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영원히 잠든 것처럼 (84/110)


84화. 영원히 잠든 것처럼
2022.09.19.


16635962871707.jpg

 
띠띠띠띠-.

일정하던 심박 수 모니터에 이상 변화가 일었다.

얼마 후 송장처럼 잠들어 있던 남자의 한쪽 검지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가느다란 떨림은 점점 더 굵은 움직임으로 바뀌어 갔다.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련하듯 잘게 떨리던 눈꺼풀이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벌어졌다.

한동안 굳게 닫혀 있어, 경직된 눈 근육 때문인지 눈꺼풀이 바벨처럼 무거웠다.

사투를 벌이듯 격렬한 저항감을 이겨내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눈 부신 빛이 시야를 한꺼번에 공격해 왔다.

16635962871714.png

“흡!”

거친 숨이 산소마스크 속에 하얗게 갇혔다 흩어지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체할 수 없는 두통과 벼락을 맞은 듯 눈앞이 번쩍이며 치밀어오는 현기증.

온몸에 전기가 통한 듯 예민해진 촉각에 잠시 정신이 없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격렬한 기상의 신호.

깨어났다는 건, 조금 전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것의 방증이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난 게 아닌 것 같다는 건, 육체에서 오는 각종 신호가 알려주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긴 잠을 잔 것인가.

멍한 머릿속으로 그 생각이 스쳐 가기 무섭게, 금세 기능을 되찾은 청신경이 TV 소리 가운데 익숙한 이름을 건져 올렸다.

16635962871721.jpg

[지세준 대표가 빨리 깨어나 조사를 받아야 할 텐데요.]

지. 세. 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둔탁한 뭔가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맞아. 지세준이 내 이름이야.

빛의 공격에 제법 익숙해진 두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잠시 멈춰 있던 사고체계가 삐그덕 대며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 실장의 배신과 자수로 경찰 수배에 놓였던 위기 상황.

이 모든 불행의 화살을 다름 아닌 도하에게로 돌렸었다.

불행을 똑같이 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달려간 도하의 저택 앞.

세준이 노리던 건 권도하가 아니었다.

이미 3년이라는 시간을 고장 난 채 지낸 불량품보다는 그가 현재 가장 아끼는 작은 여자가 복수의 대상으로는 더 적합했다.

때마침 지안이 등장하자, 그는 광기 어린 힘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때려 밟았다.

분노에 눈이 뒤집혀 돌진하던 그때,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그때, 반대편에서 미친 듯 달려오는 역주행 차량을 발견했다.

달려오던 스포츠카의 빛깔이 붉은색이었던 건지, 아니면 제 시야를 덮은 핏자국 때문에 색을 착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쾅, 하는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붉은색이 시야를 온통 뒤덮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짧은 순간 동안, 잠들기 직전에 벌어진 모든 기억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사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아직 세상의 관심이 이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하가 그랬듯 지금이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제법 흐릿해졌을 것이다.

부디 관심이 사그라질 만큼 시간이 흐른 뒤라면 좋으련만.

잠시 가졌던 바람은 이어 들려온 TV 소리에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16635962871721.jpg

[네. 지세준 대표는 현재 2주째 의식이 돌아오고 있지 않은 상황인데, 그렇다고 속단하긴 아직 이릅니다. 사고 당시 뇌출혈 수술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요. 같은 수술을 받아도 환자마다 경과가 다르기 때문에, 2주 아니라 한 달. 길게는 몇 년 만에 깨어나는 사례도 많습니다.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상황인 것 같습니다.]

겨우 2주. 고작 2주간 잠들어 있었단 말인가!

허탈한 숨이 픽 새어 나왔다.

권도하는 자그마치 3년을 잠들어 있었다. 고작 이런 것조차 권도하를 따라갈 수 없다니.

부러운 녀석. 천하의 운 좋은 녀석.

질끈.

두개골 전체가 흔들리는 강한 통증과 함께 깨어나기 직전 꾼 꿈이 떠올랐다.

세준은 어두운 미로 속을 하염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 미로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이 있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그 미로를 헤매고 또 헤맸던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지옥식 행군 훈련인가 생각할 즈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고 많은 문 중 하나를 열어 들어가면 이 미로를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개중에 가장 크고 빛이 나는 문 하나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이 병실 안이었다.

차라리 문을 열지 말걸.

좀 더 미로를 헤매며 시간을 벌었어야 했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았는데, 아니, 지옥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였다.

TV 뉴스에서는 아직 뜨겁게 제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고, 제 건강상태에 관심을 두는 걸 보니, 어쩌면 그날의 사고에 관한 관심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일지 몰랐다.

자신이 깨어났다는 게 알려지면 경찰이고, 언론이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무서운, 가장 두려운 대상은 따로 있었다.

권도하.

과묵하고 냉소적인 듯 보이나 그 심장 안에 누구보다 뜨거운 것을 안고 사는 녀석.

그런 녀석의 소중한 것을 헤치려 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지옥을 피하려 돌아온 곳이 다름 아닌 지옥 그 자체였다니!

막다른 길에 몰린 듯 막막한 순간, 절묘한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이 순간,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만 입을 다문다면, 눈감고 소리 없이 잠든 척 있다면 시간은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모두의 관심이 식어갈 즈음, 이 문제가 더는 대중의 구미를 당기는 소재가 아닐 즈음 조용히 일어나 이곳을 떠나리라.

사망한 것으로 위장한 뒤, 조용히 사라져 시골 변두리에서 정착하거나 먼 외국으로 밀항하는 것 같은 방안들이 금세 떠올랐다.

그러려면 우선은 잠자코 의식이 없는 사람 행세를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많아진 생각을 분주히 소화하던 그때, 병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달깍.

세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감았다.

***

경찰서 정문을 걸어 나오는 도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냉담했다.

하린의 조사를 맡은 수사관의 호출에 급히 달려온 길.

수사에 진척이 있다는 말에,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한 일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하린이 혐의를 인정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는 제 귀를 의심할 만큼 믿기 힘든 소리였다.

16635962871734.png

‘뭐라고요? 민하린이 지세준에게 협박을 받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요?’

16635962871721.jpg

‘네. 요새 말로 뭐라더라. 가스라이팅이랑 데이트 폭력을 엄청나게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나온 신체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도하가 아는 하린은 누군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거나, 데이트 폭력을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그녀를 직접 겪어 본 까닭에 그것만은 재고의 여지 없이 장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런 거짓 증언을 한 것인지, 그 얕은수가 너무도 훤히 보였다.

지안을 향해 돌진하는 블랙박스 영상이 나온 이상, 자신이 고의적으로 사람을 치려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혐의를 벗을 수 없음을 깨닫고, 차선책을 택한 것이리라.

자신의 자율의지가 아니라 세준의 협박과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세준에게 꾸준한 가스라이팅과 폭력을 당해온 저 또한 감춰진 피해자였다고.

그럼 동정여론이 형성될 것이고, 형량을 깎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하는 게 분명했다.

도하는 그 야비한 수작에 눈감아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래전 그녀가 사촌 동생인 제이슨을 배신했던 것처럼.

사고로 의식을 잃고 잠든 저를 버리고 세준과 도망간 것처럼.

하린은 자신이 살기 위해 이번엔 세준을 배신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굴 배신하고, 이용하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다만, 마땅히 받아야 할 죗값을 조금이라도 감형되게 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낼 것이다.

도하의 까만 눈동자 위로 서슬 퍼런빛이 감돌았다.

***

환자복을 갈아입히던 간병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6635962871721.jpg

“이상하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지.”

의식 없는 사람의 몸을 억지로 움직여 옷을 갈아입힌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그 일이 수월하게 느껴졌다.

마치 환자의 협조를 받고 있는 것처럼.

간병인은 세준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매의 눈으로 살핀 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16635962871721.jpg

“그새 내 기운이 세진 모양이지. 의식도 없는 사람이 옷 갈아입는 걸 어떻게 알고 몸을 들겠어.”

간병인의 혼잣말에 세준은 조금 전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팔에 힘을 주거나, 몸을 미세하게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깨어났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그런 사소한 것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

그 생각을 하는데 옷을 마저 입히던 간병인의 손길이 유독 거칠고 매웠다.

살을 덥석 잡아당겨 꼬집듯 비틀어서는 억지로 옷에 집어넣었다.

세준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비명이 나올 뻔한 걸 겨우 꾹 참았다.

16635962871714.png

‘누가 이런 아줌마를 내 간병인으로 들인 거야!’

화가 불끈 솟구쳤지만, 의식 없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16635962871714.png

‘권도하는 이런 대접 받지 않았겠지. 서지안의 간병을 받았으니.’

도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고 보니, 같은 상황에서도 완벽히 다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제 운명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간병인은 세준이 의식이 없다는 것에 방심한 듯 큰 소리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16635962871721.jpg

“어휴 무거워. 어휴. 쓸데없이 덩치만 소같이 커서는. 덩칫값 하나 못하고 나쁜 짓만 골라 한 주제에. 어이구. 내 팔자야. 이런 화상 똥오줌이나 치우고 사는 내 팔자가 불쌍하다 불쌍해!”

세준은 욱, 하는 마음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언젠가 이 모든 연기를 끝내고 일어나는 날이 오면, 이 아줌마! 이 몹쓸 간병인부터 혼쭐을 내주리라.

16635962891022.png

 
그러다 뭔가 이상한 촉감에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랫도리가 휑한 느낌이 홑겹의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느낌이었다.

조금 전 투박하던 손길에 제 아래를 거칠게 닦아내는 이 느낌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알 수 없는 수치심이 온몸을 지배했다.

간병인이 기저귀를 갈고 폐기물을 처리하려 병실을 나간 사이, 세준은 겨우 참았던 분노 밴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16635962871714.png

‘이 꼴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앞으로 몇 년은 더 버텨야 한다는 거지.’

머리가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깨질 것 같았다.

그때 문밖에서 낯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성질 나쁜 간병인이 방금 나갔다 들어오면서 노크할 리는 없을 테고.

의사 회진도 좀 전에 마쳤는데.

그럼 누구일까.

세준은 당장이라도 눈을 떠 출입문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눈을 슬며시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