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기적이 있다면, 지금 여기
(93/110)
93화. 기적이 있다면,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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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기적이 있다면, 지금 여기
2022.10.21.
“노크맨이시죠?”
지안은 대문 앞에 선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네.”
상자에 적힌 운송장을 확인한 남자가 분주하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서지안 고객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남자는 신속히 상자를 지안에게 전달하고는 90도 인사를 건넨 후 빠르게 자리를 떴다.
쏜살같이 사라진 배달원과 그가 전달하고 간 의문의 택배 상자.
가히 노크맨이라는 이름이 딱 맞았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돌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심리처럼, 택배 상자 하나를 품에 안자, 당장 박스 테이프를 떼어 내고 내용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자신이 주문한 것도 아닌데. 엄청난 비밀이 담긴 상자를 손에 넣은 듯, 빨리 열어보고 싶게 만드는 택배의 마력.
지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시 인내심을 잃었다.
잰걸음으로 정원을 지나 거실로 들어선 그녀는, 곧장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상자 오픈에 심혈을 기울였다.
남의 택배를 함부로 열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주인의 허락이 떨어진 상자를 오픈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보기보다 진득하게 늘어 붙은 테이프를 쫙 뜯어 올리는 순간 알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가슴 속에 일상의 잔잔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침대 위, 한 폭의 그림처럼 미동 없이 누워 있던 남자가, 이제는 더는 나약한 환자가 아닌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왔다는 기쁨.
이렇게 남들처럼 쇼핑하고, 택배를 배달시키고…….
별거 아닌 일인데, 그 별거 아닌 일이 불가능했던 지난날을 너무도 잘 알아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안은 먹먹해진 마음을 꾹 삼키고, 상자 속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했다.
“어?”
상자 안에는 택배 상자보다 작은 크기의 또 다른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찬찬히 상자를 살펴보던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뚜껑을 들어 올렸다.
“어. 이건.”
상자 안의 무언가를 확인한 지안의 두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실물로는 처음 보는 낯선 물건에 한껏 확장되었던 동공이 얼마 후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안은 천천히 상자 안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TV나 뉴스 기사에서 봤었던 VR 가상현실 체험용 헤드기어.
VR 안경을 실물로 접할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눈앞의 신문물이 신기하기도 하고, TV에서 본 것처럼 정말 이것만 쓰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지 순수한 호기심도 피어올랐다.
하지만 주인이 개시도 하지 않은 물건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안이 망설이던 그때 조금 전 도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상품에 문제없는지 먼저 확인해 주면 더 고맙고.’
단지 그뿐이었다.
눈앞의 신문물이 신기하고 궁금해서 아이처럼 써보고 싶었던 건 정말 아니라고.
지안은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씌어둔 투명 캡을 벗겨 낸 뒤, 조심스레 헤드기어를 머리에 가져갔다.
곧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현실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감과 긴장감이 굳게 다문 그녀의 입매에 쓰여 있었다.
하지만…….
“어?”
영화에서 보았던, 기대했던 천지개벽 같은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VR 헤드기어의 무게만이 관자놀이를 압박해올 뿐.
“혹시 불량품인가?”
당황한 마음에 헤드기어에 부착된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뒤늦게 설명서를 떠올렸다.
얼른 헤드기어를 벗어둔 그녀는 다시금 상자 안을 살폈다.
상자 바닥에 깔려있던 제품 설명서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전자 기기와 거리가 먼 탓에, 바보처럼 안경만 쓰면 가상현실이 펼쳐지는 줄 알았다.
영문과 일어, 한글이 함께 담겨 있는 설명서를 천천히 살피며 지안은 기기 설정을 시작했다.
한참을 차근차근 따라 하니, 어느 순간 기기에서 초록 불빛이 깜빡거리며 조금씩 신호가 잡혔다.
그걸 보자, 알 수 없는 성취감과 자신감이 돋아났다.
기기 설정에 몰두한 채 설명서를 뒷면으로 넘기던 지안의 눈이 순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초록 불빛이 들어오면 설정이 완료되었다는 문구 아래, 낯선 글씨가 보여서였다.
[자, 설정을 다 했다면 이제 그걸 쓰고 병실로 잠깐 이동해 볼까?]
갑자기 툭 튀어나온 누군가의 자필.
갑작스러운 등장이 당황스러웠을 뿐, 필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비서실에 근무할 때, 도하가 적어둔 메모를 보며, 반듯하면서도 절도가 느껴지는 글씨체가 글씨의 주인을 똑 닮았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보고 있으면 도하의 얼굴이 떠오르는 글씨체.
지안의 그 글씨체의 이름을 ‘권도하체’라고 혼자 명명하기도 했었다.
깨알같이 작은 설명서 문구 아래, 홀로 위엄있게 존재하는 권도하체.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뛰기 시작했다.
택배 상자를 오픈할 때의 떨림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 지안의 온몸을 휘감았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이상하고도 기분 좋은 두근거림.
지안은 권도하체가 이야기하는 대로 VR 헤드기어를 착용한 채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낯선 기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그저 기분 탓일까.
지난 3년을 줄곧 걸었던 익숙한 복도가 오늘따라 생경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아도 환하게 펼쳐지는 익숙한 길.
그 길 끝에 병실 문이 보였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문손잡이가 유난히 차가워서, 지안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수없이 잡아당겼던 문손잡이.
문을 여는 몇 초 안 되는 찰나의 순간, 익숙하면서도 아련한 손잡이의 촉감에 지난 많은 날의 기억이 쏟아지듯 새어 나왔다.
도하의 상태가 유난히 안 좋던 날, 다급하게 잡아당겼었던 문.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게 될 줄 알고 열었던 그 날의 문.
깨어난 그가 있어 유난히 무겁고 힘들게 열리던 문.
낯선 설명서에 등장한 그의 부름에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지금 이 순간까지.
많고 많은 감정이 짧은 순간 강력하게 교차했다.
달깍.
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지안은 질끈 눈을 감았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의 볕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햇살의 위력에 절로 눈이 감아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믿기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대낮처럼 밝은 병실 안.
푸릇푸릇한 생화가 단상과 병실 곳곳에 로맨틱하게 장식된 풍경.
그 아래 짧지만 아름답게 깔린 버진로드.
그리고 병실 한편에 빠져서는 안 될 환자용 침대와 그 위에 까만 턱시도를 입은 채 잠든 익숙한 얼굴까지.
“말도 안 돼.”
지안은 웅얼거리듯 나직하게 내뱉곤 믿기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오래전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정원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졌던 클래식 5중주의 익숙한 사운드가 들려왔다.
청각이, 시각이 온몸의 감각이 아련히 기억하고 있는 그 날의 모든 것이 하나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 VR 기기를 통해 보는 세상은 마치 시간을 되돌려 그날로 돌아와 있는 듯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단 하나 다른 거라면, 버진로드 앞에 선 그녀의 마음이었다.
오래전 결혼식 당일의 지안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신부였다.
말 한마디 나눈 적 없고, 나눌 수도 없는, 곧 영원한 작별을 해야 할 남자와 올리는 말도 안 되는 결혼식의 주인공.
하지만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가 깨어났다는 것을,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고 충만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봐 주는지 알게 된 그녀는 더 이상 불행한 신부가 아니었다.
멀리서 5중주의 연주로 들려오는 로맨스 영화의 주제곡이 끝을 맺을 무렵, 어디선가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 지금부터 신랑 권도하 군과 신부 서지안 양의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의 사회를 맡았던 도하의 주치의 강 박사의 목소리였다.
시간여행을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생생한 그 날의 풍경.
미래를 아는 지안은 여유로운 미소로 오래전 그날을 즐기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모셔보겠습니다.]
강 박사의 진행에 지안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제 곧 그녀가 홀로 버진로드를 향해 행진할 시간이었다.
사고 전, 도하가 좋아했었다는 팝송의 전주곡이 입장곡 대신 흘러나오던 그때,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늘의 주인공! 신랑 권도하 군 입장!]
전에 없었던 강 박사의 멘트가 익히 아는 시나리오를 비트는 반전처럼 등장했다.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세계에 평온하게 잠든 듯 누워 있던 침대 위 그가 천천히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멀끔한 웨딩 슈트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남자.
창백한 얼굴이지만, 눈빛만큼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의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지안은 믿기지 않는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순간만큼은 VR 기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게 너무도 생생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정이 무척 뜨거웠다.
기억 속의 그는 결혼식이 끝나기까지 뒤척이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게 못내 야속하고 안쓰러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건강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자신의 신부가 누구인지 똑똑히 아는 눈빛으로, 이 순간을 절대 허무하게 흘려보내지 않으리란 각오가 담긴 비장한 걸음걸이로.
단숨에 다가선 그와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 지안은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현실과 가상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신랑 없는 비참한 신부였던 그날과 달리,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곁엔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건강한 신랑이 함께 있었다.
그가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뱉었다.
“내가 너무 늦었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 순간 꾹 참고 있던 울컥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도, 도하 씨!”
커져 가는 흐느낌과 뜨겁게 떨어지는 눈물 줄기 사이로 묵직한 무언가가 그녀의 얼굴로 다가왔다.
크고 따듯한 손. 그 손길이 지안의 뺨에 길을 낸 눈물 줄기를 닦아내 주었다.
그리고 그 손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VR 기기를 벗겨 냈다.
눈앞의 모든 풍경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평범한 병실이 보였다.
하지만 절대 사라져선 안 될 하나의 존재만은 그대로 그녀의 눈앞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도하 씨!”
“당신이 방금 본 것보다 훨씬 멋질 거야. 우리의 진짜 결혼식은.”
“도하 씨.”
“다시 한번 기회를 줄래?”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와 행진할 수 있는 기회.”
“……!”
“나와 결혼해 줘. 서지안.”
“……!”
“평생 웃게 만들어 줄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다시 깨어난 이유, 내 인생의 남은 목표는 그것뿐이야.”
“……!”
눈물이 대답이 될 수 있다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대신 말하고 있었다.
고맙다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와 또 한 번 결혼할 기회를 줘서.
닦아내도 다시금 반짝, 자국을 내는 눈물 위로, 그 눈물이 지나간 입술 위로 도하의 뜨거운 입술이 다가왔다.
지안은 두 눈을 사뿐히 감고 그의 온기에 모든 것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