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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일어나십시오! (80/110)


80화. 일어나십시오!
2022.09.05.



 


“아무 감정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응어리진 마음이 있었는지. 그분 보는 순간 가슴이 찌릿하면서 아픈 거예요.”

조수석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지안을 보는 도하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해요.”

한결 편안해진 지안의 얼굴에 도하도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했어, 서지안. 정말 힘든 일을 한 거야.”

그의 말을 음미하듯 가만히 듣고 있던 지안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칭찬받으니까 좋다.”

“뭐?”

“내가 칭찬에 약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

“도하 씨 칭찬받으니까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고. 뭐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대단한 사람 맞는데.”

“……네?”

“당신, 두 사람을 살린 거야.”

“……두 사람이요?”

도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사람은 바로 당신 옆에 있는 잘생긴 남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비로소 딸에게 용서받게 된 한 아버지.”

“……!”

“그분 인생은 오늘부로 크게 바뀔 거야. 딸에게 용서받은 아버지는 세상 무서울 게 없을 거거든. 당신이 그분한테 새 삶을 준거나 마찬가지야.”

“……완전한 용서는 아니었어요. 아프단 이야기 들어도 못 들은 척한다고 매정하게 선 긋는 용서가 어디 있겠어요.”

“그거 선 그은 거 아니잖아. 아프지 말라는 걱정이지.”

“……!”

“자길 버린 아버지를 도리어 걱정해주는 마음. 당신 그 따뜻한 마음이 그분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되었을 거야.”

“……!”

도하의 말에 지안의 가슴에도 한줄기 따사로운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의 입술이 들려주는 서지안이라는 사람은 굉장히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엄마 아빠도 없이 할머니와 살아온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아이. 그 편견이 싫어 애써 더 당당한 척, 야무진 척 견뎌온 시간.

하지만 한 남자 앞에서만은 가만히 있어도, 있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도하는 한 손을 가만히 뻗어 지안의 희고 여린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고마워.”

지안은 살짝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도하의 옆얼굴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뭐가요?”

“다시 살게 해줘서.”

그의 솔직한 고백이 왠지 모르게 쑥스럽고 간지러워서 지안은 딴청을 피우듯 말했다.


“……그 이야긴 또 왜.”

“당신 보면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들어. 이렇게 좋은 사람, 이렇게 예쁜 사람 모르고 갔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어.”

“…….”

“그날의 사고, 3년이라는 긴 의식불명의 시간. 그 모든 게 당신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해야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거라면, 난 고민 없이 똑같은 사고를 당할 거라고.”

“안 돼요!”

지안이 눈썹 사이를 좁히며 격하게 고개를 젓자, 도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내가 간병인 힘들 걸 생각 못 했네.”

“아뇨. 나 힘든 건 상관없는데, 가장 힘든 건 기다리는 우리가 아니라, 도하 씨 자신이잖아요. 안 돼요.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도하 씨가 힘들어지는 건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서, 붙잡은 손끝에 번지는 작은 떨림조차 사랑스러워서 도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달리는 차 안이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세상에서 가장 뜨겁게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동차 엔진보다 더 가열하게 요동치는 심장이 버거울 정도로 힘찼다.

살아있다는 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게 이토록 벅찰 수 없었다.

힘겹게 달려 도착한 집 앞.

먼저 차에서 내린 도하는 얼른 옆으로 가 조수석 차 문을 열어주었다.

지안이 말간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도하가 지안의 손을 잡아 대문 앞에 섰을 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던 도하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

참새떼의 지저귐처럼 맑고 청량한 소리가 차 안까지 들려왔다.

세준은 창문을 반쯤 내려 하교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빠르게 스캔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키가 큰 아빠를 닮아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소녀가 교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세준은 잽싸게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노윤서?”

젖살이 통통한 소녀가 세준을 쓱 올려다보곤 아는 얼굴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세준은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곤 눈높이를 맞춰 인사했다.


“그래. 아저씨 알아보겠니?”

“네. 우리 아빠 친구. 아니 사장 아저씨잖아요.”

전에 함께 식사했던 세준을 윤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윤서. 전보다 키가 더 큰 거 같은데?”

세준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윤서는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 반 여자애들 중에서 키 1등이에요. 남자애들까지 다 합치면 3등이고요.”

“그래. 아빠 닮았으면 쭉쭉 더 클 거야.”

그 말을 하며 씨익 웃는 세준의 모습은 영락없는 조카 바보였다.

하지만 아래로 비스듬히 내린 고개, 그 아래로 보이는 눈빛은 아이의 순수함과는 정반대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세준은 아이를 안심시키듯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아빠가 바빠서 아저씨 보고 윤서를 픽업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

“……아빠가요?”

윤서가 눈썹을 높이 추켜들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준은 조급함에 아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가자. 아빠 기다리시겠다.”

윤서는 세준의 손에 이끌려 엉겁결에 차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조수석에 오른 세준은 쓱 고개를 돌려 윤서를 확인했다.


“아빠가 그런 이야기 안 했는데…….”

윤서가 혼잣말로 웅얼대자, 세준의 미간 사이가 급격히 좁아졌다.

세준은 애써 침착하게 내뱉었다.


“아빠가 바쁘셔서 깜빡하셨나 보다.”

세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윤서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아빠한테 전화해봐야겠다.”

작은 아이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미처 생각 못 했던 세준은 당황한 듯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아이가 커다래진 눈으로 멀뚱히 보자, 세준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 윤서야. 아저씨 잠깐 휴대폰 좀 빌려줄래? 아저씨가 급하게 오는 바람에 회사에 전화기를 두고 왔지 뭐야.”

윤서는 잠시 골똘해진 눈으로 세준을 응시하다 천천히 휴대폰을 건넸다.

휴대폰을 받은 세준은 잽싸게 전원 종료 버튼을 누르고 룸미러 속 아이를 매섭게 쏘아봤다.

천진난만하게 창밖을 응시하는 아이의 눈이 졸린 듯 조금씩 무거워지는 게 보였다.

***

지이잉.

짧은 진동음과 함께 휴대폰이 울렸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노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메시지함을 누르자 웬 사진 하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낯선 자동차 뒷좌석에 잠들어 있는 딸 윤서의 얼굴이었다.


“……유, 윤서, 윤서야!”

노 실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스피커에선 윤서의 목소리 대신 차가운 ARS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미친 듯 요동치다가 다시 휴대폰 화면에 고정되었다. 사진 파일 아래 또 하나의 메시지가 보였다.

[딸을 만나고 싶다면, 조용히 오는 편이 좋을 거야.
경기도 XX시 XX읍 산91-1.]

처음 보는 낯선 주소를 읽어내리는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낯선 차에 탄 채 잠들어 있는 딸의 모습. 그리고 도착한 의문의 주소.

불길한 상상이 노 실장의 머릿속을 금세 잠식시켜 버렸다.

머릿속을 죄다 뒤져봐도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일 자는 딱 한 사람뿐이었다.

지세준.

노 실장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핸들을 거세게 가격했다.

쾅.

그러곤 거칠게 차를 돌려 미친 듯 액셀을 밟았다. 신호도 모두 무시한 채 무작정 속력을 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잠든 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오로지 윤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

얼마나 지났을까.

사고 없이 멀쩡히 도착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곳은 웬 폐공장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족히 수년은 되어 보이는 폐공장은 영화에서 악당들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그런 장소 같았다.

다릿심이 모두 빠진 노 실장은 애써 걸음을 재촉해 공장 쪽으로 달려갔다.

굳게 닫힌 문을 천천히 잡아 밀자 녹슨 문에서 끼익, 소름 끼치는 소음이 들려왔다.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문이 열리자 희뿌연 먼지 바람이 훅 불어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그가 천천히 눈을 뜨자, 비로소 아무도 없는 텅 빈 공장 안이 보였다.


“유, 윤서. 윤서야!”

노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만이 텅 빈 공간 안을 맴돌다 소리 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 뒤에서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잽싸게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노 실장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뛰어갔을 땐, 이미 전부 닫힌 후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세준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노 실장은 다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입니다. 노 실장님?”

“지세준!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우리 윤서! 우리 윤서는 지금 어딨어!”

“꼴에 아비라고, 딸 걱정을 하는 겁니까? 당신 딸은 집에 잘 데려다줬어요. 어른 싸움에 아이가 끼면 피곤해지니까. 하하.”

“진짜야? 우리 윤서! 집에 있는 거 맞냐고!”

“속고만 사셨나. 그리고 이제 딸 걱정보다, 본인 걱정을 더 하셔야 할 텐데.”

“뭐?”

“기사 잘 봤습니다. 우리 CTM과의 소중한 인연을, 내가 베푼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으실 줄이야.”

“……!”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너무 많은 걸 아는 사람이 갈 곳은 딱 하나뿐이지.”

“……뭐?”

“저세상으로 가서 영원히 입을 다무는 거야. 노 실장!”

“그,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지세준! 지세준.”

뚝.

휴대폰에서는 더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어디선가 고막을 찌르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펑!

동시에 시뻘건 불꽃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노실장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저를 둘러싼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이 든 듯 나갈 길을 찾아 내달렸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굳게 닫힌 문뿐이었다.

그때 다시금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콜록콜록.

매캐한 연기와 점점 더 커져가는 화염 속에서 흐릿하게 휴대폰에 뜬 이름이 보였다.

[윤서]

노 실장은 힘겹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빠, 왜 전화했어? 나 영어학원 왔어. -윤서-]

윤서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잠시, 독한 연기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노 실장은 사력을 다해 문쪽을 향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거짓말처럼 열리며 누군가가 번개처럼 달려 들어왔다.

의식을 잃기 일보 직전. 모든 것이 어둠에 잠식되려던 절체절명의 순간, 문을 열고 나타난 누군가가 노 실장의 팔을 거세게 잡아챘다.


“정신 차리십시오!”

“…….”

반쯤 감겨 흐릿해진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궈, 권 대표?”

“벌을 받더라도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모든 진실을 밝히고, 그에 마땅한 벌을 받으십시오!”

도하는 무섭게 번지는 불길 속에서 거침없이 노 실장을 끌고 문밖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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