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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지킬 거야 (73/110)


73화. 지킬 거야
2022.08.12.



 
곤히 잠든 지안을 뒤로하고 도하는 잠시 방을 나왔다.

시차 적응 때문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가볍게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면 몸의 긴장이 풀려 잠이 오지 않을까.

나선형으로 된 대리석 계단을 반쯤 내려가던 그의 시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정순이 보였다.

정순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소파 헤드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잠들었다기보다 고민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정순의 감은 두 눈 사이로 고뇌가 잔뜩 어려 있는 게 보였다.


“할머니?”

도하가 나직이 부르자, 정순은 흠칫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돌아봤다.


“왜 안 자고 나왔어. 많이 피곤할 텐데.”

“시차 때문인지 잠이 안 오네요.”

“지안이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어요.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장시간 비행이 익숙지 않으니까.”

“그래.”

도하는 왠지 모르게 근심이 깃들어 보이는 정순의 눈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

정순은 한동안 물끄러미 도하의 얼굴을 눈에 담다가 나직이 말했다.


“잠깐 이 할미랑 이야기 좀 할까?”

도하는 고민의 여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방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원탁으로 된 티 테이블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정순은 긴 침묵을 끊어내듯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도하야.”

“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지안이를 지켜줄 거지?”

“……네?”

“대답하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안이, 우리 지안이를 지켜줄 거지?”

무슨 까닭으로 묻는 말인지 몰라도,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는 목소리가 보통 일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순의 절실한 눈빛을 가만히 눈에 담던 그가 천천히 속삭였다.


“네.”

정순은 도하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안이 부모 이야기는 너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그분들 이야기는 왜……”

정순은 까맣고 단단한 손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오늘 지안이 친부라는 자를 만나고 왔단다.”

“……네?”

도하의 눈이 순간 크게 휘둥그레졌다.


“핏덩이를 버리고 나간 후의 삶이 평탄했을 리 없다는 건 예상했다만, 각종 안 좋은 일에 연루되었더구나.”

“…….”

순간 도하의 머릿속으로 오래전 지안이 하린을 만나고 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 뒷조사를 한 것 같더라고요. 저도 잘 모르는 제 아버지라는 사람의 근황을 얘기해 주더군요. 지금은 죄를 짓고 수감 중인데, 죄목도 다양하다고…….’

하린이 지안의 약점으로 삼아 협박하려 했던 친부라는 존재. 그가 안 좋은 일에 연루되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한데 정순의 얼굴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듯 점점 더 심각하게 근심으로 얼룩져 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정순은 아래로 축 처져 있던 입꼬리를 애써 움직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말을 이으려던 그녀가 순간 목이 멘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골랐다.

도하는 정순의 앞에 물컵을 놓아줬다.

정순은 잠시 목을 축인 후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하야…… 이 할미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네. 말씀하세요.”

정순은 긴 망설임 끝에 다시 말을 시작했다.


“3년 전, 그날 새벽. 네 맞은편에 오던 음주운전 차량. 그 운전자가 바로 지안이 친부였단다.”

“……!”

한껏 커진 도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세상일이라는 게, 사람 인연이라는 게 이리도 모질구나.”

“…….”

정순은 완전히 일그러진 도하의 얼굴을 보고 순간 긴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안을 지켜줄 수 있느냐고 물었던 건, 도하의 확신 어린 고백을 들어야 이 무거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대답만으로 안도하기엔 일렀던 것일까.

본인을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간 사고의 피의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였다니.

본디 그릇이 크고 담대한 도하라도, 이 사실만은 쉽게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의 두 눈이 초점 없이 흔들리고, 한동안 긴 침묵이 방안을 가득 메우자 정순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도하가 아무리 지안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해도, 그날의 사고로 지독한 3년을,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던 당사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이다.

미처 그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단 사실에 그녀가 고심하는 순간, 도하가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절대…… 절대 안 됩니다!”

“…….”

정순의 입가 주변 팔자 주름이 한껏 깊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이해한다. 절대 용서가 안 되겠지. 그 사고로 3년을 그렇게 산송장처럼 살아야 했는데.”

“……아뇨.”

“응?”

“제 아내. 그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아선 절대 안 된다고요.”

“……!”

“바보같이 착한 여자라, 그게 자기 잘못인 줄 알고, 본인이 책임지려 할지 몰라요. 아니 그러고도 남을 거예요. 서지안이라면, 분명.”

정순은 명치 끝에 걸려 있던 숨이 절로 소화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힘든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가장 먼저 지안을 걱정하는 마음.

도하의 생각도 정순과 마찬가지였다.


“후유. 난 또 뭐라고. 지안이를 용서 못 하겠단 말인 줄 알았잖아.”

“애초에 그 사람 잘못이 아닌데 용서를 못 하다뇨.”

“그래. 맞다. 지안이는 아무 잘못 없어. 그 불쌍한 게 무슨 죄니?”

“설령, 그게 다 서지안 잘못이라 해도. 그 사람은 다 갚았어요. 3년을 꼬박 제 옆에서 다 갚았다고요.”

“…….”

“그 정성이 차고 넘쳐서 이제 내가 갚을 차례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그 사람이 다시 힘들어지는 건 절대 못 봐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만으로도 아픈 여자인데, 거기에 더 큰 상처를 덧입히는 건……!”

도하가 괴로운 듯 고개를 떨구자, 정순은 팔을 뻗어 손자의 낮아진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란다. 지안이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우리 선에서 정리하면 어떻겠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서라도 지킬 겁니다. 반드시 그럴 겁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도하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

콜록콜록.

귀국 직후 찾아온 감기로 시체처럼 누워 있던 하린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감기에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벌써 지안을 찾아가 추악한 진실에 대해 다 털어놓고도 남았을 것이다.

네 몸에 흐르는 더러운 피, 그 피를 물려준 자가 권도하를 3년간 의식불명으로 만든 죄인이라고.

그깟 간병 따위, 가증스러운 노력으로 절대 용서받지 못할 엄청난 죄를 지은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 늘 당당하고 의연하기만 하던 서지안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생각을 하면, 하린은 온몸에 생기가 솟아나는 것 같았다.

제 안에 시한폭탄 같은 비밀을 품은 채 언제까지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열이 내리고 겨우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상태가 되자 하린은 다시 마음이 분주해졌다.

낯선 여행지에서 한층 가까워져 돌아온 두 사람은 아마도 지금쯤 포근하고 안락한 휴식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도 과연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린은 입술을 짓씹으며 허공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그때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가열하게 울어댔다.

하린은 맥없이 팔을 휘둘러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서지안 씨가 지금 저택을 나와 근처 백화점 식품코너로 들어갔습니다.

“혼자서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제 번호는 애초에 차단되었을 테고, 도하의 마지막 말처럼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이 되었다면 집으로 찾아가는 것도 무의미했다.

그래서 하린은 지안의 주변에 몰래 사람을 심어두고 틈을 살피는 중이었다.


“백화점 주소 보내세요. 지금 당장 갈 테니.”

-네. 사모님.

“혹시 그 여자가 먼저 가려는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끌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하린의 한쪽 입꼬리가 비딱하게 솟아올랐다.

***

쇼핑 바구니를 든 지안이 채소 판매대 앞을 둘러보고 있었다.

출장 후유증인지 도하는 아침 내내 기운이 없어 보였다. 잠을 한숨도 못 잔 것처럼 눈 밑이 퀭했고, 밥도 몇 숟가락 뜨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혹시 다시 몸 상태가 나빠진 건 아닐까.

지안은 그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려 고민 끝에 백화점을 찾았다.

기력이 없는 도하를 위해 맛있는 저녁을 지어주려는 생각이었다. 손수 차린 밥상이라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그가 조금은 먹어주지 않을까.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신선한 전복과 각종 채소를 잘게 썰어 부드러운 죽을 끓이면, 입맛이 없어도 가볍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재료를 보는 지안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따듯하게 빛났다.

그때 겉옷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살피던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디 간 거야?

숨이 넘어갈 듯 다급한 도하의 목소리에 그녀는 입술을 살짝 안으로 말아 넣었다 풀며 답했다.


“잠깐 장 보러 백화점에 왔어요.”

-뭐? 갑자기 장은 왜? 당신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 아까 보니까 도하 씨가 밥을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제가 죽이라도 끓여주고 싶어서요.”

-……뭐?

“예전에 저 어릴 때, 제가 아프거나 기력 없을 때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죽이 있거든요. 그거 먹고 나면 기운이 번쩍 나서. 도하 씨한테도 한번 맛보여주고 싶었어요.”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뿐인데.

“거짓말 말아요. 제가 도하 씨 전문 간병인인데. 단순히 피곤할 때 얼굴이 아니었어요. 힘이 하나도 없는 게. 이럴 때 잘 먹어줘야 건강에도 무리가 안 간다고요.”

-……어디야. 장 보는 거 도와줄게.

“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도하 씨는 조금 쉬고 있어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요.”

-알았어.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네. 이따 봐요.”

통화를 마친 지안은 잠시 휴대폰을 지그시 바라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주산 유기농 흙 당근 가져가세요! 좋은 땅에서 자라 향도 좋고 신선도도 최상인 제주산 흙당근.”

솔깃한 광고에 그녀의 시선이 절로 주황빛 당근을 향했다.

당근을 스캔하던 지안은 표면이 매끈하고 단단해 보이는 당근 하나를 집으려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잽싸게 날아온 손이 그녀의 손을 툭 쳐낸 후 당근을 가로챘다.

어.

지안은 무조건반사처럼 그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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