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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운명은 존재한다 (102/110)


102화. 운명은 존재한다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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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투명한 눈동자를 눈에 담던 도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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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이야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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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유리구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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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베라 안은 1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손수 제작한 드레스의 주인을 찾는 중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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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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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오늘 아침 우리 두 사람의 사연을 기사로 접했고.”

한편에 서서 듣고 있던 베라 안이 서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대화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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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상 가장 겁 없는 간병인과 세상에서 가장 병약한 재벌 후계자의 러브스토리에 큰 감명을 받았답니다.”

위트 있는 그녀의 이야기에 도하와 지안의 입가로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베라 안은 소녀 같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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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없이 많은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고, 수많은 사랑의 결실을 지켜보았지만 늘 반신반의했었어요. 이 세상에 정말 운명이 존재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었죠.”

도하와 지안도 진지한 얼굴로 베라 안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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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사람의 기사를 보며 깨달았어요. 운명이란 존재한다는 걸. 죽음을 앞둔 한 남자를 정성껏 보살피고 결혼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주었던 여인과 그 정성과 사랑에 보답하듯 깨어난 남자. 두 사람이 원래 사랑하던 사이였다면 두 분의 결혼은 어쩌면 당연한 결말이었겠죠. 하지만 두 사람은 3년 만에 처음 보는 사이였어요. 그리고 기적처럼 사랑에 빠졌고요.”

베라 안은 두 손을 심장 쪽에 모으며 자신이 받은 감동을 적극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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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운명 아니고 뭐겠어요?”

확신에 차서 되묻는 그녀의 모습에 도하는 지긋이 미소 지으며 지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운명이라니.

저를 향해 고정된 시선에 돌아본 지안은 도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속눈썹을 떨었다.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워서 도하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만개했다.

도하가 웃자 거울처럼 따라 웃는 지안의 모습을 지켜보던 베라 안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조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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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준비해주세요.”

오래 지나지 않아 미팅룸 왼편에 난 문 안으로 들어갔던 조수가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미팅룸 안에 전시돼 있던 드레스들을 한순간에 병풍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이로운 아름다움.

도하와 지안은 설명을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들 앞으로 옮겨지고 있는 마네킹 위 영롱한 빛깔의 드레스가 바로 베라 안이 10년을 공들여 수 제작한 드레스라는 것을.

시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드레스를 지켜보는 지안의 두 눈망울이 조명을 켠 듯 반짝였다.

장인의 시간과 정성으로 태어난 드레스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함, 숭고함 그 자체였다.

한눈에 화려하게 들어왔다가 금방 시시해지는 드레스가 아닌,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에 젖어드는 드레스.

마치 두 사람의 인연 같았다.

번쩍 스파크가 튄 사랑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든 사랑.

그 사랑에 이름을 붙여주듯 베라 안이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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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레스의 이름은 ‘운명’이에요.”

드레스와 이름을 음미하듯 멈춰 있던 도하가 나직이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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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를 보는 안목도, 드레스에 관한 지식도 없지만, 이 드레스가 얼마나 특별한지는 느껴집니다.”

도하의 감상에 흐뭇한 미소를 짓던 베라 안이 다시금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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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레스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건, 디자이너로서 권태감과 매너리즘에 빠졌을 무렵이에요. 어느 날 드레스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내가 만든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을 봐도 설레지 않고요. 그래서 ‘운명 프로젝트’를 시작한 겁니다. 이 세상에 정말 운명 같은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의 완성에 일조할 드레스. 그런 가슴 뛰고 설레는 드레스를 만들어보리라.”

말을 마친 베라 안이 이제 지안의 순서라는 듯 지그시 시선을 보냈다.

지안은 그녀가 보낸 무언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칭송하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도, 이제 베라 안이 10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만든 운명을 입어볼 시간이라는 것도.

모두 꿈에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운명의 작용이 아닌가 싶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안은 단 한 번도 왕자와 사람들 앞에서 유리구두를 신어 보여야 했던 신데렐라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본 적 없었다.

신데렐라는 자신이 유리구두의 주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금 나았을까.

지안은 베라 안과 도하를 실망하게 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처음 입어보는 드레스가 과연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몰라 긴장이 됐다.

탈의실에 들어간 순간부터 내내 맥이 미친 듯 널을 뛰었다.

아름다움에는 늘 고통이 따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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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힘 좋은 헬퍼들이 여기저기서 끈을 조이고 아름다운 라인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얼마 후 마법처럼 거울 앞에 선 순간.

지안은 절로 벌어진 입술을 다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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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옷은 눈으로 볼 때와 직접 입었을 때가 완전히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성격이 급한 헬퍼가 커튼 밖을 향해 급히 소리치는 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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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신부님 나오십니다.”

지안은 거울 쪽을 향해 있던 몸을 천천히 돌려, 닫힌 커튼 쪽을 보고 섰다.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천천히 커튼이 걷히는 순간.

마치 긴 연극을 마치고 커튼콜의 순간을 맞은 배우처럼, 그 짧은 몇 초의 시간 동안 많은 장면이 거짓말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3년 전 새벽, 처음 도하의 사고 현장을 발견했던 순간.

3년을 매일같이 도하의 곁에서 울고 웃었던 시간들.

죽음을 앞둔 남자가 잠든 침대 앞으로 신부 행진을 했던 시간,

깨어난 그와 처음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

냉기만 뿜을 것 같던 입술이 뜨겁게 사랑을 속삭였던 순간,

과거를 바꿔서라도 함께 행진하고 싶다던 세상에 둘도 없을 프러포즈까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열린 커튼 사이로 보이는 도하의 흔들리는 눈동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일그러진 것 같기도, 벅찬 것 같기도, 서글픈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얼굴.

그의 까만 눈동자에 쓰인 감정은 한마디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꾹 다문 그의 입술 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에 놀란 지안의 귓가로 베라 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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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타나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박수 소리.

그 순간의 공기와 장면이 사진 속에 박제되듯 한 컷 한 컷 쪼개어졌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엔 바위처럼 단단하고 강인하던 한 남자의 눈물이 담겼다.

그 어떤 말도 리액션도 도하의 뜨거운 눈물을 이길 순 없었다.

죽음의 문턱을 다녀와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

그의 눈가를 적신 투명한 눈물에, 그의 모든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았다.

도하의 가슴을 흔든 뜨거운 감동이, 먹먹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지안도 눈가가 붉어졌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이 순간을 놓치기 싫다는 듯 도하는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지안을 눈에 담았다.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순간을 함께하는 것만으로 지난 아픔의 시간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

도하는 말없이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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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태어나 본 것 중,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며 보게 될 수많은 것 중 가장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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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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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길 잘했어. 다시 깨어나길 정말 잘했어.”

도하는 새로 주어진 생에 대한 감사로 눈앞의 아름다움을 대신했다.

그게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찬사인지 알기에 지안의 입가에도 해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먹먹해진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듯 베라 안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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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랑 같아서 이 얘긴 하지 않으려 했는데…….”

도하가 눈가를 거칠게 닦아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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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력에 자랑이라는 표현조차 겸손하신 것 아닙니까?”

베라 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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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드레스를 눈독 들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답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부터, 유럽에 트렁크 쇼 출장을 갔을 땐 심지어 대통령의 따님, 그러니까 영애분의 웨딩드레스로 달라는 이야기도 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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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렵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요.”

도하의 말에 베라 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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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 드레스의 주인을 찾았는데, 적임자를 찾지 못해서 나중엔 후회도 했답니다. 이 드레스를 간절히 원하던 사람에게 그냥 주었어야 했나. 이대로 주인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막한 생각도 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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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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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아니었다면, 제 프로젝트는 미궁에 빠졌을지도 모르죠.”

베라 안의 이야기를 듣던 지안이 살며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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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요?”

그녀의 말에 정답이라는 듯 모두 약속한 것처럼 싱긋 웃었다.

그때 금발의 여자가 베라 안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다급히 전했다.

여자의 이야기를 듣던 베라 안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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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쩌죠. 두 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출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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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도하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로 되묻자, 베라 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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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행이죠. 출국 전에 두 분을 이렇게 뵐 수 있어서.”

지안이 서둘러 드레스를 벗으려는 듯 피팅룸 쪽을 살피자, 베라 안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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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이제 그 드레스는 서지안 양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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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놀란 지안이 토끼 눈을 뜨고 묻자, 베라 안은 다시금 그녀의 드레스 자태를 훑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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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지난 10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신 거로 저는 충분합니다. 결혼식 전, 드레스 가봉은 서울에 있는 제 협력 업체에 부탁해 놓도록 할게요.”

듣고 있던 도하가 다급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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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오랜 시간 힘들게 만드신 드레스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이번에는 베라 안이 도하의 말허리를 자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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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드레스값은 내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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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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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하는 드레스값은…… 두 분이 절대 이 드레스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 영원히 운명으로 남아주겠다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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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만큼이나 자신만의 철학이 느껴지는 베라 안의 이야기에 도하와 지안은 잠시 그 말을 음미하듯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드레스 앞에서 나직이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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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도하가 앞서 고백하자, 지안도 나직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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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레스에 부끄럽지 않게 살게요.”

이제야 드레스를 보내줄 수 있겠다는 듯 베라 안은 후련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안은 말없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드레스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운명은 존재한다는 증거이자, 운명은 영원하다는 약속이 담긴 옷.

거울 속에서 저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동자를 발견한 지안의 얼굴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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