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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진짜 감옥 (85/110)


85화. 진짜 감옥
2022.09.23.



 
똑똑.

간호사 복장의 한 여자가 1인 병실 앞에서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지이이잉.

그때 주머니에서 긴 진동이 울렸다.

여자는 부리나케 휴대폰을 꺼내 귀에 가져갔다.

천장 조명이 휴대폰을 든 손을 비추는 순간, 무언가가 화려하게 번쩍였다. 기다란 손톱에 박힌 네일용 큐빅 장식.

간호사 유니폼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손톱 위로 전화를 받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응. 지금 병실 앞에 도착했어.”

여자는 긴장한 듯 언 목소리를 꾹 눌러 전화를 받았다.


“그래. 마치고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여자는 다시 한번 병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 없자, 여자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스르륵, 병실 문이 열리자 그 안의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의식 없이 잠든 남자 말고는 아무도 없는 병실 안.

그곳을 빠르게 스캔한 여자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딸깍.

여자는 긴장으로 얼룩진 눈빛으로 세준이 잠들어 있는 침대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핏줄이 선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천천히 준비해온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낮게 속삭였다.


“조금 따끔할 거야. 금방 끝내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잠든 세준의 눈썹 사이가 순간 움찔거렸다.


“어.”

세준의 반응에 놀란 여자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실감이 났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을 뿐, 아직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의 생명을 끊어버리라는 지령.

악마의 유혹처럼 잔인하지만 차마 물리칠 수 없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이 살아났다.


‘언니, 지세준, 그 사람만 조용히 사라지게 해주면, 내가 언니 네일 숍 문 닫지 않게 해줄게. 언니 남편 몰래 비트코인으로 날린 돈도 다 해결해줄 거고.’

‘……뭐?’

‘어차피 가망 없는 사람이잖아. 더 살고 덜 살고 따윈 의미 없다고. 그러다 괜히 누구처럼 깨어나기라도 하면!’

‘그, 그렇게 되면?’

‘난 완전히 끝나. 그럼 언니도 끝나는 거야. 언니 네일 숍에 투자한 사람들 언니보고 한 게 아니잖아. 내 이름 팔아서 투자받은 거 까먹었어?’

‘……!’

‘지세준만 조용히 보내고, 난 가스라이팅에 데이트 폭력, 스토킹 당한 불쌍한 이미지로 동정여론 형성하면 언니 사업에도 아무 지장 없을 거야!’

‘저, 정말 그럴까?’

‘그럼! 언니. 언니 네일 숍 차리기 전에 간호학원도 잠깐 다녔었다며. 그럼 주사 놓는 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사야 뭐…….’

똑딱똑딱.

적막한 병실을 울리는 시계침 소리에 여자는 잠시 겁먹은 듯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눈을 한번 질끈 감은 뒤 떴다.

그러곤 입술을 꾹 문 채로 다시 침대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다 당신을 위한 길이야. 어차피 지금 깨어나 봤자, 지옥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며, 주사기 마개를 제거했다.

숱한 주삿바늘 자국으로 멍이 든 팔을 가만히 잡자,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

아냐. 기분 탓일 거야. 의식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알고 힘을 주겠어.

여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여자는 불규칙한 숨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뾰족한 주삿바늘 끝을 살갗을 향해 가져갔다.

바늘 끝이 여린 살 끝을 물컥 뚫고 들어가려던 그때!

무언가가 홱 날아와 그녀의 손을 물리쳤다.

탁!

단숨에 둥글게 휜 주삿바늘이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갔다.


“어!”

여자는 놀라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주삿바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세준을 본 여자는 귀신을 본 듯 놀라 나자빠졌다.


“어, 어떻게!”

주삿바늘보다 날카로운 눈빛의 세준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민하린이 단골이라는 그 네일 숍 대표 맞지?”

“……!”

“민하린! 민하린이군! 이딴 일을 꾸민 게.”

“……자,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세준은 가소롭다는 듯 광기 어린 눈빛으로 여자를 쏘아보다가, 제 팔에 꽂혀 있던 링거 줄을 모두 거칠게 제거해버렸다.

그러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2주라는 시간 동안 그새 근육이 빠졌는지 다릿심이 없었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 벽을 짚고 발을 떼던 그때, 저만치에 접힌 채 놓여 있는 휠체어를 발견했다.

세준은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사람을 죽이려던 잔인한 살인자의 손으로 네일아트를 한다? 고객들이 알면 소름 끼칠 일 아닌가?”

“……아니에요. 저는 죽일 생각이 없었어요. 전 단지!”

천천히 허리를 숙인 세준은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를 잡아채며 말했다.


“죽일 생각 아니었다? 그럼 한번 확인해 볼까.”

핏발 선 눈으로 주사기를 매섭게 들어 올려 다가가자, 여자는 잔뜩 겁먹은 듯 울부짖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하린이가, 하린이가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그래서. 흑흑.”

세준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랬겠어. 다 민하린 그 교활한 여자 때문이지.”

세준이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말하자, 여자는 젖은 눈동자를 크게 떠 세준을 응시했다.

세준은 여자를 향해 허리를 숙여 앉으며 속삭였다.


“나를 도와주면 오늘 일은 용서해 주지.”

“……네?”

“내가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

“……!”

 

***

폐기물을 처리하고 오던 간병인이 병실에 다다르기 직전, 병실 문이 홱 열렸다.


“깜짝이야!”

간병인이 놀란 듯 거친 숨을 몰아쉬자, 여자는 세준이 말한 간병인의 인상착의를 빠르게 확인한 뒤 말했다.


“지세준 환자 간병인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간병인분이 자리를 비우신 사이, 환자한테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가 일어나 지금 긴급 치료 중입니다.”

“바, 발작이요? 아니. 갑자기 왜.”

“긴급 상황이니, 간병인분 출입이 제한되는 상황입니다. 보호자 휴게실 가셔서 쉬고 계시면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간병인은 일면식 없는 간호사와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가 조금 이상했지만, 근무 시간에 주어진 뜻밖의 휴식이 반가운 듯 얼른 발길을 돌렸다.

세준의 주문대로 처리한 여자는 짧은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휠체어에 탄 세준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마스크와 털모자를 착용한 상태였다.

여자는 긴장감이 밴 얼굴로 휠체어를 밀어 병실 밖으로 나갔다.

여자의 얼굴이 조금 창백하다 뿐,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환자와 보호자의 모습이었다.

큰 어려움 없이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 복도 끝에 다다르자, 여자는 휠체어를 멈췄다.

그러곤 낮게 속삭였다.


“여기 잠시 대기하고 있으세요. 제가 차를 빼서 올 테니까요. 검은 세단이 이 앞에 멈추면 휠체어를 버리고 바로 올라타시면 돼요.”

“그래.”

여자는 그대로 자동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지하주차장에 들어선 여자의 입술 끝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에 가담하게 된 것일까.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세준을 처리해 달라는 하린의 말에 넘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감행하려 했던 것도, 죄 많은 세준을 병원에서 탈출하게 돕고 있는 지금 이 상황도 모두 끔찍했다.

세준을 저대로 두고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그가 남긴 한마디가 명치 끝에 걸렸다.


‘민하린한테 들었는데, 당신 딸이 하나 있다며? 딸이 알게 되면 어떨까? 엄마가 끔찍한 살인 미수범이라는 사실을.’

그 말을 할 때 세준의 눈빛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벼랑 끝에 매달린 그는 못 할 게 없어 보였다.

낭떠러지 끝으로 떨어질 때도 결코 혼자 떨어질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도망친다면, 끝은 안 봐도 뻔했다.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얼른 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차오를 대로 차오른 긴장감과 불안감을 건드린 건 방심하고 있던 진동음이었다.

지이이잉.

우렁찬 진동음에 여자는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액정 화면에 익숙한 대포폰 번호가 뜨자, 여자는 떨리는 손을 옮겨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하린아.”

-언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일은?

“어. 그. 그게.”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냐. 아무 일 없었어. 지세준은 잘 처리했어.”

-정말? 정말이야?

“그, 그럼.”

전화를 받는 여자의 눈길이 저만큼 먼 곳의 어두운 실루엣을 향해 있었다.


-수고했어, 언니. 난 또 통화가 안 되길래 무슨 일 있나 했지.

“일은 무슨. 어 하린아, 나 아직 병원 주차장 못 빠져나가서 이따 다시 통화하자.”

-그래 언니. 고마워.

전화를 끊은 여자가 낮고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자가 까만 세단 운전석 쪽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팔을 단숨에 잡아챘다.


“어!”

 

***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세준은 극도로 밀려오는 초조함에 손가락을 폈다 말아쥐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이 보이는 음침한 복도 한구석.

주차장 어딘가로 사라진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날 이대로 두고 도망친 건 아니겠지? 아니. 그 겁 많은 여자가 딸 이야기를 듣고도 그럴 리 없지.’

차를 가져온다던 여자가 나타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준의 미간 주름은 깊어져 갔다.

의심이 불안한 확신이 되어가던 찰나, 그 모든 불안감이 단숨에 해소되었다.

빵빵.

눈앞에 나타난 까만 세단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세준은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려 살피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힘껏 땅을 딛고 일어섰다.

벽을 잡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자, 조금씩 걷는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차 앞.

다시 한번 사방을 살핀 뒤, 부리나케 차 위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올라탄 세준은 정체를 감추려는 듯 몸을 완전히 숙인 채 웅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소리쳤다.


“왜 이렇게 늑장을 부려! 그러다가 누가 봤으면 어쩔 뻔했냐고!”

“…….”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세준은 고개를 들어 화를 낼까 싶었지만 참았다.

병원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거듭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 지나 구부정한 자세에 허리와 목에서 통증이 왔다.


“이쯤이면 병원 근처는 벗어났겠지?”

“…….”

여전히 여자가 침묵하자, 세준은 무언의 시위라고 확신했다.

차에 탄 지 10분 만에 세준은 버럭 소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아까부터 왜 대답이 없는 거야!”

“…….”

증오 섞인 날카로운 눈빛이 운전석에 내리꽂히는 순간이었다.

운전석에 여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본 세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너, 네, 네가 어떻게!”

“15년 우정의 친구 녀석이 의식불명이라는데, 친구로서 병문안 정도는 와봐야 사람이지. 안 그래?”

“권도하!”

“어때? 몸의 감옥에 갇혀본 소감이.”

“……!”

“아, 2주면 아직 제대로 된 경험을 못 했으려나.”

“……뭐?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쉬워할 필요 없어. 이제 몸의 감옥이 아니라, 진짜 감옥에 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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