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어디에서 나타났니
(72/110)
72화. 어디에서 나타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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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어디에서 나타났니
2022.08.08.
서울 외곽의 한 모텔 앞.
낡고 두꺼운 야상 점퍼 차림의 남자가 우두커니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남자의 코와 입에서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서영식 씨?”
처음 듣는 목소리에 영식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담한 체구이지만 단단해 보이는 한 노파가 쇠도 녹일 것 같은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
일면식도 없는 얼굴에 잠시 주춤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아십니까?”
“서영식 씨, 맞지요?”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영식은 옷차림과 말투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노파를 한동안 유심히 눈에 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주름이 조금 짙었다 뿐, 눈앞의 여인은 평생 고생 없이 살아온 귀부인의 자태였다.
밑바닥을 전전해온 저와는 평생 말 한마디 섞을 일 없는 그런 류의 사람이 저를 안다는 게 조금 수상했다.
영식의 눈동자에 한줄기 의문이 어리자 노파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는…… 서지안 양, 그러니까 지안이 시할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놀란 영식의 얼굴이 싹 굳었다.
“……!”
“잠깐 저와 이야기하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근처 조용한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끈한 찻잔 손잡이를 가볍게 쓸어내리던 정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모질고 무섭습니다.”
“…….”
“이리 다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영식은 눈을 크게 뜬 채 정순의 얼굴을 응시하다 나직이 물었다.
“그 말씀은…… 저희가 구면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기억…… 안 나십니까?”
순간 그녀의 눈에선 살얼음이 낀 듯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영식은 오래된 기억 속 한 장면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혼이 빠진 듯 창백한 얼굴로 제 팔을 붙잡아 흔들며 울부짖던 노파.
‘우리 도하! 우리 손주 살려 내! 금쪽같은 내 손주 살려내라고!’
경찰서에서 만난 노파는 발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가족의 사고 소식에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달려온 것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애달프게 울어대는지 울음소리가 한동안 귓가에 남아 그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주름진 얼굴을 뜯어보던 영식의 눈빛이 순간 굵게 흔들렸다.
짙게 일그러진 미간과 힘이 잔뜩 들어간 눈매가 손자를 잃을까 봐 오열하던 그 날의 노파가 확실했다.
영식의 눈빛이 전과 다르게 변하자, 정순은 마른 입술로 속삭였다.
“이제 기억이 난 모양입니다.”
“…….”
영식은 벙찐 얼굴로 복잡한 관계도를 머릿속에 그려나갔다.
3년 전 사고의 피해자였던 권도하, 그리고 그의 할머니인 황정순. 그런데 그녀는 분명 조금 전 자신을 지안의 시할머니라고 소개했다.
그 말은…… 지안이 권도하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리인가.
정순이 사람 인연이 모질고 무섭다고 했던 까닭을 영식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에 절로 입술이 굳어버렸다.
정순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천천히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자, 받으십시오.”
눈앞에 놓인 흰 봉투에 영식의 눈이 잠시 커졌다.
“……이게 뭡니까?”
“우리 도하 사고, 그날 상대 운전자가 서영식 씨였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함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
“그 사실을 지안이가 알게 돼선 절대 안 됩니다.”
“……그, 그게.”
“돈이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드리겠습니다.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당장 알아봐 드리고요. 단, 우리 지안이 앞에 절대, 절대 나타나지 마십시오.”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린 듯 영식은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오래전 그날. 경찰서에서 오열하던 노파는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손자의 것과 바꾸고도 남을 것처럼 괴롭게 울부짖었다.
그때의 그녀라면, 사고 운전자는 물론이고, 운전자의 가족까지 평생 저주하고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한데, 되려 돈까지 주면서 이 사실을 지안이 모르게 해달라고 부탁하다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귓가로 다시금 정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서 받으시고, 제발 우리 지안이 앞에만 나타나지 말아 주십시오.”
주름진 손이 돈 봉투를 가까이 들이미는 순간, 묘한 기시감과 함께 까맣게 잊고 있던 하나의 장면이 그의 눈앞에 피어올랐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착하게 살아. 꿈에라도 지안이 앞에는 나타날 생각 하지 말고.’
3년 전, 어머니 윤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영식은 남몰래 병원을 찾았었다.
수십 년 전 마지막으로 본 중년의 어머니는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노인의 모습이 되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영식은 그때 처음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회한 어린 눈물을 쏟았다.
지안이 태어날 무렵, 꽃뱀에게 속아 전 재산을 탕진한 이후, 어떻게든 만회해보려 더 깊은 무덤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저는 사기꾼에, 전과범이 되어 있었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떠나온 후였다.
윤양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었단 소식을 들어도 절대 찾아와선 안 된다. 넌 지안이 앞에 나타날 자격이 없는 아빠야. 이제 더는 나쁜 짓 그만하고 어디서든 조용히 살아. 그게 네 딸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이게 네 어미 마지막 유언이기도 하고.’
윤양은 어디선가 꼬깃꼬깃 모아둔 쌈짓돈을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이거라도 가지고 새 출발 해. 그게 이 엄마, 마지막 소원이다.’
영식은 그 순간 번갯불에 쏘인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어가는 엄마의 유언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만큼 대단한 꼴통은 못 되었다.
멀쩡한 팔다리를 절단하는 기분으로 그동안 맺어온 어두운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려 했었다.
하지만 범죄자로 낙인찍힌 사람에겐 평범한 일자리도 사치였다. 겨우 어렵게 구한 심부름센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말도 안 되는 사고가 났다.
음주운전에 의한 사고라고 했다.
단언컨대, 영식은 그날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물론 운전을 한 기억도 없었고.
심장에 박힌 어머니의 유언을 기억하는 한 그런 무모한 짓을 또 저지를 리 없었다.
생각에 잠긴 영식의 고막 깊은 곳으로 낯선 벨 소리가 스며들어왔다.
맞은편 정순의 것이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정순의 목청이 순간 높아졌다.
“뭐? 벌써 도착해? 그래 알았네.”
부랴부랴 전화를 끊은 그녀는 명함을 꺼내 영식에게 건네며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단, 제가 드린 부탁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
“지안이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아이를 더는 아프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게 내가 오늘 그쪽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손자며느리를 제 혈육처럼 아끼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 영식은 잠시 말을 잃었다. 핏덩이에 불과한 아이를 두고 떠났던 저보다, 정순이야말로 지안의 진정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게 흔들리는 영식의 눈동자를 묵묵히 바라보던 정순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영식은 멀어지는 노파의 작은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할머님!”
지안은 현관에 들어서는 정순을 발견하고는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지안아!”
열흘 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에 시무룩하던 정순의 안면 위로 오래간만에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지안은 두 팔을 벌려 정순의 아담한 몸을 꼭 감싸 안았다. 정순도 저보다 한 뼘 이상 큰 손주 며느리를 부둥켜안고, 손으로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는 두 여자의 모습에 도하는 픽 입꼬리를 올린 채 흐뭇한 시선을 보냈다.
“할머님, 보고 싶었어요!”
품에 안겨 아이처럼 칭얼대는 지안의 모습에 정순은 심장 한곳이 깨질 듯 아려왔다.
이렇게 속이 여린 아이가 더는 상처받지 말아야 할 텐데.
그 생각에 정순은 순간 눈가가 매워졌다. 그녀가 손등으로 찔끔 눈물을 닦자, 그 모습을 본 도하가 놀리듯 말했다.
“할머니, 손주 며느리 겨우 열흘 못 봤다고 우시는 거예요?”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녀석, 할머니를 놀리긴!”
두 사람의 귀여운 대화에 지안은 싱긋 웃으며 정순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까 현관에 들어서는데, 할머님 표 고추장찌개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는 거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 한국 오면, 할머님 고추장찌개 제일 먼저 먹고 싶었단 거.”
“……우리 지안이 입맛을 내가 모를까. 조금만 느끼한 거 먹어도 고추장찌개부터 찾는 아이인데, 미국에서 얼마나 느끼한 걸 많이 먹었을 거야, 고추장찌개로 씻어줘야지.”
정순의 따듯한 배려에 지안은 먹지 않아도 벌써 배가 불러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역시 착각은 착각일뿐.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거기에 반 공기를 더 먹고 나서야 그녀는 수저를 놓았다.
도하는 평소 용량을 훨씬 초과하는 그녀의 식사량을 보고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 과식한 거 같은데.”
지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뜬하다는 듯 말했다.
“한 공기만 먹는 건, 할머님 표 고추장찌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요.”
도하는 평소보다 들떠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할머니 옆에 돌아온 게 그렇게 좋은가. 나랑 있을 때보다 어째 더 좋아 보이는데.’
바보 같은 질투가 불쑥 고개를 드는 게 왠지 우스워서 그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그녀가 제 곁을 떠나지 못할 중요한 이유가 이렇게 또 하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다행이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도하는 그녀를 제 곁에 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처럼 할머니 찬스를 써서라도.
식사 후, 지안은 샤워를 하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도하는 새우잠을 자는 그녀의 몸 위에 가만히 이불을 덮어주고 말없이 잠든 얼굴을 지켜보았다.
이젠 이 집에 절대 없어선 안 될 존재.
그녀가 머무는 모든 공간이 조명을 켜지 않아도 그녀 자체로 환해졌고, 보일러를 켠 것처럼 따듯한 온기로 가득했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그녀의 고운 숨소리에 도하는 나직이 말을 걸어보았다.
“어디 있다 나타난 거야. 넌.”
심장 새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간지러운 바람을 참지 못하고, 도하는 지안의 이마에 다가가 살포시 입술을 붙였다.
쪼옥.
부드러운 입맞춤 뒤 건넨 나지막한 굿나잇 인사.
“잘자. 서지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