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몰락의 시작 (77/110)


77화. 몰락의 시작
202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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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정말, 정말 도하 씨를 찾아왔었다고요?”

지안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도하를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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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날 새벽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그래서 당신을 지켜주라고 부탁하셨어.”

낮지만 묵직한 도하의 음성에 지안은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교차했다.

제 혈육이 도하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는 안도감, 저를 버리고 간 아버지에게도 부정(父情)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지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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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말을 어떻게 믿겠어요.”

28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라는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이 아닐까.

지안이 불신 어린 목소리를 내자, 도하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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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건 이제부터 밝혀낼 테지만, 적어도 그 말을 할 때 그분 눈빛은 진심 같았어.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고 싶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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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요? 어머니라면…… 우리 할머니, 유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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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지안의 투명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아는 한 할머니 윤양과 영식은 왕래가 전혀 없었다. 영식은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온 적이 없었고,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은 천하의 불효자였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윤양의 유언을 들을 수 있었을까.

지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엷게 저었다. 그때 도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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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찾아갔다고 하시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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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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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 마지막 유언이, 당신 앞에 절대 나타나지 말고 조용히 살라는 거였대.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말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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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안의 동공이 다시 한번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고 잊힌 듯 가슴 한편에 걸려 있던 오래된 장면 하나가 눈앞에 번뜩 피어올랐다.

병실에서 맞이했던 어느 평범한 저녁.

윤양은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한 얼굴로 까만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이 잠시 다른 일을 보는 사이, 어디선가 끅끅 구슬프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양이 울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아파서 우는 거냐고 물어도 그녀는 대답 없이 지안의 손을 붙잡은 채 한동안 흐느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윤양은 세상을 떠났다.

지안은 이따금 그날 밤 일이 떠오를 때면, 가슴 한편이 쓸쓸해지고 아려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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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때.”

그날 밤 윤양이 흘린 눈물의 의미가 혹시, 아들에게 가슴 아픈 마지막 부탁을 남길 수밖에 없는 엄마의 눈물이었을까.

불쌍한 손녀를 위해, 아들과 손녀의 천륜을 직접 끊어야 했던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하자, 목구멍 끝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그날, 윤양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날이 영식이 몰래 다녀갔다는 그날일지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저려왔다.

저만 몰랐던 감춰진 이야기에 지안은 잠시 입술을 꾹 물었다.

원래도 작은 어깨가 작게 움츠러들자, 도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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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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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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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고 힘든 건 내가 다 할 테니까, 당신은 한걸음 뒤에서 그냥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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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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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밝혀낼게. 나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까맣고 단단해 보이는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믿음직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지안은 그의 눈동자에 적힌 따듯한 위로를 헤아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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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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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새로 온 비서실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세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서재 소파 테이블 위로 빈 술병과 마시다 만 양주가 뒤엉켜 널브러져 있었다.

도하가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180도 달라진 노 실장의 태도에 불안해진 세준은 밤새 술로 긴장을 다스렸다. 그러다 보니 소파에 앉은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세준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잠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김 실장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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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이것부터 확인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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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준은 미간을 한껏 좁힌 채, 신경질적으로 그가 내민 태블릿을 쏘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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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뭡니까, 이 꼭두새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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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건이라, 신속히 입장표명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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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뭔데 호들갑이야!”

세준은 빽 소리치며 거칠게 태블릿을 가로챘다.

태블릿 화면에 뜬 기사를 읽어내리던 그의 눈동자가 파도치듯 일렁였다.

충혈된 눈이 무서운 빛을 띠고 있었다.

[괴물 기업 CTM의 실체, ‘노동자는 부품일 뿐’ 지세준 대표 음성녹음 파일 유출]

[대한민국을 딜리버리 왕국으로 성장시킨 CTM의 민낯이 드러났다. 한 동영상 재생 사이트에 업로드 된 5분가량의 파일에 CTM 지세준 대표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공개돼 공분을 사고 있다.

공개된 음성 파일 속에는 물류창고에서 발생한 노동자 과로사 건에 대해 보고를 받던 지 대표가 ‘노동자는 부품이다’ ‘부품이 고장 났으면 새 걸로 바꾸면 그만이다’ ‘부품 하나 고장 났다고 공장 문을 닫아야겠느냐’ 며 호통을 치는 내용이 담겼다.

사람을 부속품 취급하는 경영인의 몰상식한 언행이 공개되자, 네티즌들은 CTM 탈퇴와 불매 운동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있는 상황.

CTM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는 한 네티즌은 ‘터질 게 터졌다. 이번 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예고했고, 다른 한 네티즌은 ‘CTM 물류센터에서 알바한 적 있는데, 건물 내에 화장실 자체가 없음. 이곳저곳 많이 다녀봤지만 CTM처럼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곳은 태어나 처음 봤음’, ‘나 아는 친구 아버지 거기서 일하다 쓰러져서 아직도 중환자실에서 못 깨어나고 있음. 근데 회사에서는 나 몰라라 발뺌하고 있다고 들음. 그때부터 CTM은 쳐다보지도 않음’ 등의 댓글로 CTM의 만행을 꼬집고 있다.

대한민국 스타트업의 성공 신화이자, 초고속 성장을 이룬 CTM의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 감춰진 민낯은 이제 막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빠름’을 강조하며 몸집을 불려 온 CTM이 얼마나 빠르게 본 모습을 드러낼지 대한민국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기사를 모두 읽어내린 세준은 짐승처럼 숨을 쉭쉭거리며 같은 페이지에 올라온 동영상 파일을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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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부품 하나 고장 난 것까지 대표가 알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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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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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보상? 부실한 부속품 따위한테 일자리를 준 것만도 어딘데. 일하다가 저 혼자 고꾸라진 걸 왜 회사 탓을 하고 난리야.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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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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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XX, XXXX. 고장 난 부품은 잘 뽑아서 안 보이는 데 잘 폐기처리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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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표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준은 파일을 차마 끝까지 듣지 못하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제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등줄기에 서늘한 전기가 퍼졌다.

저도 모르게 실수로 누른 뒤로 가기 버튼에, 포털사이트 뉴스 페이지가 열렸다. 화면 위로 한 페이지 가득 ‘CTM’과 ‘지세준’이라는 이름이 도배된 게 보였다.

[속도 지상주의 사회가 만든 속도 괴물, CTM의 몰락!]

[CTM, 투자 철회 선언했던 D그룹, 이번 사태 미리 알고 있었나]

[CTM, 지세준 대표는 누구인가?]

[나락 길 예약 ‘치타맨’ VS 꽃길 예약 ‘노크맨’]

세준은 손을 파르르 떨다가, 어느 순간 태블릿을 꾹 움켜쥐어서는 허공으로 거침없이 내동댕이쳤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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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놀란 김 실장의 목소리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발악하는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세준은 눈앞에 보이는 술병과 모든 집기를 거칠게 쓸어버리고, 손에 잡히는 족족 내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포효하듯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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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광기 어린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 속에 그려지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다.

……노 실장. 노형근!

공개된 음성 파일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물류센터 직원 과로사에 대한 보고를 받던 자리에 노 실장도 함께였다.

늘 저보다 더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 음흉한 분위기를 풍기던 노형근 실장.

어제 잠깐의 통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하가 3년 전 사고에 대해 뭔가 알아차렸다는 말에도, 노 실장의 음성에선 일말의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제 손으로 차를 몰아 도하를 치고도 그렇게 떳떳하다는 건…….

순간 불길한 기운이 그의 정수리 끝에서 발끝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세준은 허공에 눈을 부라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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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여론이 최악일 때, 그날 운전마저 내가 한 것으로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겠지.’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

도하는 세단 뒷좌석에 올라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어제 일로 마음이 어수선한 지안을 억지로 하루 쉬게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때 귀에 들릴 듯 말 듯 작게 틀어놓은 카 오디오에서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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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식입니다. 대한민국 딜리버리 사업의 선도주자인…….]

‘딜리버리 사업’이라는 말에 그의 촉각이 즉각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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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기사님, 볼륨 좀 키워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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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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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M의 지세준 대표로 추정되는 남성의 폭언과 욕설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됐습니다. 녹음 파일 속 남성은 CTM 물류센터에서 과로로 사망한 40대 직원을 ‘고장 난 부품’이라고 칭하며, 잘 안 보이는 곳에 폐기하라는 등의 비인간적인 폭언을 이어나갔습니다. 이에 대해, CTM은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뉴스를 듣던 도하의 눈매가 크게 일그러졌다.

3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나 세준이 딜리버리 사업을 성공시켰다는 뉴스를 봤을 때, 이미 예견한 일이었다.

케이원에서 함께 사업을 준비하던 시절에도, 세준은 배달 사업의 본질이 ‘속도’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었다.

눈에 보이는 사업 아이템은 쉽게 훔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절대 훔칠 수 없다는 걸 미처 몰랐을 거다.

도하는 깊어진 눈으로 창밖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가 탄 세단이 지하주차장에 들어서 멈춰 서자, 도하는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VIP 전용 출입구로 걸음을 옮기던 그의 뒤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도하가 가만히 몸을 돌리자, 누군가가 그를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도하는 눈에 힘을 주어 낯선 남자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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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권도하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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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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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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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도하가 멈칫 생각에 잠기자, 형근은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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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M 창업 초기부터 지세준 대표님과 함께 일해 온 전 비서실장입니다.”

형근의 말에 도하의 동공이 순간 커졌다. 도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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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대표 비서실장님께서는 저는 무슨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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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대표님께서 꼭 아셔야 할 게 있어서, 급한 마음에 불쑥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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