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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신파 주인공은 어울리지 않아 (74/110)


74화. 신파 주인공은 어울리지 않아
2022.08.15.



 
세준은 늦은 출근을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잔뜩 굳은 얼굴 위로 무거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회사 일은 물론, 개인적인 일까지 봐주던 노 실장의 부재는 한국 땅에 발을 붙이는 순간 현실이 되어 크게 다가왔다.

D그룹의 갑작스러운 투자 철회와 통째로 말아먹은 미국 박람회 건. 그리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고 달려드는 하린의 무식한 협박까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연일 CTM을 찬양하던 언론도 새로운 딜리버리 강자로 노크맨을 추켜세우기에 바빴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세준은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한시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도하가 깨어난 후로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언젠가 지나치듯 들었던 정순의 목소리가 선연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내 팔십 가까이 살아보니, 결국 모든 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더구나. 그러니, 지금을 마음껏 누리렴. 금세 눈앞에서 다 흩어져버리기 전에.’

다시 두통이 도진 듯 세준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고급 세단 앞으로 바쁘게 다가서던 그의 발아래로 무언가가 빠르게 굴러 왔다.

데구르르.

그의 시선이 발 앞에 굴러든 작은 유리병에 고정되었다.

툭.

세준은 굴러온 병을 구둣발로 찍어내듯 붙잡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천천히 허리를 숙여 주워 올렸다.

시중에서 흔히 살 수 있는 피로 회복제 음료.

가만히 병을 들여다보던 그의 앞으로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터벅.

세준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제 쪽으로 다가오는 존재를 스캔했다.

가까워진 발소리와 함께 남자의 이목구비가 점차 또렷해졌다.


“……!”

누군가를 알아본 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오랜만입니다. 지세준 대표님.”

영식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광활한 주차장 안을 가득 울렸다.


“……!”

세준은 충혈된 눈동자를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초조하게 움직였다.

영식은 그런 세준의 손에 들린 피로 회복제 병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한 병 쭉 들이키시지요.”

“……!”

어디선가 본 듯 기시감이 드는 장면.

세준의 뇌리로 오래된 기억 한 조각이 번뜩 피어올랐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피곤하실 텐데 이거 드시고 하세요.’

영식의 손에 그가 직접 건네주었던 피로 회복제 음료 하나.

무언가를 떠올리던 세준의 안면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제가 보낸 편지는 잘 받으셨습니까?”

영식의 물음에 세준은 표정을 싹 감추며 차갑게 뱉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길을 좀 비켜주시죠.”

“……3년 전, 헬프 119. 끝까지 모르는 척하실 겁니까?”

“……!”

세준이 째진 눈을 파르르 떨며 시선을 피하자, 영식은 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

눈앞의 여자를 알아본 지안의 입꼬리가 가파르게 추락했다.

주황색 당근을 손에 든 하린이 비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눈이 참 높아요. 서지안 씨? 당근 보는 눈도, 남자 보는 눈도.”

조롱 섞인 하린의 미소에 지안은 냉랭한 어투로 답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다시 한번 제 앞에 나타나면 그땐 경찰을 부르겠다고.”

“……어이쿠 무서워라. 이 백화점이 전부 서지안 씨 거라도 돼요? 난 그냥 장 보러 왔다가 그쪽이 보여서 잠깐 온 것뿐인데.”

“민하린 씨랑 저. 지나가다 마주쳐도 아는 척할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잖아요.”

지안의 촌철살인에 하린은 기가 찬 듯 잠시 말을 버벅거렸다.


“뭐, 뭐요?”

지안은 그녀가 밀고 있는 텅 빈 카트 안을 빠르게 스캔한 뒤 말했다.


“무슨 사정으로 남의 동네까지 와서 장을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장 보러 오셨으면 볼일 보세요. 저한테 말 걸지 마시고요.”

“……!”

지안이 쌩하니 돌아서 자리를 뜨자, 하린은 카트를 돌려 지안을 쫓아가며 소리쳤다.


“거기서요!”

“…….”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잰걸음을 옮겼다.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지안은 하린을 겪으며 배웠다.

도하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악에 받친 눈빛을 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런 사람을 일일이 상종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는 걸 지안은 잘 알고 있었다. 가끔은 지금처럼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도.

바쁘게 수산물 코너를 지나 계산대 쪽으로 가던 그녀 앞에, 어디선가 나타난 카트가 사람을 칠 듯 무섭게 돌진해 왔다.


“어!”

지안은 가방에서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긴급전화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1…… 1…….

하린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는 지안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경찰 부를 때 부르더라도, 이 이야긴 듣고 부르지 그래요?”

“…….”

“당신 아버지라는 사람이 도하 씨한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

나란히 두고 싶지 않은 두 존재가 하린의 입에서 함께 거론되자, 지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라는 사람과 권도하.

연결고리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두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나란히 불린 걸까.


“…….”

지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굳게 물었다.

하린이 무슨 악다구니를 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려 했던 다짐이, 그 단단하고 견고하던 마음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이윽고 어울리지 않는 두 이름 때문에 잠시 간과했던 단어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만행.’

분명 그랬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에게 만행을 저질렀다고.

지안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도하의 아내로서 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죠?”

지안이 허공에 대고 차갑게 뱉자, 하린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기서 할 이야긴 아닌 것 같은데요.”

말을 마친 하린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카트를 돌려 출구 쪽으로 향했다.

돌덩이가 가라앉은 듯 무거운 얼굴로 멈춰 있던 지안도 천천히 하린을 뒤따라 나갔다.

***

하린은 엔틱한 디자인의 커피잔을 가볍게 기울였다가 다시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차 들어요.”

“…….”

지안이 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린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지안보다 우위에 선 채 긴장감이 흐르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게 꽤 흥미로웠다. 그래서 되도록 오랫동안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기다림에 지친 지안이 무거운 입술을 떼어 말했다.


“이제 말씀하시죠. 제 아버지라는 사람이 도하 씨한테 저질렀다는 만행이 뭔지.”

지안이 분위기를 깨뜨리자 하린은 버럭 하며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말이 딱 맞네. 그 얘길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도 묻는 게.”

지안은 신경을 긁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사실 그쪽, 민하린 씨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어서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왔지만, 아직도 긴가민가한 게 사실이에요. 정말 그런 일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 가득한 지안의 목소리에 하린은 기가 찬 듯 열을 내며 말했다.


“내가 없는 얘기라도 지어서 할까 봐 걱정이란 소리예요?”

“그게 아니라면…… 어서 말씀하시죠. 시간을 끌면 끌수록 거짓말 같이 느껴지거든요. 지어낼 시간도 충분히 드린 것 같고.”

“……뭐요?”

적반하장으로 지안에게 공격을 당하자 하린은 분개하듯 소리쳤다.


“역시 이래야 살인자 딸이라 할만하지!”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지안의 얼굴은 순간 사색이 되었다.

살인자…….

지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엷게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당신 아버지가 사람을 죽일 뻔했어요. 그것도 앞길 창창한 사람을.”

“……!”

생물학적 아버지 서영식. 핏덩이인 저를 두고 떠나 돌아오지 않은 사람.

얼굴도 목소리도, 온기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을 해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할머니가 이따금 들려주던 일화 속 아버지라는 사람은 모자라고 나약한 존재인 건 확실했지만, 그토록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안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나지막이 되물었다.


“……뭐, 뭐요? 사람을, 사람을 어떻게 해요?”

하린은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지안의 눈동자를 매섭게 노려보며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3년 전 도하 씨 사고, 마주 오던 음주운전 차량 운전자. 그게 당신 아버지 서영식 씨였다고요!”

“…….”

“도하 씨를 그렇게 만든 게 다 당신 혈육이었단 이야길 하는 거예요!”

“……!”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참담한 느낌은 태어나 두 번째 경험하는 감정이었다.

세상 유일한 버팀목이던 할머니 윤양의 임종을 맞던 날.

광활한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과 함께, 이런 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구나 하며 지안은 가슴을 치며 울었었다.

그리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려오고, 명치 끝이 꽉 막힌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한없이 무거운 고개가 절로 아래로 떨어졌다.

하린은 지안의 앞에 웬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세요!”

지안은 금세 흐려진 눈으로 눈앞의 서류를 응시했다.

[교통사고 조사서]

3년 전 사고의 경위가 자세히 나와 있는 서류 속에 눈에 익은 두 이름이 보였다.

지안은 더는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린은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지안 씨는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았겠죠. 3년간 한 남자를 성심성의껏 간병한 끝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룬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로.”

“…….”

“근데 현실은 무서운 범죄자 딸에, 병 주고 약 주듯 제 아버지가 저지른 죗값을 간병으로 조금 갚은 것뿐이니,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

“아무리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라 해도, 이일까지 본인이랑 상관없다고 뻔뻔하게 우길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하 씨가 죽을 뻔한 일인데!”

입술이 마비된 듯, 목소리를 잃은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그 때문에 정순이 얼마나 많은 밤을 숨죽여 울어야 했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이상 어떤 말도 쉽게 뱉을 수가 없었다.

그저 현실이 아니길, 뭔가 잘못된 일이길 바랄 뿐.

하린은 멸시가 깃든 눈빛으로 재촉했다.


“서지안 씨,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당장 도하 씨 곁을 떠나요!”

“…….”

“왜 대답이 없죠?”

지안은 창백해진 얼굴로 잠시 생각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 만큼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이 무너지고 괴로운 와중에도 가장 납득이 되지 않는 건, 하린의 종용이었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아닌 그녀가 이런 식으로 떠날 것을 종용할 자격은 없었다.

지안은 쓴웃음을 삼키며 이성적으로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민하린 씨가 떠나라면 떠나고, 남으라면 남아야 하나요?”

“뭐, 뭐?!”

“제 아버지라는 사람 이야긴 잘 들었어요. 그 일에 관해선 민하린 씨가 아니라 도하 씨, 그리고 제 시할머니와 이야기할 테니, 가족 아닌 남은 빠져 주세요.”

“뭐? 뭐라고! 남? 세상에, 어디 이렇게 양심도 없는 게 있어! 제 부모가 도하 씨를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분에 겨워 악을 쓴 하린이 목이 탄 듯 물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커다란 손이 그녀보다 재빠르게 물잔을 낚아챘다.

놀란 하린이 눈썹을 위로 높이 치켜든 순간, 차디찬 냉수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주르르르륵.


“아, 차가워!”

하린의 비명 사이로 심장을 묵직하게 내려찍는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민하린! 너야말로 양심이 남아 있거든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도, 도하 씨!”

도하는 쇠도 녹일 듯 강력한 눈빛으로 하린을 쏘아보고 있었다.


“영혼까지 질근질근 밟아 던져버리기 전에. 당장!”

“……도, 도하 씨! 지, 지금 뭘 알기나 하고 그래? 이 여자, 이 여자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러냐고! 도하 씨 그날 사고, 상대 운전자가.”

“그게 다 사실이라고 해도 이 여자 안 버려. 다시 3년을 시체처럼 누워 있게 된대도 이 여자는 절대 안 버릴 거라고!”

“……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게 사실도 아니고!”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사, 사실이 아니라니!”

“그날 서영식 씨, 그분은 운전한 적이 없어!”

“……뭐?”

“궁금하면 네 약혼자한테 물어봐. 그날 새벽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하는 지안의 손을 와락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안 어울리는 신파 영화 주인공 놀이는 그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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