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운명처럼 날아온 (91/110)


91화. 운명처럼 날아온
2022.10.14.



 
극장을 나온 도하와 지안은 근처 공원을 거닐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영화가 남긴 아찔한 여운을 조금은 씻겨 주는 듯했다.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그저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 벅차오르는 가슴.

3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데이트의 소소한 기쁨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됐다.

도하는 초록이 무성한 공원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조금 전 지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치할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 다짐했어요!’


‘나는 절대 그 귀신처럼 되지 말아야겠다고. 나는 꼭 내 환자, 내 남편. 도하 씨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절대 놓치지 않고 영원히 지키겠다고.’

아무 일에나 쉽게 감동하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서지안이라는 여자 앞에서는 단단하던 마음이 홍시처럼 물러졌다.

빨라진 심장박동도 제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된 지 오래였고.

온몸이 뜨거워진 도하는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하얀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힘껏 잡아당겼다.

작고 하얀 손과 함께 놀람과 수줍음을 담은 시선이 따라와 그의 얼굴 위에 꽂혔다.

도하는 저를 올려다보는 귀여운 시선에 눈을 맞추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내 복지부 장관이라며. 서지안 장관님”

“……네?”

“함께 걸을 때 옆 사람의 손이 쓸쓸하지 않게 꼭 잡아주는 것. 이런 게 연인 복지의 기본 아닌가.”

“……!”

도하가 눈짓으로 주변의 숱한 연인들을 가리켰다.

손깍지는 기본이고, 본래 한몸이었던 것처럼 서로 꼭 끌어안고 산책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황을 파악한 듯 지안의 두 눈이 전보다 동그랗게 커지자, 도하가 짓궂게 말했다.


“알겠어? 지금 당신 남편의 복지가 얼마나 초라한 상태인지.”

그러면서 커다란 손안에 넣은 지안의 손을 전보다 더 강하게 붙잡았다.

고작 손을 잡고 걷는 것뿐인데, 데이트라는 이름 때문인지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지안은 사춘기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발그레한 얼굴로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초록의 푸른 나무숲을 지나, 아기자기한 조형물로 가득한 포토존을 지나니 운치 있는 호수가 나왔다.

잔잔하게 흐르는 푸른 빛깔의 물결 위로 진노랑의 오리배 동동 떠다니는 게 보였다.

지안이 아이처럼 호수를 구경하던 그때, 오리배 체험을 먼저 제안한 건 도하였다.


“어때, 한번 타볼래?”

“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지안은 공포 영화쯤은 끄떡없어도, 물 위에 떠 있는 건 영 자신이 없었다. 오래전, 도하를 구하겠다며 야외 풀에 들어갔다 나온 후로 더 그랬다.

하지만 소년처럼 기대에 찬 도하의 눈빛을 보자, 하나뿐인 남편의 복지를 다시 초라하게 만들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의 저변에는 수영선수보다 훌륭하던 도하의 수영 솜씨라는 믿는 구석도 존재했다.

운 없이 오리배가 뒤집힌대도, 그가 옆에 있는 한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믿음.


“어때?”

“좋아요.”

지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두 사람의 인생 첫 오리배 체험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웨이크 보드나 웨이크 서핑을 즐겨 했던 도하도 오리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리배는 그저 아이가 있는 가족 단위나 연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엄두 낼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날이 오다니.

185cm가 넘는 훤칠한 성인 남자가 아기자기한 오리배에 오르니, 안 그래도 작은 배가 더 좁게 느껴졌다.

좀 전까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창백했던 지안도 오리배에 먼저 입성한 도하를 보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

작은 오리배 위에 구겨지듯 탄 그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데이트란 것 특유의 간질간질하고 유치한 감성이 퍽 마음에 들었다.

지안은 도하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레 오리 배 위에 발을 디뎠다.

좁고 불편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자리에 앉으니 생각보다 아늑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출발과 함께 싹 바뀌었다.


“도하 씨! 천천히! 천천히요!”

자동이 아닌 수동 배를 선택했음에도 자동으로 출발한 오리배보다 훨씬 앞질러 나가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땐 평화롭고 잔잔하다고 여겼던 물 위도 생각보다 거칠고 험했다.

특히나 풍랑이 생각보다 세서 오리배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안은 위협을 느낀 듯 소리쳤다.


“도하 씨! 도하 씨! 무서워요!”

“꽉 잡아.”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도하의 한쪽 팔에 모든 운명을 건 사람처럼 매달렸다.

제 옆에 뜨겁게 매달린 지안을 보는 도하의 입꼬리 끝이 하늘 방향으로 높이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공포 영화 때문에 한껏 꺾였던 남자의 자존심이 비로소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저를 지켜주겠다는 그녀의 고백이 고맙고 가슴 벅찬 것도 사실이지만, 남자의 뜨거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여자인데, 평생 지켜주고 보호해줘도 모자랄 여자인데. 남자로 태어나 그녀의 보호나 받는다는 것이 비양심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미 3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녀의 보살핌과 희생 속에서 살았다.

더는 그녀를 버겁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주는 것도, 보호해 주는 것도 이제는 그녀의 몫이 아닌 제 일이다.

도하는 심지 굳은 눈빛으로 생각했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녀 한 사람만큼은 반드시 지켜낼 것이라고.

지금처럼 그녀가 매달려 기댈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리라고.

지안은 한참이 지나서야 힘껏 잡고 있던 도하의 팔을 놓아 주었다.

성난 짐승처럼 질주하던 오리배가 비교적 차분해진 까닭이었다.

도하는 거칠게 움직이던 페달을 느슨히 다루며 말했다.


“앞을 한번 봐볼래?”

“…….”

지안은 대답 대신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뻥 뚫린 풍경.

푸르른 물 위 오롯이 그와 자신 둘뿐인 세상이 보였다.


“우리끼리 오붓하게 있으려고 초반에 속도를 낸 거야.”

“……아.”

“주변에 오리배들이 둥둥 떠다니면 분위기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지금 있는 여기가 오리배 위라고 누가 일러주지 않는다면, 자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저 외딴 섬에 오롯이 둘만 정박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평화롭고 아늑했다.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상태, 오롯이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

도하가 지안의 가녀린 어깨에 커다란 팔을 올리자, 그녀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어깨로 기울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앞에 잔잔히 흐르는 물결을 눈에 담았다.

앞으로의 인생이 눈앞의 물결처럼 잔잔하고 아름답기를.

얼마 후 도하가 나직이 물었다.


“하늘 위에도 함께 있어 봤고, 물 위에도 이렇게 함께 있는 중이고. 땅은 늘 함께 밟고 살아가고. 그래서 당신은 육해공 중 어디가 가장 좋아? 나랑 있는 하늘, 바다, 그리고 땅 중에.”

아름다운 풍경과 고즈넉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감수성 넘치는 질문이었다.

지안은 그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미국으로 떠나던 비행기 안에서도,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오리배에 오르기 전 나란히 손잡고 거닐던 공원 위에서도.

그가 항상 곁에 있었다.

당신과 함께한 어디가 가장 좋으냐고?

지안은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어느 것 하나를 고르기에 버려지는 나머지의 시공간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다는 것에 마음이 기울던 그때, 도하가 재촉했다.


“답 안 해줄 거야?”

복지부 장관으로서 국민의 질문을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지안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저는…… 하늘, 바다 그리고 땅 중에…….”

“…….”

“권도하.”

“……!”

“그중에 권도하가 가장 좋아요.”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 도하의 눈동자가 물결보다 더 아름답게 파도쳤다.


“뭐?”

다시 한번 그 소리를 듣고 싶어 되물은 말.


“당신이 제일 좋다고요. 당신과 함께 머무는 하늘 위, 바다 위, 그리고 땅. 당신과 있는 모든 곳이 좋아요.”

가히 권도하의 복지부 장관답다.

서지안 너란 여자는 정말…….

도하의 벅찬 눈동자가 지안을 가득 담고 뜨겁게 반짝였다.

오롯이 둘 뿐인 외딴곳에서, 시공간이 멈춘 듯 서로를 눈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걸로는 모자란 듯 도하는 금세 지안의 입술로 달려들었다.

앙증맞은 배 위에서 나누는 뜨거운 어른들의 키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맞붙은 두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

주황빛 노을이 푸르던 공원을 전보다 분위기 있고 따뜻하게 비추는 시간.

물 위에 머물다 내려온 탓인지 아직도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다리에 현실감이 없었다.

지안은 도하에게 반쯤 몸을 기댄 채 공원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만치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노을 지기 전에 빨리 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랑님, 신부님! 여기 카메라 봐 주시고요!”

저만치 앞 나무 벤치 쪽에 턱시도와 웨딩드레스 차림의 신랑 신부가 보였다.

고즈넉한 공원을 거닐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풍경.

지나가는 연인들의 호기심과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모습의 그들은 야외 웨딩 촬영이 한창이었다.


“좋습니다! 지금 그대로 움직이지 마시고요!”

찰칵, 찰칵, 찰칵.


“하늘이 내려준 선남선녀! 신부님 표정 아주 좋고요! 근데 신랑님은 표정이 너무 굳으셨어요. 스마일.”

바쁘게 셔터를 누르며 표정을 주문하는 사진작가의 목소리와 카메라가 어색한 듯 서로의 눈을 보며 멋쩍게 웃는 예비부부.

지안의 입가에도 절로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붉은 노을 아래 사랑의 기운으로 똘똘 뭉친 연인의 모습은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웠다.

지안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도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싱그러운 예비부부의 모습에 눈을 뺏겼고, 나중엔 그 모습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고 있는 지안의 얼굴에 시선이 묶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얼마 전 우연히 본 한 장의 웨딩 사진이 떠올랐다.

의식 없이 잠든 남자의 옆에 있기엔 너무도 눈부신 신부.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안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

백색의 눈부신 드레스가 피부가 희고 고운 지안과 너무도 잘 어울려서, 하지만 결혼사진 속 그녀의 눈빛만은 너무도 슬퍼 보여서.

한동안 도하는 그 사진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이 가장 쓸쓸하고 외로웠을 그녀.

눈앞의 행복한 예비부부를 보니, 불행했을 또 다른 신부가 되살아나 도하의 마음을 어지럽혀 놓았다.

그리고 아직 미처 꺼내지 못했던 한마디가 입가에 맴돌았다.


‘……다시 나와 결혼해줄래.’

그 순간이었다.

저만치서 색색의 꽃을 묶어 만든 파스텔 톤의 부케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도하와 지안 사이로 날아오고 있었다.

피-이잉.

엇!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 부케가 안착한 곳은 다름 아닌 지안의 손 위였다.

놀란 지안의 눈동자가 눈앞의 화사한 꽃다발을 가득 담고 너울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