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싹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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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오싹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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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오싹한 사랑
2022.10.10.
까만 화면 위로 후두둑, 붉은 핏방울이 튀더니 그 위로 섬뜩한 느낌의 타이틀이 떴다.
[귀곡 병원]
고막을 찌르는 기괴한 가야금 연주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자, 도하는 긴장한 듯 마른 입술을 다셨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시작부터 뒷골이 서늘해지는 게 왠지 공포 영화의 초입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냐, 그럴 리 없지. 한 팀장이 분명 연인이 함께 보기 좋은 영화라고 했는걸.
승훈의 말을 복기하며 도하는 흔들리는 평정심을 애써 붙잡았다.
그저 낚시성의 강렬한 오프닝일 뿐, 곧 분위기가 따뜻하고 달달하게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공포 영화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니 취향 문제가 아니고 생존의 문제였다.
공포 영화를 보면 쓸데없이 수명이 깎이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도하는 공포에 취약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러닝 타임이 흐를수록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랬다.
폐가 체험을 전문으로 하는 인기 유튜버가 폐허가 된 귀곡 병원이라는 곳을 찾아가 라이브 방송을 진행한다.
유튜버가 병원을 탐험하는 내내 현대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들이 잇달아 발생하고.
잠시 어두운 폐병원 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유튜버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이곳에 찾을 것이 있어 왔다는 중년의 여인은 유튜버의 병원 탐방을 도와준다.
그리고 자신이 오래전 이곳에서 남편을 간병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 병원에 불이 나는 바람에 남편을 비롯한 많은 환자가 사망했었다는 이야기도.
병실 곳곳에서 터져 나왔던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여전히 귓가에 선하다는 여인의 말에 유튜버는 잠시 반성한다.
누군가의 고통이 담긴 공간을 흥밋거리로 삼아 촬영하려 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길을 안내해 주던 여인이 홀연히 사라지고, 어둠과 공포로 휩싸인 병원 안에 갇힌 유튜버.
도망치는 그의 앞에 낡은 조명이 이유 없이 떨어지는가 하면, 정체 없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따라온다.
유튜버가 정체 모를 공포의 대상들을 피해 도망치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하는 영화 속 무서운 장면에 한 번, 관객들의 비명에 두 번. 졸아들 대로 졸아든 가슴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손에 밴 땀과 등줄기에서 흐른 서늘한 땀에 더 오싹한 느낌이 배가 되었다.
숨소리가 불규칙해지고, 목젖이 수시로 꿈틀거렸다. 기괴한 배경음악이 공포감을 키워나갈 때마다 커다란 어깨가 속절없이 움찔거렸다.
도하는 괜스레 멋쩍은 마음에 옆자리의 지안을 힐끔 살폈다.
이 공포의 순간을 그녀는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했다.
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보기보다 강심장인지 지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영화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정말 이게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건가.
도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지안이 그저 신기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을수록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저 작고 가녀린 여자보다 더 크게 움찔하고 요동치고 있는 제 모습이 부끄러웠다.
미동 없는 지안에게 자극받은 도하는 애써 영화가 후반부를 향해 가는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앞자리 여자가 귀신보다 더 섬뜩한 비명을 질러 놀라게 했을 때도 어금니를 꽉 물었을 뿐, 눈을 질끈 감는 우스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유튜버가 미친 듯 질주하다, 백골이 된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흡!”
그 소리에 영화에 푹 빠져 있던 지안이 현실로 돌아온 듯 말똥말똥한 눈으로 도하를 봤다.
이마 가까운 쪽 머리칼이 땀에 젖은 듯 촉촉하고, 핏기가 모두 증발한 듯 창백한 얼굴.
“도하 씨…… 괜찮아요?”
지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도하는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낮게 대답했다.
“괜찮아.”
너한테 이런 모습을 들킨 거 빼곤 다 괜찮아. 그것 빼고는.
그녀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약한 모습을 들킨 그는 반쯤 자포자기한 얼굴로 영화의 결말 부를 지켜보았다.
유튜버가 발견한 백골의 정체는, 영화 초반부에서 그에게 병원 내부를 안내해 줬던 중년의 간병인 여인이었다.
여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병원에서 불이 나 남편이 사망하자, 큰 충격과 죄책감을 가진 아내는 몇 년 후, 폐허가 된 병원을 찾아 남편이 죽어간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였기에 그녀의 시신은 오래도록 발견되지 못했다. 대신 병원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오싹한 소문이 세간에 돌 뿐이었다.
가까스로 병원을 탈출해 나온 유튜버는 자신이 촬영한 영상 본을 확인하는데, 화면 어디에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병원 길을 안내해 주었던 여인의 모습은 없었다.
다시금 고막을 터뜨릴 듯 뾰족한 가야금 연주와 함께 극장 안이 암전되었다.
그제야 도하는 오래 참아온 무거운 숨을 깊이 몰아쉴 수 있었다.
얼마 후 불이 켜지자, 도하는 이곳을 빠져나가자마자 승훈에게 항의 전화를 걸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연인이 보기 좋은 영화라는 말인가.
이게 대체 어떻게.
공포 영화 특유의 쌉싸름한 끝 맛 때문인지 지안의 안색도 극장에 들어서기 전보다 어두워 보였다.
걱정스레 저를 보고 있는 도하의 모습에 놀란 지안이 물었다.
“왜 그래요, 도하 씨?”
“어? 아, 아냐. 아무것도.”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응. 다녀와.”
상영관을 나와 지안이 화장실에 간 사이, 도하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간 신호음이 들리고 승훈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왔다.
-즐거운 관람 되셨습니까? 대표님!
남의 뜻을 곡해하는 법이 없는 도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독 씩씩한 승훈의 목소리에 자신이 골탕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팀장.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착오라니요? 그게 무슨.
“영화 선택 말입니다.”
-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예매해둔 영화는 귀곡 병원이었는데, 혹시 다른 걸 보신 건가요?
“아닙니다! 맞습니다. 귀. 곡. 병. 원.”
-어? 그럼 맞는데.
“정말 이 영화가 연인이 함께 보기 좋은 영화 맞습니까? 음산하고 기괴하고 섬뜩한 이 영화가!”
-그럼요, 대표님! 어둡고 음침한 곳에, 공포까지 더해지면 그보다 더 진한 교감의 시간이 없었을 텐데요.
“진한…… 교감이요?”
도하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묻자, 승훈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일이라뇨?”
-네. 이를테면, 겁에 질린 사모님이 대표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거나, 영화 상영 내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거나.
“…….”
금시초문이었다.
반대로 겁에 질린 그가 지안의 손을 잡아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으나,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 부끄러워 다가가지 못한 일은 있었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백골이 발견되었을 때, 비명을 지르며 한없이 작은 그녀의 품으로 고개를 파묻고 싶은 걸 겨우 참은 일도 있었다.
도하가 깊은 한숨만 내쉴 뿐 말을 잇지 못하자, 수화기 너머의 승훈이 당황한 듯 말했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게 말이죠. 과학적으로 증명된 방법이란 말이죠.
“과학이요?”
-네. 남녀가 공포를 함께 경험하면, 공포에서 비롯된 생리적 반응을 상대에 대한 끌림이나 사랑으로 혼동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제 친구 녀석들은 이걸로 다 성공했거든요.
“…….”
과학적으로 증명된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험 대상이 된 두 사람이 특수하다는 뜻인가.
지안보다 공포에 취약한 자신의 문제일까.
아니면, 필요 이상으로 공포 영화에 강한 그녀가 문제일까.
잠시 생각이 깊어진 도하의 눈에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지안의 모습이 보였다.
도하는 얼른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과학도 빗겨 가는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아무튼, 수고했습니다. 한 팀장.”
통화를 마친 도하는 얼른 지안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멀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녀의 표정이 제대로 보였다.
하얀 손등으로 빠르게 눈가를 닦아내는 여자.
고운 손등 위로 투명한 눈물이 금세 스며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눈물에 도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서지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촉촉이 젖은 눈썹 사이, 투명한 눈망울이 그를 응시했다.
“…….”
지안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도하를 보곤 얼른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우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도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급해졌다.
무슨 까닭으로 그녀가 울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 가장 유력한 하나의 가설이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괜찮은 척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러닝 타임 내내 한껏 졸였던 마음이 뒤늦게 풀리며 맥없이 눈물이 나오는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진한 교감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조금 늦었지만, 겁에 질린 그녀를 제 품에 꼭 안고, 다독다독 위로해주면 될 테니까.
도하가 다가가자 지안은 전보다 빠르게 눈물을 훔치며 애써 괜찮은 척 억지웃음을 지었다.
“도하 씨.”
“무슨 일이야. 서지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가서.”
이토록 어설픈 거짓말은 처음이다.
도하는 집요하게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눈물을 훔치는 손을 치우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냥요. 그냥.”
지안이 말을 얼버무리자, 도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방금 그 영화 때문이야?”
“……!”
순간 지안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반응에 도하는 확신한 듯 물었다.
“많이 무서웠지? 미안. 당신 영화 취향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선택 미스였어.”
도하의 말에 지안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반색하며 말했다.
“무섭긴요.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오히려 슬펐는데.”
“……뭐?”
뜻밖의 대답에 도하의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높이 솟구쳤다.
“간병인 귀신 사연이 너무 슬펐거든요. 남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남편이 숨을 거뒀던 병실에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그분 마음이 너무 아파서.”
“……!”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곁에서 보살펴 본 사람은 알 거예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그 충격. 슬픔. 전 상상만으로도 정말 아찔했어요.”
“…….”
“그 간병인 귀신이 꼭 찾을 게 있다고 했던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분은 아직도 남편을 찾고 있을 거예요. 남편을 찾기 위해 거기서 아직도 떠돌고 있는 걸지 몰라요.”
“……!”
“유치할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 다짐했어요!”
“뭐?”
“나는 절대 그 귀신처럼 되지 말아야겠다고. 나는 꼭 내 환자, 내 남편. 도하 씨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절대 놓치지 않고 영원히 지키겠다고.”
오싹한 공포 영화를 보고, 이렇게 로맨틱한 다짐을 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다짐으로 영화보다 진한 감동을 나눠주다니.
도하는 잠시 소리 없이 지안의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눈에 담았다.
공포 영화가 사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던 승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공포 영화를 볼 때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이, 저도 모르게 붉어지는 두 뺨이,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을 뜨겁게 만들고 있으니.
도하는 거친 걸음으로 다가가 지안의 가녀린 허리를 단숨에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