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진실을 밝혀주시오
(75/110)
75화. 진실을 밝혀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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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진실을 밝혀주시오
2022.08.19.
지안의 가늘고 하얀 손목을 잡아챈 도하의 손등 위로 짐승 같은 힘줄이 솟아났다.
지안은 도하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온몸의 피가 한곳에 쏠린 듯 그의 손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작은 손을 쥐고 흔드는 홧홧한 열기에 잠시 정신이 아뜩해지는 걸 느꼈다.
탈수기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머릿속이 제멋대로 뒤엉켜 복잡했다.
3년 전, 도하의 불행한 사고에 제 혈육인 영식이 끼어 있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었다.
도하가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했는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겨운 세월을 보냈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생물학적 부모일 뿐, 저와 아무 상관 없는 존재라고 가슴에서 지워버렸지만, 이상하게 도하의 일에는 쉽게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지안은 무슨 이유로도 도하가 저 때문에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그녀에게 도하는 남편이자, 사랑하는 남자이기 이전에 간병인으로서 끝까지 책임져야 할 환자였다.
그가 아픈 건, 저로 인해 티끌만 한 상처라도 생기는 건, 그녀의 가슴에도 치명상을 남기는 일이었다.
양심이 있다면 떠나라는 하린의 말에, 흔들리는 이성을 겨우 붙잡고 태연한 척 대꾸했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심장은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있었다.
조금 전 겪은 악몽 같은 순간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가자, 지안은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그때 도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가 나타나 벼랑 끝의 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예외가 생기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
도하에 관련한, 그에 관한 나쁜 소식에 그녀는 너무도 쉽게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푹 꺼지는 듯 지안이 가늘게 어깨를 떨자, 도하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괜찮아?”
“…….”
지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그와 눈을 맞췄다.
혼란스러움이 가득 고인 눈망울을 말없이 바라보던 도하가 나직이 말했다.
“겁먹지 마. 아무 일도 아니니까.”
도하는 앞으로 바짝 다가가 커다란 품 안에 그녀의 작은 어깨를 꼭 가뒀다.
손만큼이나 뜨거운 가슴. 언 마음을 녹일 듯 따뜻한 체온, 목덜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익숙한 향기에 놀란 가슴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지안은 그의 커다란 품에 안긴 채 나직이 속삭였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거죠?”
그의 손에 붙들려 카페를 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쉽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나타나 한 말이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선의의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응.”
고조 없이 단단한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설령, 그게 다 사실이었다고 해도 변할 건 없어.”
그 말을 하며 도하는 맞닿은 두 갈비뼈가 으스러질 듯 그녀를 온 힘으로 끌어안았다.
여린 숨을 힘겹게 내쉬는 그녀의 작은 떨림을 느끼며, 도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혼자 장을 보러 간 그녀가 걱정되어 집을 나서던 그의 앞에 나타난 한 사람.
그의 얼굴이 별안간 떠올랐다.
***
한 시간 전.
한 통의 연락을 받은 도하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아내가 안 보인다니!”
-사모님께서 금방 장을 보고 나올 테니, 차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셔서, 전화를 걸어 봤는데 받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이상해서 곧장 식품관으로 뛰어갔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백화점 CCTV부터 확인하고 계세요. 주변도 샅샅이 찾아보시고요!”
-네.
도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순에게 3년 전 사고의 진상에 대해 들은 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저를 그렇게 만든 게 지안의 친부라는 사실보다, 지안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제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더 미치게 하였다.
이미 벌어진 지난 일은 그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와 함께 숨 쉴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란히 두 손을 잡고 걸어 나갈 남은 모든 시간만이 중요했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와 느낀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것인지였다.
지난 일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하지만 그녀가 3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의 행복마저 위태로워질 게 분명했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책임지려 했을 것이다. 바보처럼 스스로 떠나는 길을 택해서라도.
지안은 도하가 아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런 여자이기에 가망 없는 남자의 곁을 3년씩이나 지킨 것일 테지만.
상대에게 티끌만큼의 상처도, 피해도 주고 싶지 않은 사람. 그게 지안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도하는 절대 이 사실을 그녀가 알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얘기에 심장이 미친 듯 두방망이질 쳐댔다.
비밀을 아는 누군가가 나타나 지안을 흔들어 놓은 건 아닐까.
벌써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그녀가 소리 없이 사라진 건 아닐까.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
차를 세워둔 곳을 향해 미친 듯 내달리던 도하의 앞으로, 새까만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
도하는 말없이 제 앞에 선 한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까맣고 야윈 얼굴 위로 그가 잘 아는 누군가의 얼굴이 설핏 보였다.
마주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말하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지안의 친부, 영식을 알아본 도하의 눈가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영식은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을 열어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미안하오.”
“…….”
도하는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영식을 가만히 응시하다 나직이 답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그의 냉랭한 반응을 족히 예상했다는 듯 영식은 태연한 표정을 짓다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
놀란 도하의 눈이 금이 간 유리알처럼 빠르게 흔들렸다.
“미안하오. 이제 와 이렇게 나타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소. 아비 자격도 없는 못난 인간이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알지만, 더는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 순 없어 찾아왔다오.”
“…….”
“3년 전 사고. 그때 그 차에 타고 있었던 건 맞지만, 난 결코 운전한 적이 없소.”
바닥에 주저앉은 영식의 어깨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식은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서럽게 말했다.
“돌아가신 울 어머니 유언이, 지안이 앞에 절대 나타나지 말라는 거였소. 그 아이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숨어 조용히 살라는 거였는데. 내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라지만, 어머니 마지막 그 유언만은 지키고 싶었소.”
“……”
“사고가 난 그날 새벽에 나는 섬으로 가던 길이었소. 첫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일정이라 서둘러 출발했는데. 그때 나는 일을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새벽잠도 많아서 동행한 직원이 운전대를 잡았소. 대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운전을 하기로 했었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도하의 눈에 투명한 빛이 일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조수석에서 잠시 눈을 붙인 게 다인데…… 깨어나 보니, 눈앞은 사고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나는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에 앉아 있었소.”
도하의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리자, 영식은 분주히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든 소리라는 거 잘 알지만,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건 그깟 해명을 하려는 게 아니오.”
잠잠히 듣고 있던 도하가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영식은 먼 허공을 보며 깊어진 눈으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 차에 오르기 전, 일을 의뢰한 남자가 우리 사무실에 잠깐 들렀었소. 웬 젊은 남자였는데, 수고하라면서 피로 회복제 하나를 건네주더이다.”
“…….”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차에 타서 그걸 마시고는 곧장 잠이 들어버렸소. 그러곤 아무 기억이…….”
“……!”
“그래, 이것도 전부 다 내 착각일 수 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말씀하십시오.”
“그자를, 그날 나한테 피로 회복제를 준 그 사람을 교도소에서 다시 본 거요. 정확히는 교도소 TV에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알고 보니 대단한 청년 사업가더군요. 우리나라를 배달 강국으로 만들었다나 뭐라나.”
도하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영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떠오르는 얼굴이, 입가에 맴도는 이름이 있었다.
설마……!
“근데 그 청년 사업가 소식과 함께 다른 사람의 사연이 나오는 거요.”
“…….”
“같은 사업에 먼저 뛰어든 젊은 대표가 교통사고로 수년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라고. 그 빈자리를 후발주자가 치고 들어가 역전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
“뉴스 속 그 후발주자란 사업가가 그날 새벽, 내게 피로 회복제를 건넨 의뢰인이었소. 내가 치었다는 사고 피해자는 그 사업을 먼저 시작했다는 젊은 대표, 바로 권도하 씨였고.”
“……어, 어떻게 그, 그런……!”
이글거리는 도하의 까만 눈동자 속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영식의 모습이 비쳤다.
“그 뉴스를 보고 알아버렸소. 그날 사고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걸.”
“…….!”
도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참을 수 없는 숨을 씨근댔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지안이가 권도하 대표의 아내가 되었단 얘길 듣고선,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오.”
“…….”
“해준 것도 없는 아비인데, 딸의 앞날까지 막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때 그 사고에 감춰진 진실만은 밝히고 죽자는 각오로 이렇게 찾아온 거요.”
도하는 영식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진심 어린 눈동자에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다른 건 걱정하지 마시오. 이 일만 해결되면 나는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니.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어머니 마지막 유언은 꼭 지키고 싶소.”
“…….”
“다만 그날 사고, 그 일에 감춰진 진실만은 반드시 밝혀 주시오. 나는 힘도 없고 지은 죄만 많은 죄인인지라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권도하 씨, 그쪽은 다르지 않소.”
“……!”
“부디, 진실을 밝혀 주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엾고 불쌍한 그 아이, 지안이를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