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기분 나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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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기분 나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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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기분 나쁜 여자
2022.10.31.
모델 지망생의 방이라기엔 뭔가 좀 이상했다.
그 흔한 패션 잡지나 관련 서적 하나 없는 텅 빈 책꽂이 하며,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와 언제 마셨는지 모를 오래된 술병이 방 안 곳곳에 굴러다니고 있는 풍경.
모델이라는 직업은 제 몸이 재산인 직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직업을 꿈꾸는 사람의 방이 술과 담뱃재로 가득할 리 없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지안은 경계심이 깃든 눈빛으로 침착하게 남자를 살폈다.
남자가 입고 있는 반소매 사이로 드러난 무언가를 본 지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물었다.
양팔 위로 시퍼런 용 문신이 보였고, 목덜미에는 바코드 모양의 문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델들은 다른 것보다 의상을 가장 돋보이게 해야 하므로, 몸에 문신이나 치장하는 것을 피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게 기억났다.
런웨이 위에 시퍼런 용 문신을 한 모델이 등장한다면, 그가 입고 있는 의상보다 그의 팔에 더 많은 시선이 갈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 위에서 의상을 소개해야 할 모델은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었다.
모델이라는 분야에 대해선 얕은 지식뿐이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모습이었다.
모델 지망생이라는 말에 신뢰가 깡그리 사라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지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푸념 아닌 푸념을 뱉었다.
“배달 일이 돈이 된다니까, 단기로 일해서 모델 아카데미 등록할 비용만 벌려고 뛰어들었던 건데. 이렇게 다리가 고장이 날 줄 누가 알았겠어! 이 다리가 어떤 다리인데.”
남자의 말에 재영이 위로하듯 목소리를 냈다.
“상심이 크시죠. 저희도 정말 안타깝습니다.”
남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재영을 한번 보고는 그 옆에 있는 지안에게로 쓱 시선을 돌렸다.
흔한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는 지안이 의아한지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다.
하지만 지안은 남자의 눈빛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후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카데미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배달 일을 시작하셨던 거군요. 혹시 등록하시려던 아카데미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듯 남자의 미간 사이가 급격히 좁아 들었다.
“뭐?”
“저희가 그쪽으로 도움 드릴 부분이 있다면 알아보려고요. 상호가 어떻게 되죠?”
지안은 누그러짐 없는 눈빛으로 남자의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
당황한 듯 살짝 벌어진 입술이 허공에서 겉돌기만 여러 번, 남자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떼며 말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을 알아서 뭐 하려고! 이렇게 절뚝거리는 사람을 받아줄 아카데미가 있는 줄 알아?”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목청을 키우는 남자의 목소리 끝이 갈라지고 미세하게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사방으로 정처 없이 굴러가는 눈동자에서도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안은 합리적인 의심이 단순한 의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카데미가 어디인지 말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그는 모델 지망생일 리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안은 방 안 가득한 담배 연기처럼 희뿌연 남자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그때 재영이 가져온 서류를 남자 앞에 내밀며 말했다.
“저희 노크맨은 사고 배달 근로자분들의 재활과 일상 복귀를 돕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긴급 생활비 지원을 원하시면, 여기에 기재된 서류들을 저희에게 보내 주시면 간단한 심사를 통해…….”
남자가 재영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소리쳤다.
“그깟 긴급 생활비 몇 푼으로 내 인생을 퉁 치겠다, 이 말이야?”
남자의 흰자에 선 벌건 핏대를 보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보다 선명해졌다.
돈, 돈이었다.
자신을 모델 지망생이라 소개한 것도, 어쩌면 더 큰돈을 보상받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몸이 재산이나 다름없는 모델에게 다리 부상만큼 치명적인 일은 없을 테니까.
지안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했다.
배달 사고로 당장 생계에 어려움이 생긴 근로자들을 돕기 위해 출범한 게 배달 근로자 복지팀이었다.
한데, 그 선한 도움의 손길을 악용하려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게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세상이 다 제 마음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어두운 그림자와 마주할 때면 마음이 헛헛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재영이 남자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시단 걸 알겠지만, 회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방금 말씀드린 부분입니다. 그리고 선생님 사고의 경우, 신호 위반으로 인한 일방과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 측의 지원 범위가 적다고 할 수 있고요.”
“……뭐? 내가 나 좋자고 신호 위반을 한 줄 알아? 빠르게 배송해야 노크맨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남자의 막무가내식 주장에 지안이 참다못해 말을 끊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노크맨은 속도보다 안전을 중시합니다. 배달 근로자분들께 초기 연수에서도 그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교육하고 있다고 알고 있고요. 그럼에도 신호 위반을 한 근로자의 경우, 강한 벌점제를 통해 마땅한 징계를 주고 있지요. 회사를 위해, 노크맨의 이미지를 위해 신호 위반을 하셨다는 말씀은 삼가주시죠!”
단호하고도 트집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지안의 말에 남자는 씩씩거리다 겨우 뱉었다.
“……뭐? 뭐라고!”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남자는 지안을 해칠 듯 무섭게 노려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곤 분기탱천한 얼굴로 비열하게 뱉었다.
“좋아.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지. 노크맨이 얼마나 악덕한 기업인지 만천하에 알릴 수밖에. 젊은 모델 지망생의 인생을 짓밟은 노크맨의 비인간적인 복지에 대해 낱낱이 까발려 줄게!”
지안은 그런 남자 앞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눈동자를 똑똑히 응시하며 말했다.
“궁금하네요. 그 폭로가 노크맨에게 꽂는 비수가 될지, 본인의 거짓말에 꽂는 비수가 될지요.”
“……!”
지안의 촌철살인에 남자는 정곡이 찔린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지안은 그런 남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훑으며 말했다.
“인생은 절대 누가 대신 책임져주지 않아요. 선택도 본인이 하셨듯 책임도 본인이 지셔야 하는 거고요. 회사는 그저 최소한의 도의적인 도움만을 드릴 뿐입니다.”
재영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지안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 보다가 그녀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의 말에 힘을 실어주듯 재영이 짐을 챙기며 말했다.
“방금 드린 서류에 저희가 드릴 수 있는 도움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으니, 보시고 천천히 연락 주시죠.”
“…….”
남자는 분한 듯 이글거리는 눈빛을 허공에 고정한 채 재영의 말을 듣는 체 마는 체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재영이 주섬주섬 일어서자, 지안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연기로 가득한 집 안에 오래 머문 탓인지 일어서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휘청.
지안은 잠시 벽을 짚고 서 있다 얼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좁은 원룸 안에 남겨진 남자는 오래 참았다는 듯 연신 줄담배를 태웠다.
얼마 태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문질러 끈 뒤 저만치 문 쪽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조금 전, 저 문으로 나간 불쾌한 여자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궁금하네요. 그 폭로가 노크맨에게 꽂는 비수가 될지, 본인의 거짓말에 꽂는 비수가 될지요.’
거침없이 내뱉는 맹랑한 목소리부터 한치의 누그러짐조차 없는 단단한 눈동자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다.
작은 체구에 뭐 하나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여자가 풍기는 기분 나쁜 분위기.
티끌 없이 깨끗하고 고결한 사람인 척 입바른 소리만 뱉어내던 기분 나쁜 여자!
게다가 귓가에 박힌 마지막 말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했다.
‘인생은 절대 누가 대신 책임져주지 않아요. 선택도 본인이 하셨듯 책임도 본인이 지셔야 하는 거고요.’
그녀의 말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래된 모멸감이 떠올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남자는 재떨이를 집어 좁은 벽을 향해 사정없이 내던졌다.
쨍그랑.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거친 숨을 쌕쌕거렸다.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원룸 안, 짐승처럼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하던 방 안으로 낯선 소음이 끼어들었다.
지이이잉-.
가끔 윗집 주인이 바닥에 휴대폰을 두면 벽을 타고 진동이 내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리는 그때보다 훨씬 크고 선명했다.
남자의 눈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조금 전 두 여자가 머물다 간 자리 근처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빨랫감을 모아둔 더미 위에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휴대폰.
남자의 눈빛이 저만치서 가열하게 울어대고 있는 휴대폰 화면보다 더 훤하게 번쩍였다.
잽싸게 그쪽으로 다가가 낯선 휴대폰을 낚아챈 남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지이이잉-.
지치지 않고 울어대는 휴대폰 화면 위로 누군가의 이름이 떠 있었다.
[권도하]
화면에 뜬 이름을 본 남자의 눈빛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한동안 그대로 굳어 있던 남자가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서지안! 사무실에 갔더니 없더군. 벌써 퇴근한 건가? 그럼, 지금 바로 청담동으로 올래? 할머니께서 벌써 웨딩 플래너를 알아보셨어. 빨리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라셔. 우리가 결혼한다니 본인이 제일 신나셨다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많은 정보에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
-여보세요? 듣고 있어? 서지안?
낮은 중저음의 울림 좋은 목소리가 연신 대답을 재촉하자, 남자는 당황한 듯 빠르게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정확히 귀에 박혀 드는 여전한 목소리.
남자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서지안? 권도하가 분명 그랬어. 결혼한다고. 그럼…… 그 여자가 권도하의 여자?”
한껏 좁아 들었던 남자의 미간이 일순 펴지며,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일이 재미있어지고 있다는 듯.
***
“지안 씨, 눈썰미가 장난 아니다. 왜 난 그 용 문신에 술 담배를 보고도 의심 못 했을까.”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재영이 옆에 걷고 있는 지안을 보며 말했다.
“저도 사고로 다친 사람을 의심하고 싶진 않은데, 세상 사람이 다 우리 마음 같지 않으니, 방심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 잘 본 거야! 나쁜 마음으로 그러는 사람들한테 복지혜택이 돌아가면,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혜택을 못 받는 거잖아.”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지안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 분명 주머니에 넣어뒀었는데.
주머니 안에 있어야 할 휴대폰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열어 뒤져 보았지만, 거기에도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