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제 발로 굴러들어온 복
(9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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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제 발로 굴러들어온 복
2022.11.04.
휴대폰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때를 떠올리던 지안의 미간 사이가 급격히 좁아졌다.
불현듯 하나의 장면이 빠르게 스쳐 갔다.
아까 원룸을 나오기 전, 지독한 담배 냄새에 현기증이 돌아 살짝 휘청거렸던 순간.
어쩌면 그때 외투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안은 깊게 잡혔던 이마 주름을 풀며 말했다.
“부장님, 저 방금 그 집에 휴대폰을 놓고 온 것 같아요!”
“뭐?”
“얼른 가서 찾아올게요.”
“그럼 같이 가자, 지안 씨.”
재영이 붙잡으며 말하자 지안은 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봤다.
내려올 땐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를 땐 몇 번의 고비를 맞이해야 하는 험난한 오르막길.
보는 것만으로 숨이 차는 길이었다.
그런 길에 재영을 동행케 해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다. 지안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혼자 얼른 다녀올게요.”
“그래도. 그 이상한 남자 있는 델 어떻게 혼자 보내.”
재영의 만류에도 지안은 막무가내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 빨리 휴대폰만 찾아서 나올게요. 부장님,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잰걸음으로 언덕을 한달음에 뛰어 올라갔다.
“아니, 그래도…… 지안 씨!”
재영은 금세 저만치 멀어진 지안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외쳤다.
허공을 향해 뻗은 재영의 빈손이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금세 오르막길을 정복한 지안은 어렵게 만난 평지 위에서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심각한 운동 부족을 또 한 번 격하게 실감했다.
도하를 간병할 때는 매일 의무적으로 홈 트레이닝을 하곤 했었다. 간병이야말로 기약 없는 장기전이라 체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간병인이 건강해야 환자의 곁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었기에.
하지만 도하가 깨어나고 다시 건강을 되찾은 이후로는 어쩌다 보니 운동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반성 아닌 반성을 하며 지안은 조금 전 나온 5층짜리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어둑하고 쾌쾌한 지하 복도에 들어서자, 저도 모르게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휴대폰만 찾아 나오면 된다고 여겼는데, 막상 이상한 남자가 홀로 있는 집에 다시 들어간다 생각하니 맥이 제멋대로 널을 뛰었다.
‘괜찮아. 쫄 거 없어.’
애써 긴장을 털어내며 BO5호 팻말이 보이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딩동-.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초인종을 누르고 말없이 기다리는데 역시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이번에는 직접 문을 두드려 남자를 불러 보았다.
똑똑.
“저기요. 안에 계세요? 좀 전에 상담차 찾아뵀던 케이원 직원인데요.”
“…….”
똑똑.
“저기요. 안에 안 계세요?”
재차 부르던 순간,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 열려 있다니까!”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남자는 문을 아예 열어두는 모양이었다.
하긴, 거동이 불편해서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는 게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지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문을 잡아당겼다.
여전히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방 안을 보자, 마음이 다시 급해졌다.
얼른 휴대폰을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좁은 현관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한눈에 보이는 방 한쪽 구석 벽에 기대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지안은 얼른 시선을 떼며 말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놓고 간 게 있어서요.”
“…….”
남자는 대꾸 없이 지안을 빤히 지켜보았다.
소리 없이 따라오는 시선이 불편해서 지안은 살짝 경직된 몸짓으로 조금 전 자신이 앉아 있었던 자리 주변을 맴돌았다.
좁은 방이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익숙한 기기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배회하던 시선이 원치 않게 남자와 마주친 순간이었다.
남자는 당황한 듯 서성이는 지안이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려 비열한 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팔을 홱 내밀었다.
남자의 돌발 행동에 놀란 그녀가 한 발자국 다급히 물러섰다.
그리고 뒤늦게 허공을 향해 뻗어 있는 그의 팔을 확인했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순간 요동치듯 흔들렸다.
남자가 내민 팔, 정확히는 그의 손안에 있는 물건은 그녀가 애타게 찾던 휴대폰이었다.
“이것 때문에 다시 온 거 아닌가?”
남자가 비딱한 목소리로 묻자, 지안은 냉큼 남자의 손에 있던 휴대폰을 낚아채며 말했다.
“맞아요.”
“…….”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지안은 꾸벅 빠르게 인사를 하곤 얼른 몸을 돌렸다.
돌아서 나오는 내내 목덜미에서 싸한 기운이 들어서 기가 질렸다.
하지만 남자는 생각보다 깔끔히 그녀를 보내 주었다.
괜한 트집을 잡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원룸 건물을 나오며 완전히 사그라졌다.
“휴우.”
오르막길을 오를 때보다 더 버거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방금 나온 건물을 돌아보던 지안의 손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이이잉-.
휴대폰이 주인의 손에 돌아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부리나케 걸려온 전화.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지안의 손이 분주해졌다.
“여보세요?”
-이제야 받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하의 성마른 목소리에 지안은 놀란 듯 느리게 대꾸했다.
“……네?”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네?”
-전화 걸어 혼자 실컷 떠들었는데, 아무 대꾸 없이 듣고 있다가 뚝 끊어버렸잖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잠시 휴대폰을 잃어버렸고, 이제 겨우 찾아 돌아가는 길인데 언제 그와 통화를 했단 말인가.
벙찐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지안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설마, 아까 그 남자가?
지안은 확인할 게 있는 듯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하 씨, 그러니까 조금 전에 저랑 통화했었단 말이죠?”
-그래. 나 혼자 떠들었고, 당신은 아무 대꾸 없이 듣고만 있다가 끊었지.
“…….”
남자가 제 휴대폰을 들고 있던 이유가 있었다.
내 전화를 마음대로 받았던 거야.
잠시나마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고민했던 게 무색해졌다.
지안은 한껏 미간을 좁힌 채 저만치 멀어진 원룸 건물을 쓱 돌아봤다.
휴대폰 스피커에서는 영문을 모르는 도하의 갈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당신,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지안은 차분히 대답했다.
“외근 나왔다가 잠깐 휴대폰을 잃어버렸었어요. 지금 막 찾아서 나오는 길이고요.”
-뭐? 그럼 아까 통화는…….
“휴대폰을 발견한 분이 모르고 받았었나 봐요.”
-……그렇군. 중요한 소식을 괜한 사람한테 떠들어댄 셈이군.”
“……중요한 소식이요?”
도하는 지안 아닌 다른 이에게 먼저 소식을 전했다는 사실에 살짝 김이 샌 듯 전보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께서 오늘 웨딩 플래너와 약속을 잡아두셨어.
“네? 벌써요?”
-그래. 할머니 성격 당신도 알잖아. 쇠뿔도 단김에 빼는 분이신 거.
도하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멀리서 찾을 것 없이, 할머니 정순을 완전히 빼다 박았다는 것을 지안은 잘 알고 있었다.
“……아.”
-외근 끝났으면 데리러 갈게. 청담동으로 이동해야 하거든.
지안은 생각의 여지 없이 냉큼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직접 갈게요.”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재영을 생각해서라도 혼자 그렇게 퇴근할 순 없었다.
-괜찮겠어? 목소리만 들어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괜찮아요. 금방 갈 테니까, 이따 봐요.”
-……그래. 조심히 와.
“네.”
도하의 말마따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외근에서 만난 이상한 남자 때문인지, 번갯불처럼 진행되고 있는 두 번째 결혼 준비 때문인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생각에 잠겼던 지안은 다시 걸음을 재촉해 언덕을 내려갔다.
***
좁은 원룸 안.
해가 저물어 볕 하나 들지 않는 방안, 구석 자리에 몸을 기대앉은 남자의 얼굴 위로 은밀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권도하. 권도하의 여자였다니…….’
몇 시간 전만 해도 상상치 못한 전개였다. 권도하의 여자가 제 발로 앞에 나타날 줄은.
어쩐지 처음 보는 여자에게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었다.
사랑하는 사이는 닮는다던 말이 정말일까.
권도하와 서지안이라는 여자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유난히 짙고 단단한 눈동자부터 어떤 말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고고하고도 강단 있는 기세까지.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그 몹쓸 분위기까지도 매우 똑 닮아 있었다.
게다가 하는 말까지…….
‘인생은 절대 누가 대신 책임져주지 않아요. 선택도 본인이 하셨듯 책임도 본인이 지셔야 하는 거고요.’
몇 시간 전, 그녀가 던지고 간 말이 가슴 속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또 다른 기억을 소환해냈다.
묵은 기억을 끄집어 올리는 남자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3년 전, 무작정 찾아간 케이원 대표실.
‘하린이 누나가 연락을 끊어서, 예비 매형을 찾아온 거예요.
’
‘무슨 일로…… 나를.’
‘누나가 약속을 안 지키니까,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잖아요. 준다던 돈도 안 주고, 매형 회사에 취직시켜준다는 약속이랑 차를 뽑아준다던 약속도. 뭐 하나 지킨 게 없단 말이죠! 난 그때 정말 내 인생을 걸고 한 일인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라커룸 강도 사건. 그거 내가 한 건데. 모르셨죠?’
‘…….’
‘누나가 한 번만 도와달라고 애원해서 했어요. 우리끼리 짜고 전부.’
예정대로 손에 넣을 수 없다면, 파멸밖에 답이 없었다.
하린의 배신으로 눈이 뒤집힌 제이슨은 하린의 추악한 민낯을 완전히 고발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권도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충격으로 하린을 증오하고 어쩌면, 사실을 전해준 저에게 일말의 보상이라도 해 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도하가 미동 없는 눈빛으로 던진 한마디에, 모든 기대는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인생은 도박게임이 아니야. 아무리 민하린이 감언이설로 꾀였다고 한들, 그런 무모한 일에 인생을 걸기로 선택한 건 당신 몫이야. 그러니까 제이슨, 당신이나 민하린이나 다 똑같은 인간이란 소리야!’
“뭐, 똑같은 인간?”
그날 느낀 모멸감이 다시 떠오른 듯 두 눈동자에 분노의 불길이 들끓었다.
“어디 똑같은 인간인지 아닌지 두고 보자고. 배신자 민하린은 실패했지만, 난 실패하지 않을 거니까!”
처음엔 단순한 분노와 보복심으로 도하와 케이원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던 중 근래 배달 근로자 사고가 잦다는 소식을 듣곤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노크맨으로 잠입해 고의로 사고를 내고, 제법 묵직한 보상금을 타내는 일.
쉬이 틈을 주지 않는 권도하에게 직접 복수하는 것보다, 보상금을 받아 유용하게 쓰는 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이었다.
고심 끝에 꾸며낸 스토리가 바로 모델 지망생 사연이었다.
모델로 활약해야 할 청년이 배달 사고로 인생을 망쳤다면 뜯어낼 수 있는 보상금도 훨씬 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깟 거짓말보다 훨씬 솔깃하고 탐나는 미끼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으니.
“하하하, 하하.”
좁은 원룸이 가득 울릴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