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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너의 하늘이 되어줄게 (71/110)


71화. 너의 하늘이 되어줄게
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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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

도하는 유학 시절 가장 좋아했던 레스토랑에 지안을 데려갔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시간이 되면 꼭 한번 그녀와 이곳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들뜬 기색으로 도하는 레스토랑 문을 잡아당겼다.

펜실베니아 대학교 안에 있는 프랑스풍 레스토랑은 우아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로 도시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맛집이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멋스러운 인테리어와 분위기에 지안은 벌써 마음을 뺏긴 듯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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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도하가 나직이 묻자 지안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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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예뻐요. 식당이 아니라 호텔 라운지 같기도 하고, 고급스러운 갤러리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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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의 입가로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지안을 만난 후 도하는 새로운 기쁨 하나를 배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기쁨. 그리고 그것을 상대가 좋아해 줄 때의 가슴 벅찬 감동. 그 기분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쁨이었다.

도하는 눈에 별을 박아넣은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식당을 감상 중인 지안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지역의 대표 메뉴인 치즈 스테이크와 가재 요리 그리고 파리 브레스트 디저트까지.

요리가 나오자 지안은 온 신경을 먹는데 쏟았다. 말없이 줄곧 먹기만 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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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에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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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안은 입안에 가득 음식이 들어 있어 곤란하다는 듯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답했다.

그러곤 한참 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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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 먹은 음식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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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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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박람회 일을 다 끝내고 먹는 밥이라서 그런가.”

그 말을 하며 지안이 씩 웃자 도하는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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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입에도 맞다니 다행이야.”

지안은 그의 말을 따라 하다가 살짝 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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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긴 한데…….”

도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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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도 같이 오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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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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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매직 가든 갔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좋은 곳, 맛있는 음식 보면 할머님이 생각나요. 같이 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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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데까지 뻗어 나간 그녀의 깊은 마음 씀씀이에 도하는 순간 가슴이 따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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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행이에요. 내일이면 할머님 뵐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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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표를 바꿀까 했는데,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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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바꾸다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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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랑 더 여행하다 가려고. 일 때문에 와서 우리 둘만의 시간은 별로 없었던 게 아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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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안은 당황한 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 애써 진정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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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아쉬울 때 돌아가야 한다잖아요. 여운이 있어야 다음에 또 찾게 되는 법이고.”

언제 들어도 총명한 그녀의 목소리에 도하의 입꼬리가 절로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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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다음에 또 같이 와주겠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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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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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박람회 말고 다른 이유였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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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하의 입가에 사뭇 의미심장한 빛이 돌자 지안은 잠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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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신혼여행이라든가.”

‘신혼여행’이라는 말에 지안의 뺨 위로 순간 진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와 보낸 적지 않은 밤이, 그 뜨겁고 숨 막혔던 순간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한데, 또 신혼여행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걸로는 부족했단 말이야?

그녀의 안색이 조금씩 어두워지자 도하는 냉큼 말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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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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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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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무리 좋아도 신혼여행지로는 아니지. 신혼여행은 하와이로 갈까? 아니면 발리? 몰디브? 당신이 원하는 데면 나는 어디든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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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를 지나 발리를 거쳐 몰디브까지 뻗어 나간 도하의 직진에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그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잠시 생각하던 지안은 얼른 화제를 바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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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 먹고 기념품 숍에 한번 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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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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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할머님 선물 고르러요.”

이 도시에서 오랜 기간 유학한 경험자로서 도하는 딱히 살만한 기념품이 없다고 말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이번이 첫 외국 여행인 그녀의 낭만과 로망을 함부로 망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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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아.”

도하의 말에 지안의 입꼬리도 기분 좋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인디펜던스 비지터센터 기념품 숍.

기념품 숍 안에 들어서는 순간, 지안은 자신이 여행자 신분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박람회장 안에서 강제로 봉인돼 버렸던 여행자의 설렘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이제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 남은 설렘이 최고조로 극대화됐다.

자유의 종이 새겨진 각종 컵, 종 모양의 손거울과 각종 팬시용품 그리고 둥근 볼 안에 자유의 종이 들어가 있는 스노우볼까지.

시선을 끄는 기념품들 사이에서 지안은 잠시 골똘해졌다.

정순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정순과 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한 번도 지안은 그녀에게 변변한 선물을 준 적이 없었다.

도하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정순의 시간도 똑같이 멈춰 있었다.

정순은 3년간 단 한 번도 생일상을 받지 않았고, 생일 자체를 챙기지 않았다.

도하가 누워 있는데 생일을 축하받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여긴 듯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선물을 건네며 축하하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서로를 위로하고 슬퍼할 일은 많았지만, 선물을 주며 축하해 주거나 기쁘게 해준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지안에게 이번 선물은 꽤 큰 의미로 다가왔다.

도하가 깨어났기에 가능한 선물이었고, 처음으로 정순에게 건네는 수줍은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념품 샵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선택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작은 양산 하나를 집어 들어 도하에게 보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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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산 어때요? 할머님 정원 산책하실 때 잠깐 쓰시면 될 것 같은데.”

지안의 손에 들린 것을 유심히 보던 도하는 직원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양산을 한번 펼쳐보았다.

예상대로 양산 가운데에 거대한 자유의 종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양산 너비를 채우려고 확대된 종 그림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별로라는 듯 지안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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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산책할 때라도 광합성 하시는 게 할머님 건강에 더 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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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기념품 샵을 해부하듯 샅샅이 훑으며 고민하던 두 사람은 결국 정순에게 직접 호출하기로 했다.

반품하러 쉽게 올 수 없는 먼 거리이기에, 그편이 확실할 것 같았다.

지안은 얼른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이역만리의 거리만큼이나 먼 신호음이 오늘따라 길게 울리고 있었다.

***

한국 시각 오전 8시 40분.

평소 정순이었다면, 벌써 아침을 먹고 거실 소파에 앉아 허브 티를 마실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침대 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엔 남모를 고민이 고여 있었다.

그때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을 기력조차 없는지 한참을 그냥 흘려보내던 그녀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휴대폰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지안이]

평소였다면 부리나케 전화를 받고도 남았을 시간.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보는 정순의 흐릿한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흐느끼듯 엷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휴대폰을 저만치 멀리 밀어두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뜨거운 물기로 얼룩진 눈가에서 버티다 못 한 눈물 한줄기가 툭 떨어져 내렸다.

희미한 시야로 어젯밤 급하게 저를 찾아온 정 실장의 심각한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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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큰일이라도 난 듯 사색이 되어 온 정 실장의 모습에 정순의 주름진 눈가가 순간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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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데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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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기듯 서재로 달려온 그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정순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팔십 가까운 노파의 직감은 정확했다.

도하가 사고로 3년간 의식 없이 누워 있게 된 후로는 더는 세상에 놀랄만한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팔십 년을 살아도 세상은 아직 더 놀랄 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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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도련님 사고를 낸 음주 운전자가 출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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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곧 이라더니 벌써 나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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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데 그자가…….’

정 실장의 얼굴로 이전보다 더 짙은 어둠이 깔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난처한 입술이 한참 동안 허공을 맴돌다 겨우 작은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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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사고를 낸 운전자가 바로…… 사모님. 그러니까 서지안 사모님의 친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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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게 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벼락.

‘청천벽력’이 정순의 심장을 깊숙이 뚫고 들어왔다.

정순은 지안이 저택에, 그리고 제 인생에 들어온 이후 어둡던 하늘이 갠 듯 세상이 달리 보였다.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고된 병간호를 3년 동안이나 지친 기색 한번 비치지 않고 해냈던 아이.

그 정성과 진심으로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 같던 도하를 깨워 준 아이.

살얼음처럼 차가운 도하의 심장을 녹여주고, 그 자리에 따듯한 온기를 심어준 아이.

그런 아이가 지안이었다.

도하의 사고를 낸 게 지안의 친부였다는 얘기에, 정순은 가장 먼저 지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없이 가엽고 애틋한 아이의 얼굴을.

하늘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그녀가 살아서 해야 할 마지막 일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하와 지안, 그 두 아이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지안은 더 특별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의지하는 아이. 지안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다.

정순은 누구보다 지안이 흘려온 눈물을 알았다. 도하는 여섯 살까지 남부럽지 않게 부모의 사랑을 모두 받고 자랐지만, 지안은 달랐다.

핏덩이 때 버림받은 아이의 뼛속 깊은 외로움과 슬픔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이제 더는 울지 않기를, 앞으로는 웃는 모습만 볼 수 있기를 바랐는데…….

정순은 다른 건 들리지 않았다. 도하를 그렇게 만든 게 지안의 친부이든 계부이든. 그는 지안을 버린, 지안에게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때문에 지안이 다시 아파지는 건 볼 수 없었다.

정순은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그 어느 때보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자신이 지안의 맑게 갠 하늘이 되어주겠다고. 어떤 먹구름도 비구름도 끼어들지 못하게 지켜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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