을 높이 치켜들었다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께서 약속 일자를 착각하신 모양이네요. 대표님은 아직 해외에 체류 중이십니다.”
“언제 돌아옵니까?”
“그건 좀 전에 말씀드렸듯 함부로 알려 드릴 수 없는 정보입니다. 죄송합니다.”
“지 대표에게 전화 한 통 걸어주겠소? 직접 물어봐야겠으니.”
남자의 주제넘은 부탁에 여직원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빨리 거는 게 좋을 거요. 머뭇거렸다가 더 곤란한 일을 만들지 마시고.”
조곤조곤 얘기하던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독기가 묻어나자, 여직원은 조금 당황한 듯 입술을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 다이렉트로 전화를 드리는 건 저희도 어렵습니다. 대표실 비서실장님 통해서만 일을 하고 있어서요.”
“좋습니다. 그럼 비서실장한테 연락해 보시겠소?”
여자는 그동안 비슷한 상황에서 수없이 그래 왔듯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거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얼마 후 고개를 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바쁘신지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선생님 성함이랑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확인 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낮게 속삭였다.
“성함은 필요 없고, 지 대표에게 이 말만 전해 주시오.”
“…….”
“피로회복제를 갚으러 온 사람이 있었다고. 곧 다시 뵈러 오겠다고.”
“네?”
“그렇게만 전해 주십시오. 그럼.”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돌아서 회전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여직원은 저만큼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한쪽 입술 끝을 픽 올리며 혼잣말을 뱉었다.
“뭐, 피로회복제? 간만에 신박한 핑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