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데이트할래요?
(8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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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데이트할래요?
2022.10.07.
한바탕 정신없이 지나간 점심시간.
지안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도하가 불퉁하게 던지고 간 말들이 자꾸만 귓가를 어지럽혔다.
‘대표로서의 복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신 남편으로서 아내 얼굴을 보고, 아내와 눈을 마주 보며 밥 먹을 시간 정도는 주라고! 복지전문가 서지안!’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아 있었고, 가슴 절절한 토로가 서려 있었다.
어떡하지. 많이 서운했나 본데.
뒤늦게 그가 걱정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 떨리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단 생각에, 일 말고 다른 건 저도 모르게 등한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절대 등한시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 포함돼 있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 남편 권도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난 3년간 도하를 간병했기에 지안은 그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했었다.
그의 몸이 보이는 미세한 신체 신호를 누구보다 민감하고 예리하게 알아차리고, 어떤 경우에도 잘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마음에 스며든 냉랭한 기운은 대체 어떻게 녹여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사무실을 빠져나가던 도하의 눈동자에 가득하던 서운함.
시쳇말로 단단히 삐쳐버린 그를 어떻게 해야 풀어줄 수 있을지 몰랐다.
지안이 낮고 무거운 숨을 조용히 내쉬던 그때, 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 씨?”
“……어. 네?”
“뭐야. 지안 씨도 딴생각을 할 때가 다 있네? 계속 불렀는데 못 듣고.”
“어머. 여러 번 부르셨어요?”
“응. 별 건 아니고.”
“말씀하세요. 부장님.”
“아까 대표님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다?”
“네?”
“지안 씨의 복지가 보장되어야, 지안 씨 가족들도 행복해지고, 그래야 세상도 행복해지고.”
“……아.”
“지안 씨는 남편이 뭐라고 안 해? 요새 너무 늦게 온다고.”
“……나, 남편이요?”
재영이 남편에 대해 묻자, 지안은 괜히 아까 전 도하가 나간 문 쪽을 힐끗 보곤 제 발 저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속으로 푸념했다.
좀 전에 보셨듯 남편이 단단히 삐쳤는데,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그러다 회사 선배이자, 결혼 선배인 재영에게 조언을 구해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어떤 질문에도 영혼을 담아 성심껏 대답해주는 재영이라면, 이 문제에도 의미 있는 해답을 줄지도 몰랐다.
“저…… 부장님.”
“응?”
“사실 제가 부서 이동 이후 남편과 거의 마주칠 일이 없을 정도로 혼자 바빴거든요.”
“그렇지. 매일 야근에, 또 출근은 좀 빨리하나. 지안 씨가.”
“네. 그래서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얼굴 마주 볼 시간도 없어서. 남편이 조금 마음이 상해있는 것 같아요.”
“……쯧쯧. 지안 씨가 너무했네.”
“그렇죠?”
“그럼. 지안 씨 모르나 본데. 남자들도 상처받는다고.”
“네?”
“남자도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야. 근데 사랑 대신 무관심을 주면 누구라도 상처받지.”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도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누구보다 단단한 모습으로 회사를 활보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아버렸는지 모른다.
그가 이제 다 나았다고. 완벽히 괜찮아졌다고. 그러니 제 도움이나 관심이 아니어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눈에 보이는 육체의 건강은 그러할지 몰라도, 마음은 아니었나 보다.
3년을 줄곧 받았던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어쩌면 그 후유증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고.
‘그럼 어떡하나. 바쁜 아내가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그 말을 던지던 도하의 뜨거운 눈빛과 애절한 목소리.
그 순간 지안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네가 그립고 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말.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뜨거운 고백의 말이었다.
주책없이 두근대는 심장 때문에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수년을 매일같이 함께했는데, 떨어져 일하려니 왠지 가슴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일하다가도 발작하듯이 화들짝 놀라며 도하를 떠올렸었다.
마치 병실에 그를 혼자 두고 긴 외출 중인 기분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침대 위에서 먼저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볼 때면, 그가 무사함에 끝없이 안도했었다는 걸 알긴 할까.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말없이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는 사실도.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그렇게 몰래몰래 충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복지팀 일은 그에게 말했듯 꼭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 지안은 그렇게나마 도하와 정순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저를 가족으로 받아 주고, 사랑으로 지켜주는 두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케이원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던 것뿐인데.
차마 다 말할 수 없었던 마음.
그 얘길 들려줬다면 그의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을까.
그때 재영의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흔들었다.
“내일 토요일이잖아. 지안 씨, 남편한테 오랜만에 데이트 신청을 해보는 건 어때?”
“데이트 신청이요?”
“응. 연애 시절 생각도 나고 좋잖아.”
재영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던진 말에 지안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애 시절’이랄 것이 따로 없는 사이.
함께한 시간 대부분이 병실에서 소리 없이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데이트라면,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며칠이 다였다.
짧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
그때를 떠올리던 지안의 입가에 조금씩 따스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
“새벽 배송 정기구독 회원 수가 지난달과 비교해 30%가량 상승했습니다. 다만 서울 및 수도권에 한정된 서비스가 아쉽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승훈의 보고에도 도하는 다른 곳에 정신이 사로잡힌 사람처럼 눈빛이 멍했다.
조금 전, 지안과 함께했던 점심이 도하에게는 꿈속 한 장면처럼 벌써 아련했다.
일에 몰두하느라 금세 여윈 작은 어깨를 얼마나 꽉 안아주고 싶던지.
졸린 듯 가물가물한 눈꺼풀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는 것도.
바쁘다며 저를 소홀히 하는 아내가 미우면서도, 그새 얼굴을 보니 또 좋은 건 무슨 바보 같은 변덕일까.
도하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제 마음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듯 살짝 고개를 떨었다.
지안에겐 툴툴대며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은 이후 기분이 꽤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참 대단한 여자야. 서지안.’
무엇에도 쉽게 감탄하지 않는 남자의 감탄을 수시로 끌어내는 여자.
지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도하의 귓가에 부하직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표님?”
승훈의 목소리에 도하는 번쩍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한 팀장.”
“대표님,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지요?”
“새벽 배송 정기권을 희망하는 지방 거주자들의 수요가 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여전히 두고 보실 건지 여쭸습니다.”
한 여자에게로 향했던 온 주파수가 다시 업무로 돌아오자, 도하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지적인 눈빛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열띤 토론과 함께 두 남자의 회의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그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음이 들렸다.
작은 소리조차 방해되는지 휴대폰을 치우려던 도하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에 힘을 잔뜩 넣었다.
액정 화면에 미리 보기로 뜬 이름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화면에 뜬 반가운 이름.
서지안.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업무시간에 그녀의 메시지를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도하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
무언가를 확인한 두 눈동자가 순식간에 희열로 가득 차올랐다.
[도하 씨, 우리 내일 데이트할래요? 아니, 무조건 해요. 거절하면 일 년간 삐칠지도 몰라요. -당신의 복지부 장관, 서지안-]
생각지도 못한 데이트 신청에 도하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높이 올라갔다.
데이트라는 한마디에 심장이 크게 널뛰기 시작했다.
스무 살, 이제 막 성인이 된 풋내기도 아닌데. 데이트라는 말에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도 요동치는 심장만큼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같은 제안을 했다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지안 때문이었다.
도하가 감출 수 없는 기쁨에 연신 입꼬리를 씰룩이자, 보고 있던 승훈이 조심히 물었다.
“괜찮……으세요? 대표님.”
괜찮을 리 있느냐고. 사랑하는 여자의 데이트 신청을 받았는데. 괜찮을 리 있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신뢰하는 부하직원에게 실없는 대표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구름 위를 걷듯 붕 뜬 기분으로 잠시 멈춰 있던 도하의 머릿속에 순간 차디찬 현실의 바람이 불어왔다.
데이트라는 걸 해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참담한 현실.
하린과 연인 시절, 의무감으로 한 무미건조한 데이트 말고, 이렇게 데이트라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지는 경험은 없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지안과 데이트 비슷한 걸 하긴 했지만, 그건 그저 익히 잘 아는 장소에 그녀를 데려간 것뿐, 데이트라는 말이 미안한 마음이었다.
도하는 그녀가 어렵게 전한 마음을 실망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잠들어 있던 3년의 세월이 마음에 걸렸다.
요새 연인들은 어떤 데이트를 즐기는지, 어떻게 하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던 도하의 눈에 승훈이 들어왔다.
지안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필라델피아에서도 승훈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안과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도하는 고민 끝에 입술을 뗐다.
“한 팀장?”
“네. 대표님.”
“요새…… 그러니까 요새 말입니다.”
“네.”
“요즘 젊은 연인들이 어떤 데이트를 즐기는지 아십니까?”
도하의 말에 눈치 빠른 승훈은 금세 전후 사정을 파악한 듯 씩 웃으며 도하 쪽으로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
불 꺼진 극장 안.
도하는 실로 오랜만에 찾은 극장 분위기가 괜스레 낯설었다.
그건 아무래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안 때문일 테고, 그저 극장을 영화를 관람하는 곳 정도로 여기던 그의 생각에 파문을 준 승훈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요즘 반짝 유행하는 데이트는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만큼 검증이 덜 되었으니까요.’
‘그럼요?’
‘가장 고전적이고 클래식한 데이트가 좋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검증된 데이트 말입니다.’
‘고전적이고 클래식한 데이트라.’
‘이를테면, 어둡고 음침하고 몸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곳에서 하는 데이트 말입니다.’
‘어둡고 음침하고 몸이 닿을 듯 말 듯. 크흠 아니, 한 팀장 지금 그게 무슨!’
‘극장이요. 영화관 데이트 말입니다!’
승훈은 극장 데이트를 강력히 추천했다.
반신반의하는 도하를 설득하며, 연인과 보기 좋은 영화를 직접 예매해 둘 테니 저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했다.
뭐든 똑 부러지게 해내는 승훈이니, 도하도 믿어보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3년을 잠들어 있느라, 데이트 운용능력이 제로인 저보다 나을 테니.
영화 시작 전. 광고가 나오는 틈에 지안이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영화 포스터도 못 봤는데. 어떤 영화예요?”
그게 궁금하긴 도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순 없어, 애써 태연하게 답했다.
“연인이 함께 보면 좋은 영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이 바뀌었다.
무언가를 본 도하의 두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