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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수상한 남자 (95/110)


95화. 수상한 남자
2022.10.28.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지안은 결리고 찌뿌듯한 몸을 풀기 위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던 그녀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뜨거운 열기가 불현듯 스쳐 갔다.

새벽 동이 틀 때까지도 쉬이 식을 줄 몰랐던 열정.

서로를 온전히 안은 게 어제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처음만큼이나 뜨겁고 아찔한 밤이었다.

지난밤이 이토록 가슴 깊이 새겨질 수밖에 없었던 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프러포즈 덕분이었다.

VR로 다시 만난 오래전의 두 사람.

과거의 시간에선 함께 설 수 없던 버진로드 위의 신랑 신부가 그렇게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지난 시간은 바꿀 수 없다고만 믿었는데, 그 시간 위에 새로운 시간을 덧입히니 아팠던 시간도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애틋한 추억이 되었다.

이 말도 안 되는 프러포즈를 고안하고 실행한 세상에 하나뿐인 남자, 권도하.

지안은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제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는 제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지안 씨?”

재영이 그녀의 책상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한참 뒤에야 알아차렸을 정도로.


“어! 부, 부장님, 부르셨어요?”

“지안 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얼굴이 훤하게 핀 게 수상한데?”

지안은 화들짝 놀라며 한 손으로 제 뺨을 잡고 시선은 탁상 위 거울로 보냈다.

연지곤지를 찍은 새색시처럼 붉어진 두 볼 하며, 끝을 모르고 하늘 방향으로 솟구치는 입꼬리가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보였다.

로또? 로또가 인간이라면 도하 씨처럼 생겼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사슬이 결국 또 도하에 대한 생각으로 마무리되었다.

지안은 의지와 상관없이 완전히 고장 나버린 것 같은 사고에 헛웃음을 뱉었다.


“……어라? 이거 봐. 지안 씨. 뭐가 혼자 그렇게 재밌는 거야. 나도 좀 알자.”

“어. 죄송해요. 부장님. 그…… 그게.”

“알았다!”

“……네?”

“저번에 내가 말한 방법이 통한 거 아냐?”

“네?”

“왜, 내가 남편분이랑 데이트하라고 했었잖아. 그날 이후 부부 사이가 급 뜨거워진 게 아닌가 해서.”

적당한 핑계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지안은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아…… 아! 맞아요.”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날의 데이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확인케 했으니.

그리고 운명처럼 제 품으로 날아온 부케까지.

그동안의 모든 일이 소설 속의 이야기라면, 부케가 날아온 그 장면은 어쩌면 아름다운 프러포즈와 또 한 번의 결혼식을 예고하는 복선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제의 프러포즈에는 그날의 데이트가 공헌한 바도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어쩐지.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했어. 그게 유부녀한테서 쉽게 나오는 표정이 아닌데.”

재영은 부러움과 흐뭇함이 교차하는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좀 이따 외근 같이 가자고 말하려고 불렀는데. 지안 씨 얼굴 보다가 까먹어버렸네, 글쎄.”

“외근이요?”

“응. 메일 한 통이 왔는데. 배달 근로자분이 다리를 다쳐서 직접 찾아올 수가 없다고 자택 방문 상담을 요청해왔어.”

“……아.”

“점심 먹고 출발할 거니까, 지안 씨도 그때까지 급한 일은 좀 처리해두라고.”

“네. 부장님.”

예정에 없던 오후 외근을 대비하려면, 오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지안은 두둥실 부푼 마음을 애써 누른 채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

짙은 나무 색조의 블라인드가 모든 빛을 차단한 대표실 안.

도하는 커다란 프로젝터 화면을 통해 무언가를 시청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의 프러포즈 현장이 담긴 영상이었다.

지안의 시점에서 온전히 볼 수 없었던 가상현실 장면과 그것들을 마주한 지안의 표정을 다시금 보고 싶었다.

프러포즈의 하이라이트는 병상에 있던 그가 일어나 곁으로 다가올 때 지안의 표정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가와 믿기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 듯 하얗게 상기된 얼굴.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한 남자의 안녕을 확인한 뒤, 모든 긴장이 풀려 웃음으로 만개하는 아리따운 얼굴.

프러포즈를 준비하며 머릿속으로, 마음으로 그렸던 얼굴을 이렇게 마주하니 더없이 벅찼다.

결혼식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이었어야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없었던 남자의 비애를 누가 알까.

도하는 그 비애로부터 다시 시작했다.

조금 늦었지만, 이번에는 꼭 웃게 해주겠다고.

딜리버리 사업 다음으로 추진해오던 VR 사업을 프러포즈에 접목한 건 행운이었다.

프러포즈의 완벽한 성공으로 도하는 또 하나의 도전을 시작하게 됐다.

가상현실이 누군가를 이토록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투자와 개발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지안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그 눈물이 지나간 입술 언저리로 저의 뜨거운 입술이 닿으며 영상이 종료되었다.

가슴 찌릿한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을 본 듯 온통 먹먹해지며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살아 있다는 건, 심장이 뛴다는 건 행복한 일임이 틀림없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오래 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오래 살고 싶다. 가능한 한 오래도록.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눈 감는 그 날까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 3년을 머물다 돌아왔으니, 어쩌면 남들보다는 평탄하게 오래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도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영상의 마지막 스틸 장면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머금어 더 반짝이는 지안의 눈동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얼른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네. 할머니.”

-그래. 일하는 중이었니?

“아닙니다.”

-그래. 일이 될 리 없지. 인생의 중대한 일을 앞둔 새신랑님이. 하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순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도하의 입가에도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다른 게 아니고, 너희 결혼식 준비를 도와줄 플래너를 알아봤단다. 연진그룹 장 여사 알지? 장 여사가 강력하게 추천한 플래너야. 내로라하는 재계 자제들을 다 맡아서 한다는데, 내년 일정까지 꽉 찬 사람을 겨우 설득해서 잡았으니. 오늘 당장 만나보렴.

“오늘이요?”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 못 들어 봤니. 큰일일수록 이야기 나왔을 때, 빨리빨리 서둘러 치러야 하는 법이야. 미뤄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

도하는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할머니.”

서두르는 정순의 마음 너머에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며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아들 부부를 그렇게 예고 없이 잃었고, 하나 남은 손자조차 아찔하게 잃을 뻔했던 그녀이기에.

이번만은, 이번만큼은 확실히 꼭 붙잡고 싶을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영원한 약속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싶은 것이리라.

통화를 마친 도하는 왠지 모르게 숙연한 마음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 행복해질 거예요. 제가 다 지켜낼 거니까요.’

도하의 까맣고 단단한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일렁였다.

***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던 지안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극심한 오르막길이라는 두 번의 고비 끝에 도착한 대학가 원룸촌.

저만치 뒤처져 따라오던 재영이 지안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


“아직 애를 안 낳아서 그런가. 지안 씨는 언덕도 잘 오르네. 난 애를 둘이나 낳은 몸이라 그런가. 다릿심이 없어, 다릿심이.”

지안은 픽 웃으며 왔던 길을 조금 내려가 재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손 잡고 올라오세요. 부장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두 여자는 겨우 메모해둔 주소에 다다랐다.

지상 5층짜리 원룸 건물의 지하 1층 B05호.

지하 복도로 들어서자, 쾌쾌하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코끝은 엄습해왔다.

지안은 메모해둔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하지만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연달아 두 번을 더 누르자, 낯선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닫힌 문을 뚫고 새어 나왔다.


“열려 있다고! 안 잠갔어!”

생각보다 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지안과 재영은 당황한 듯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배달 사고로 다친 근로자의 경우, 당장 생계에 어려움이 생기고,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예민해지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복지 상담을 받으러 온 대부분은 도움을 주려는 사 측에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대면 전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문 너머 근로자의 등장에 지안은 입술을 꾹 물었다.

왠지 쉽지 않은 상담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곤 천천히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담배 냄새와 알코올이 찌든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콜록콜록.

지안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기침에 입을 틀어막으며 앞을 응시했다.

네 평 남짓 작은 원룸 방안은 희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좁은 현관 입구에 들어서기 무섭게 줄지어 세워놓았던 술병이 우르르 쏟아졌다.


“어!”

지안이 당황해 외치자, 방 안에 누워 있던 남자가 반쯤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이렇게 소란스러워!”

“…….”

지안이 놀란 듯 굳어서 있자, 재영이 지안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케이원에서 나왔습니다. 방문 상담 요청 주셨지요?”

“…….”

좁은 방, 한구석에 누워 있던 남자가 힘겹게 몸을 부축해 기대앉는 게 보였다.

걸걸한 목소리와 달리 앳된 인상의 젊은 남자를 본 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이거나, 몇 살 아래쯤으로 보였다. 그제야 조금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또래라면, 분명 공감대가 있을 테고 아주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은 없을 거라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돋아났다.

남자는 지안과 재영을 매섭게 쏘아보곤 날카롭게 뱉었다.


“배달 근로자 복지팀이랬지?”

“……네. 맞습니다.”

재영이 어지럽혀진 방에 겨우 앉을 곳을 찾아 엉덩이를 붙이며 답했다.

지안이 얼른 재영의 옆자리로 따라가는 순간, 남자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럼 내 인생도 책임져주나?”

“……네?”

재영이 눈썹을 산 모양을 만들며 되묻자,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하하하, 하하.”

지안은 남자의 과장된 웃음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모델 지망생 다리가 고장 났는데, 평생 런웨이에 못 설 수도 있는데! 책임져 줄 거냐고!”

버럭, 질러대는 목소리에선 젊은이의 패기 아닌 악다구니만이 느껴졌다.

지안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방 안을 살폈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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