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3년 전, 그날 새벽
(76/110)
76화. 3년 전, 그날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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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3년 전, 그날 새벽
2022.08.22.
“마음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어요.”
당황한 비서가 하린을 끝까지 막아보려 쫓아왔지만, 하린은 거침없이 돌진했다.
“이거 놔!”
힘껏 비서를 밀쳐낸 그녀는 사정없이 대표실 문을 잡아당겼다.
쾅.
문밖에서 들려오는 실랑이에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세준이 하린을 보곤 흠칫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민하린, 네가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야?”
하린은 거친 숨을 씨근대며 세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3년 전, 권도하 사고! 그날 새벽에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고!”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세준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하린은 성마른 목소리로 추궁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날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
세준이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하자, 하린은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걸 직감했다.
가슴 속에서 쉬이 누를 수 없는 불길이 끓어올랐다.
지안의 친부가 3년 전 도하를 친 운전자였다는 기막힌 정보는 천 년의 사랑도 깨뜨릴 만큼 확실한 정보였다.
1억 원을 줘도 아깝지 않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불청객이 껴 있을 줄이야.
“1억이나 들여 겨우 얻은 정보인데, 그거 하나면 완벽히 갈라놓을 수 있었는데!”
하린이 혼잣말을 뇌까리자 세준이 나직이 물었다.
“1억? 1억을 들이다니?”
“두 사람 떼어내는 일! 세준 씨가 못 하니까 나라도 해야지. 안 그래?”
“설마 내가 보낸 위자료를 거기다 쓴 거야?”
“그래! 꼭 필요한 정보였으니까. 권도하를 그렇게 만든 상대 운전자가 서지안 친부였어! 그 정보를 내 손에 넣었다고.”
“……뭐? 우, 운전자가 누구 친부라고?”
“서지안! 분수도 모르고 권도하 옆에 기생하는 서지안!”
“……!”
세준은 두통이 몰려온 듯 손으로 한쪽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에 흙탕물이 튄 듯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 만난 남루한 차림의 중년 사내. 피로 회복제를 돌려주던 그가 지안의 친부였다니.
그제야 남자가 비장하게 뱉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지세준 대표님께서 끝까지 저를 외면하신다면, 저도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못난 전과자에 하찮은 인간이라지만, 저도 아비입니다. 내 딸을 위해, 그 아이 앞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겁니다.’
난데없이 딸을 위한다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저를 끝까지 쏘아보던 남자의 집요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쁘고 신경 쓰였던 그 눈빛, 기어코 저를 나락에 떨어뜨리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던 눈빛.
그 눈빛의 영향력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
하린은 멍한 눈길로 허공을 보는 세준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빨리 말해! 대체 그날 무슨 짓을 한 건지.”
세준은 한참을 침묵하다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잘못 알고 온 모양인데. 난 모르는 일이야.”
“뭐? 지금 나한테까지 발뺌할 작정이야? 도하 씨가 그러던데. 세준 씨한테 그날 일에 대해 직접 물어보라고!”
“……!”
순간 세준의 눈가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뭐? 도, 도하가?”
가진 거라곤 전과 경력뿐인 영식이 진실을 얘기한다 한들, 믿어줄 사람 없는 범죄자의 푸념에 불과할 거다.
하지만 도하가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건 문제가 달랐다.
돈과 힘 그리고 진실을 밝혀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와 의지가 있는 도하라면, 언제라도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터였다.
세준은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다시며 초조함에 손을 버벅거렸다.
하린은 굼뜬 세준의 모습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세준 씨! 빨리 말 안 할 거야!”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위태로운 눈동자가 그녀를 한번 매섭게 쏘아보곤, 데스크 바로 앞 크리스털 명패에 고정되었다.
하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지세준!”
그 순간 세준도 크리스털로 된 명패를 집어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아악!”
“꺼져. 그만 지껄이고!”
“뭐? 당신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내가 보낸 돈으로 멍청하게 내 목을 조는 일 따윈 그만두고 당장 꺼지라고!”
“지세준!”
“끌려나가기 싫음 네 발로 걸어 나가!”
하린은 제 발아래에 산재한 유리 조각을 쏘아보다 신경질적으로 돌아 나갔다.
그녀가 나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준은 창백해진 얼굴로 쫓기듯 수화기를 들었다.
***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일식집 VIP룸에서 두 남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둔 휴대폰이 가열하게 울자, 노 실장은 휴대폰 화면을 지그시 응시했다.
한참을 보던 노 실장은 살짝 고개를 숙여 맞은 편 남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편하게 받으십시오.”
남자의 말에 노 실장은 절제된 미소를 지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노 실장, 납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지금 당장 회사로 오세요! 지금 당장!
극도로 불안해 보이는 세준의 목소리에 노 실장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 들었다.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군요. 이만 끊겠습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로 모르는 사람 대하듯 뱉자, 수화기 너머에서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니라고요! 도하…… 도하가 3년 전 사고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 같아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노 실장! 내 말 듣고 있어요? 권도하가 다 알게 됐다니까!
높낮이가 일정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준 이야기에 노 실장의 안면이 순간 경직됐다.
노 실장은 굳게 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서영식, 그 사람이 얼마 전 출소했어요. 그자가 도하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고요. 이러다가,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간 그날 일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노 실장! 아군끼리 이렇게 척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요!
-…….
“노 실장님이 여기 오는 게 불편하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어딥니까 지금! 어딘지만 알려 주세요!”
한참을 침묵하던 노 실장은 비장한 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미팅 중이라 먼저 끊겠습니다.
“아니, 노 실장! 노 실장님!”
휴대폰 스피커를 울리는 세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노 실장은 사늘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렸다. 그러곤 비즈니스용 미소를 엷게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을까요?”
“재작년 CTM 물류센터에서 사망한 40대 가장 이야기까지 하셨습니다만…….”
노 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시간 뒤.
일식당을 나온 노 실장은 대기하고 있던 세단에 몸을 실었다.
헤드레스트에 잠시 고개를 기대어 눈을 감자, 아까 전 수화기 너머 세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도하…… 도하가 3년 전 사고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 같아요!’
‘서영식, 그 사람이 출소했어요. 그자가 도하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고요. 이러다가, 이렇게 있다간 그날 일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때였다.
끼이익.
운전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자, 노 실장의 감긴 두 눈에 질끈 힘이 들어갔다.
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노 실장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람이 뛰어나오는 바람에.”
“…….”
노 실장의 귀에는 그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끼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되살아난 오래된 기억이 그의 뇌리에 가득 차올랐다.
***
먹장을 갈아 부은 듯 유난히 하늘이 시커멓던 어느 새벽.
그 흔한 CCTV 하나 없는 서울 외곽의 외진 도롯가에 달달 거리는 용달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안에는 두 남자가 타고 있었다.
검정 모자를 깊이 눌러쓴 노 실장은 운전대를 잡은 채 옆자리에 시체처럼 곯아떨어진 영식을 살폈다.
그의 옆으로 술과 수면제를 섞은 피로 회복제 병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긴장감이 가득한 차 안, 노 실장은 출발 전 세준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번 일, 이번 일만 잘 마치면 다 해결되는 겁니다. 노 실장님 손과 발에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노 실장은 그의 말을 되뇌며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 찬 가슴을 다스렸다.
세준이 미리 빼낸 정보에 의하면 새벽 배송 시운행 기간, 직접 현장에 나온 도하가 몇 분 후 이 경로를 지나갈 예정이었다.
1분이 1년 같이 느껴지는 그 순간, 뇌리로 그동안의 일이 빠르게 스쳐 갔다.
푸릇푸릇하던 20대 시절부터 영혼을 바쳐 일해온 케이원 그룹에서 내쳐진 건 하루아침의 일이었다.
악덕한 상사의 농간으로 불명예스러운 성 추문에 얽혀 해고를 당한 그는 매일같이 케이원 그룹 앞에서 피켓시위를 했었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어린 딸과 난소암으로 사경을 헤매는 아내를 생각하면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땐 청춘을 바친 케이원 그룹 말고는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개 사원의 억울함은 끝내 높은 곳에 닿지 않았다. 절망하던 그의 앞에 나타나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건 세준이었다.
제 억울함을 몰라준 케이원 그룹에 대한 분노와 가장으로서의 막막함 앞에서 그는 판단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저만치 앞에서 눈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기다렸던 차가 다가오자, 노 실장은 거침없이 액셀을 밟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미리 수백 번 시뮬레이션한 대로 영식을 운전석에 옮겨놓은 후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날의 사고로 케이원 그룹의 후계자는 긴 시간 의식불명이 되었고, 세준은 그의 계획대로 승승장구했다.
세준은 약속대로 CTM의 지분과 돈을 챙겨 주며 그를 특별히 대우해주는 듯했다. 처음엔 분명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무시하고, 가끔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기도 했다.
‘요샌 사춘기가 빨리 온다던데, 노 실장님 따님도 이제 사춘기가 올 때죠?’
‘…….’
‘그런 시기에 아빠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영영 아빠를 안 본다고 돌아설지도 모르죠. 워낙 예민할 때니까. 하하.’
‘그게…… 무슨 뜻입니까?’
‘노 실장님, 제가 노 실장님 노고를 높이 사 대우를 해드리는 거지, 제 머리 꼭대기 위에 서 있으라고 대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본인 처지를 제대로 직시하시라고요!’
노 실장은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천천히 눈을 떴다.
세준을 오랜 기간 옆에서 지켜본 그는 누구보다 세준의 뇌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쯤 모든 죄를 저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거라는 것도.
노 실장은 씩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는 안 될 거야. 그날 운전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지세준 당신이 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