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남편
(88/110)
88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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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남편
2022.10.03.
“도하 씨?”
“……!”
청아한 목소리에 도하는 비로소 깊은 생각 속에서 헤어나왔다.
서지안이라는 여자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많이 멀었나 보다.
배달 근로자 복지 부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그녀의 가슴에, 부서 이동의 꿈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태어나 처음 가져보는 꿈이라는데…… 차마 그 꿈을 막을 수도 없고.
도하는 인생의 난제를 만난 듯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다.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
그 일이 지안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일인지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손길과 보살핌을 가장 오랜 시간 직접 느껴본 수혜자이기에.
하지만…….
도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녀를 그 어디에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가까운 곳에 그녀를 두고 보고 싶을 때 보고,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있다면.
건강을 핑계 대기에도 넘치도록 회복되어버린 체력과 컨디션을 감출 수 없었다.
도하가 아무런 표정 없이 굳은 얼굴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지안은 살짝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뗐다.
“죄송해요.”
지안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도하의 눈썹이 산 모양으로 높이 올라갔다.
“……죄송하다니.”
지안은 잠시 아랫입술을 꾹 말아 넣었다 풀며 말했다.
“제가 주제넘었다는 거 알아요. 이렇게 대표님 비서실에 들어온 것도 낙하산이나 다름없는데. 다른 부서에 마음대로 옮겨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드리고.”
“……뭐?”
“취준생들 사이에서 케이원 그룹이 얼마나 들어오기 힘든 회사인지 저도 잘 알아요. 자격도 없는 주제에 운이 좋아서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도.”
그게 아닌데.
그녀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저 다른 욕심은 정말 없어요. 정직원이 아니어도 상관없고요.”
“…….”
“인턴직이어도 좋아요. 그저, 정식 팀이 꾸려지기 전까지만이라도 복지팀에서 일하면 안 될까요?”
“서지안.”
“배달 사고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저도 이게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이나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심지 굳은 그녀의 눈빛을 본 도하는 더는 사사로운 욕심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념 아닌 체념을 한 그가 지안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그래. 당신은 분명 잘 해낼 거야.”
“……도하 씨!”
“그리고 서지안은 자격이 없지 않아.”
“……네?”
“지난 3년간 누구보다 치열하게 증명해냈으니까. 어떤 취준생도 당신처럼 그렇게 해내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 절대 낙하산이라고 생각하지 마.”
“……!”
도하의 말에 지안은 무거웠던 마음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뿐인가. 당신, 필라델피아에서도 노아를 구했잖아. 당신처럼 순발력 있고, 성실한 글로벌 간병 인재가 우리 복지팀에 와 준다는 것 자체가…… 우리 케이원 그룹의 행운이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해요.”
까만 눈동자에 별을 박은 듯 지안의 두 눈이 총총 빛났다.
하지만 얼굴 가득 생기가 번진 지안과 달리, 도하의 얼굴은 빛을 잃은 듯 많이 어두웠다.
도하는 깊고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제 케이원 그룹 대표의 복지는 누가 신경 써주나.”
“……네?”
지안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도하를 응시했다.
“힘든 회사 일에 유일한 낙이, 당신 얼굴 보는 거였는데. 그게 내가 이 회사에 바라는 유일한 복지였는데. 이렇게 떠나보내야 한다니.”
세상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인한 남자가, 세상 연약한 아이처럼 푸념을 늘어놓자 지안은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하 씨. 누가 들으면 제가 어디 멀리 떠나는 줄 알겠어요.”
“농담 아니야. 정말 막막하다고.”
진심이었다. 별거 아닌 부서 이동일 뿐인데, 도하가 체감하기엔 이역만리로 그녀를 떠나보내는 심정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분리불안 같은 증세랄까.
도하는 사뭇 시간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의식이 있는 시간에도, 없는 시간에도, 그녀는 지난 몇 해, 늘 그의 곁에 있었다.
그 많은 시간이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를 서지안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가여운 영혼이 되게 만들어버렸는지 모른다.
도하의 막막한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지안이 나직이 말했다.
“저는 잠시 파견 나가는 것뿐이에요. 제가 1순위로 돌봐야 할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도하 씨니까요.”
목소리가 예뻤고, 그 예쁜 목소리로 담아낸 다정한 말이 예뻤다.
내내 침울하게 기울어져 있던 도하의 입꼬리가 금세 높이 올라갔다.
지안은 흔쾌히(?)는 아니지만, 어렵게 부서 이동을 허락해준 도하를 위해 서툰 너스레를 떨었다.
“한 번 간병인은 영원한 간병인이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지안이 어색하게 거수경례 흉내를 내자, 도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사람을, 이런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랑스러운 사람의 꿈을 어떻게 지지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
도하가 엷게 웃자, 지안도 말갛게 따라 웃었다.
지안의 투명한 눈동자와 말간 웃음을 보며 도하는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영원히 그녀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서지안이 무서운 건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게 이토록 무서운 건지.
도하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듯 엷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
사내 복지팀에서 오랜 기간 경력을 쌓은 심재영 부장을 필두로 배달 근로자 전담 복지팀이 꾸려진 지 일주일 째.
아직은 인력 채용 기간이라 부서에는 재영과 지안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엔 조금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지안은 금세 어색함을 기회로 바꾸는 지혜를 발휘했다.
지안에게는 이 시간이 복지 업무에 통달한 재영에게 다이렉트로 업무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
지안은 재영이 한 시도 쉬지 못하게 업무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재영은 어린 후배의 열정이 살짝 부담스러우면서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회 초년생 때의 자신이 생각나 성심껏 답변해 주었다.
열정적인 후배와 노련하고 연륜 있는 선배.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복지팀은 제법 앞날을 기대케 했다.
분주히 노트북을 두드리던 지안이 재영을 향해 말했다.
“부장님, 협력 병원 재활센터의 예약 가능일 업데이트한 파일 보내드렸고요. 사고 후 아직 쉬고 계시는 근로자분들에게, 사고 후 심리상담 서비스 관련 안내 메일도 모두 발송했습니다.”
“뭐, 그걸 벌써 다 했다고?”
“네.”
“지안 씨 또 야근했구나!”
“야근까지는 아니고요. 어제 조금 늦게 들어갔어요.”
“쉬엄쉬엄하라니까. 안 되겠다! 지안 씨, 오늘은 나 퇴근할 때 같이 짐 싸도록 해.”
재영은 열정은 기본이고, 노력과 빠릿빠릿함까지 갖춘 지안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두 여자의 시선이 곧장 그쪽을 향했다.
“네.”
재영이 들어오라는 듯 대답하자, 이윽고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훤칠한 실루엣의 남자가 두 손 가득 무겁게 뭔가를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한눈에 도하를 알아본 지안이 잠시 벙쪄 있는 사이, 재영이 먼저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대, 대표님!”
지안도 엉겁결에 재영을 따라 일어나 도하를 향해 묵례했다.
“안녕하세요. 대, 대표님.”
지안이 어색한 인사를 건네자, 도하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그가 원형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종이백을 내려두며 말했다.
“신생 부서라 처리할 업무가 많죠?”
“아, 아닙니다.”
재영이 손사래를 치자, 도하는 원형 테이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두 분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단 소문을 듣고 점심을 사 왔습니다.”
“어머.”
놀란 재영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지안을 향해 눈썹을 높이 추켜들었다.
지안도 당황한 듯 버벅거리며 말했다.
“저희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서요.”
“네?”
지안이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히자, 도하는 종이백에서 포장해온 초밥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늘 같이 점심을 먹던 동료가 부서 이동을 하는 바람에, 나도 혼자 밥을 먹게 생겼거든요.”
도하의 볼멘소리에 지안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도하 씨, 원래 이렇게 뒤끝이 긴 남자였어요?
도하는 지안의 심란한 표정을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뭐 합니까. 어서 들지 않고.”
얼떨결에 마련된 대표와 두 직원의 단출한 오찬 회동.
지안은 초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도하가 혹시 무슨 돌발 발언을 할까 염려되었고, 재영이 혹시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채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다행히 아직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지안이 잠시 방심한 사이, 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 비서 아니, 서지안 씨 어떻습니까. 새 부서 업무는?”
“……네? 아직 초반이라 모르는 게 많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게 배우고 있습니다.”
지안의 말에 도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일이 재밌어도 쉬엄쉬엄하세요.”
“……네?”
“다른 이들의 복지만 신경 쓰느라 정작 자신이 복지를 신경 쓰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해서요.”
도하의 말에 재영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습니다. 대표님. 지안 씨가 벌써 야근을 자주 하는데. 저도 그게 걱정이었거든요. 복지팀이 원활하게 잘 굴러가려면, 담당 직원의 복지부터 잘 보장되어야 하는 법인데.”
재영의 말에 도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안 되겠군요. 복지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야간 근무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내가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하죠.”
도하의 말에 지안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부서 이동 일주일 만에 야근 금지 명령이라니!
아직 배울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지안이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입술을 뗐다.
“저기요. 대표님!”
“서지안 씨. 회사보다 중요한 건 직원 한 사람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직원이 행복해야, 직원의 가족들도 행복해지고, 세상도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그 말을 하는 도하의 눈동자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빛이 감돌았다.
그 눈빛을 보자, 지안은 밥알이 목구멍에 걸린 듯 사레들린 기침을 뱉었다.
컥, 컥. 콜록콜록.
“어머, 지안 씨 괜찮아?”
“네. 괜찮…… 콜록콜록.”
“안 되겠다. 내가 물 가져올게.”
재영이 급하게 자리를 뜨자, 지안은 벌겋게 익은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도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도하는 기다렸다는 듯 불퉁한 어투로 쏟아냈다.
“내 아내가 매일 밤 11시에 녹초가 돼 귀가해선 곧장 쓰러져 잠들어. 그러곤 아침 7시에 쥐도 새도 모르게 출근해버리지. 얼굴 보기도 힘들고, 같이 밥 한 끼 먹기도 힘들다고.”
“도하 씨, 그건…….”
“대표로서의 복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신 남편으로서 아내 얼굴을 보고, 아내와 눈을 마주 보며 밥 먹을 시간 정도는 주라고! 복지전문가 서지안!”
“……!”
“안 그러면 매일 이렇게 찾아올 거야.”
“도하 씨, 그건 좀!”
“그럼 어떡하나. 바쁜 아내가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