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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의문의 택배 (92/110)


92화. 의문의 택배
2022.10.17.



 


“엇!”

지안의 동공이 파스텔 톤의 꽃 뭉치 앞에서 한동안 흔들렸다.

저쪽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엉뚱한 곳으로 부케를 토스한 신부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발을 동동거리는 게 보였다.

놀란 신랑 신부를 대신해 카메라를 든 작가가 잰걸음으로 지안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당황한 순간에도 유일하게 차분한 한 사람.

도하는 무슨 까닭에선지 깊어진 눈으로 지안의 손에 들린 부케를 응시했다.

부케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걸 느꼈다면 우스운 마음일까.

정말 그랬다.

세상에서 부케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

그녀의 손에 촬영용 가짜 부케가 아니라, 진짜 부케가 있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운명도 저와 같은 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원의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지안의 손에 부케가 날아올 리 없었다.

홀로 서글픈 눈으로 쓸쓸히 버진로드를 걸었을 한 여자.

부케의 생기를 느낄 겨를도 없이, 생기 없는 남자의 곁에 기약 없이 머물러야만 했던 여자.

하늘도 그런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고 싶은 게 분명하다고.

도하는 지안의 손에 들린 부케를 보고 생각했다.


“어휴, 산책하는데 방해 드려 죄송합니다.”

금세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사진작가가 숨을 헐떡이며 인사했다.

지안은 괜찮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얼른 부케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감사합니다.”

부케를 받아든 남자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신부님들이 결혼은 처음이라 조준을 어려워들 하세요.”

지안은 남자의 사람 좋은 웃음에 화답하듯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지안의 옆에 말없이 서 있는 도하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왔던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몇 걸음 옮기는 듯싶다가 다시 두 사람 쪽으로 달려와 말했다.


“저…… 이것도 인연인데, 두 분 결혼하실 때 웨딩 촬영 기사 찾으시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특별 할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셔츠 윗주머니에서 신속하게 명함을 꺼내 건네며 숙련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지안은 남자의 손이 민망하게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곤 얼른 입술을 뗐다.


“어, 저희는 이미 결…….”

그 순간 도하가 지안 보다 빠르게 명함을 받아 챙기며 말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도하의 흔쾌한 대답에 남자는 흡족한 듯 90도 인사를 하곤 신랑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평소 실없는 소리를 한다거나, 빈말하는 사람이 절대 아닌데.

지안은 도하의 낯선 행동이 의아한 듯 나직이 물었다.


“방금 왜 그런 거예요?”

“……뭘?”

“우린 웨딩 촬영할 일 없잖아요. 이미 결혼한 부부인데.”

“…….”

“연락드리겠다고 하면, 정말 연락을 기다릴지도 모르고요.”

“걱정하지 마.”

“네?”

“연락하게 될 거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원래도 동그란 지안의 두 눈이 하염없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결혼한 기억이 있는지 몰라도 난 없거든.”

“……!”

둔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괜스레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민망함이 함께 몰려왔다.

의식 없는 남자와 올린 결혼식.

세상 어디에도 그런 결혼식이 존재한다는 소릴 들어본 적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결심할만한 시간이 주어졌었다.

하지만 그로선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진 걸 거다.

그걸 알기에 지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안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지자, 도하는 그게 아니라는 듯 얼른 입술을 뗐다.


“당신을 탓하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야.”

“…….”

“그 결혼이라는 거. 내 인생에 벌어진 일 중 가장 감사하고 절대 놓치기 싫은 일이니까.”

“……!”

“다만 답답할 뿐이지.”

“……답답이요?”

“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제 신부로 맞으면서도,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한 녀석이.”

“……도하 씨.”

“그리고……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라는 것도 모른 채 서글프게 버진로드에 섰던 한 여자 또한 너무 가엽기도 하고.”

도하의 말에 지안은 그날의 복잡했던 감정이 다시 복받쳐오는지 잠시 입술을 꾹 물었다.

도하는 조금 전 부케에 잠시 양보했던 지안의 손을 냉큼 잡아채며 말했다.


“그 전설 알지?”

“……전설이요?”

“부케 받으면 6개월 안에 시집가야 한다는 이야기. 안 그럼 3년을 못 간다고 하던가?”

“……에이. 그거 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미신이잖아요. 그리고 조금 전에 그건 정식으로 받은 부케도 아니고요.”

“미신이든 아니든. 내가 3년이라는 숫자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서 말이야.”

3년이라는 말에 지안도 잠시 멈칫했다.


“…….”

“그냥 무시했다가 3년간 결혼 못 하면 어떻게 책임질 거지?”

“도하 씨.”

“……6개월이라, 6개월이면 그리 짧지도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군. 딱 좋은 시간 같아.”

도하는 그 말을 하면 힘껏 지안의 손을 잡아당겼다.

전보다 힘찬 걸음에 지안이 끌려가듯 걸음을 옮겼다.

무슨 생각인 건지 도하의 입가에 만개한 미소가 금세 안색까지 환하게 바꿔놓았다.

지안은 그 미소가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면서, 도하의 밝은 얼굴을 보니 습관처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때의 지안은 결코 실감하지 못했다.

제 인생에 또 한 번의 결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한 남자와 두 번의 웨딩마치를 올리는 특별한 운명에 대하여.

***

회사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직접 총괄하며, 도하는 이제 어떤 프로젝트가 나타나도 거뜬하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일생일대의 어려운 프로젝트를 눈앞에 둔 도하의 입술에서는 무거운 한숨만이 연거푸 새어 나왔다.


“휴우.”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하의 모습에 승훈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대표님, 제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번 건은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라, 내가 직접 풀어야 할 숙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얼굴이 날로 야위시고, 한숨도 많이 느셨어요.”

“이 땅 위에 한 남자로 태어나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도하의 힘없는 목소리에 승훈은 작은 보탬이 되고 싶어 분주하게 떠들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요트 위 프러포즈나, 극장 대여 프러포즈는 영 아닌가요? 아니면 야구장을 빌리셔서…….”

“아닙니다. 이름만 바꾸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프러포즈 말고, 나와 그 사람. 둘만의 이야기가 담긴 그런 프러포즈였으면 합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거고요.”

지안을 향한 도하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기에 승훈은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위해서, 우리 할머니를 위해서 말도 안 되는 결혼식까지 감수한 여자입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버진로드 위에 선 사진 속 그 사람 얼굴을 생각하면…… 바보처럼 잠들어 있던, 침대 위의 나를 두들겨 패서라도 깨우고 싶은 심정이 들더군요.”

짙어진 감정으로 이야기하던 도하의 눈빛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빠르게 흔들리던 동공이 순간 환희에 찬 눈빛으로 크게 파도쳤다.

도하가 격앙된 음성으로 외쳤다.


“생각났습니다!”

“네?”

“드디어 생각이 났다고요. 내가 찾던 그런 프러포즈가.”

“……정말이십니까?”

도하는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팀장, 날 좀 도와줄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연하죠! 지난 2주간 아무 도움도 못 되어드려 마음이 무거웠다고요.”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뇨. 그래도 제가 프러포즈 선배로서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었는데, 저 때는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청혼 반지를 넣어놓는 게 유행하던 때라. 그런 고릿적 이벤트를 추천해 드릴 수도 없고. 거 참, 난감했더랬죠.”

“하하.”

“근데 어떤 이벤트인데요? 살짝 귀띔해 주시죠.”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대표님.”

“대신 잘 끝나고 나면 한 팀장 아드님을 위해 전수해 드리죠.”

“대표님!”

“이번에 해보니, 사나이로 태어나 이보다 어려운 프로젝트가 없습니다. 한 팀장 아드님도 남자로 태어나 그 어려운 숙제를 거쳐야 할 텐데. 내가 기꺼이 도움을 주지요.”

도하가 비밀을 사수하겠단 강력한 의지를 표하자, 한 팀장은 섭섭한 듯 괜스레 볼멘소리를 했다.


“제 아들 녀석, 장가가려면 20년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쩝.”

도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고요. 한 팀장, 지금 당장 인력을 좀 꾸려주셔야겠습니다.”

“인력이요? 인력이라면 어떤…….”

 

***

일주일 후.

목발을 한 중년의 남자가 배달 근로자 복지팀이라는 팻말 아래에서 나왔다. 그 뒤를 지안이 뒤따라 나왔다.


“몸도 불편하신데, 여기까지 직접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요새 다른 데서 배달 일하는 친구들이 전부 나만 부러워한다니까요. 어떻게 노크맨은 이렇게 배달 근로자 복지가 좋으냐고. 다른 데는 짐승만도 못하게 부리거든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어쨌든 오늘 제출하신 서류 잘 처리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지안은 남자가 저 먼 복도 끝으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시계를 본 지안의 눈이 금세 촉박해졌다.


“어. 벌써 6시 반이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7시까지는 귀가해 가족의, 정확히는 남편의 복지를 책임지라던 권도하 대표의 명령이 떨어진 지 오래.

지안은 대표 겸 남편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짐을 챙겼다.

로비를 빠져나가자, 여느 때처럼 최 기사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사모님.”

“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최 기사님.”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익숙한 퇴근길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그때, 휴대폰 알림음이 들렸다.

딩동.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노크맨 빠른 배송 도착 예정 알림 : 오후 7시~7시 10분]

노크맨 빠른 배송?

지안은 의아한 듯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요새 회사 일이 바쁜 탓에 따로 쇼핑할 시간도 없었다.

뭐지?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착한 문자를 자세히 뜯어보아도 자세한 주문 내역은 알 수 없었다.

그때 조용하던 휴대폰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도하였다.


“여보세요.”

-그래. 퇴근하는 길이야?

“네. 지금 가는 중이에요. 아, 혹시 뭐 주문했어요? 노크맨 배송 알림 메시지가 와서요. 저는 따로 시킨 게 없는데.”

-응. 내가 주문한 거야. 내가 좀 늦을 것 같아서 그런데. 배송받으면 내용물만 꺼내서 병실에 좀 가져다 놓아 주겠어?

“병실에요?”

-응. 상품에 문제없는지 먼저 확인해 주면 더 고맙고.

“네. 알겠어요.”

통화를 마침과 동시에 저택 앞에 도착한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수고하셨어요. 최 기사님.”

차에서 내린 지안의 눈에 익숙한 유니폼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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