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나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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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나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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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나만 믿어
2022.11.25.
낡은 오토바이 한 대가 먼지 바람을 거칠게 일으키며 호텔 앞에 멈추어 섰다.
헬멧을 벗은 남자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호텔 입구 쪽을 예리하게 응시했다.
호텔 외벽 유리에 비친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제이슨이었다.
그는 얼른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위치 정보를 가리키던 붉은 아이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제이슨은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들어 피식 웃곤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지안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위치추적 애플리케이션이 모처럼 흥미롭게 작동했다.
그녀가 흘리고 간 휴대폰에 몰래 깔아두었던 앱이 드디어 빛을 발한 거다.
늘 회사와 집뿐이던 그녀의 평범한 동선에 시시해지려던 찰나, 흥미로운 알림이 울린 건 한 시간 전이었다.
업무시간에 버젓이 회사를 벗어나 도착한 곳이 으슥한 곳에 자리한 특급 호텔?
직접 찾아가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만큼 구미가 당겼다.
대낮에 회사 아닌 호텔에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지.
혼자일지, 혼자가 아니라면 누구와 동행한 것일지.
예상대로 권도하와 함께라면 그건 그것대로 흥미로웠다.
공과 사가 누구보다 철저한 권도하가 여자 하나에 눈이 뒤집혀 업무시간에 회사를 내팽개치고 대낮부터 호텔에 드나든다는 것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권도하가 정말 사리 분별을 못할 만큼 여자에 푹 빠졌다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증거였다.
흡족한 미소를 짓던 제이슨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또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서지안과 호텔에 동행한 사람이 권도하가 아니라면?
서지안에게 다른 내연남이 있다?
의식도 없는 남자와의 결혼까지 감행한 여자이니만큼, 일반인의 생각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무섭고 어두운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두 사람의 결혼 발표까지 난 마당에 서지안에게 어두운 비밀이 있다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잽싸게 알아내 케이원 그룹과 권도하를 협박한다면…….
어느 쪽이든 얻을 게 많았다. 보여 주기 식으로 오래 유지하던 깁스를 풀어 헤치고 달려 나온 것이 후회 없을 만큼.
위치추적 앱의 붉은 점이 점점 호텔 앞 주차장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호텔 입구를 나오는 두 남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실루엣.
제이슨은 조금 전 써 내려간 시나리오 중 하나를 얼른 머릿속에서 폐기했다.
모델 지망생이라는 제 거짓말을 서지안이 쉽게 믿지 않았던 건, 모델 못지않은 남자를 매일 보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월한 피지컬에 범접하기 힘든 재수 없는 분위기. 멀리서 봐도 권도하가 확실했다.
큰 사고와 3년이라는 투병 속에도 더 강해진 건지 다부진 몸짓과 걸음걸이가 전보다 더 힘 있어 보였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절도있는 몸짓과 달리 표정만은 녹아내릴 듯 느슨해 보였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던 이전의 권도하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지안을 향해 느슨하게 풀린 눈동자부터 주체할 수 없이 파도치는 입꼬리와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간 광대까지.
3년 전, 서늘한 눈빛으로 저를 다그치던 냉혈한은 온데간데없고, 사랑에 빠진 바보 같은 모습의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손을 꼭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을 유심히 보던 제이슨은 순간 굳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러곤 재빨리 커다란 가로수 뒤로 몸을 감췄다.
“왜 그래요, 도하 씨?”
도하는 우뚝 걸음을 멈춘 채 저만치에 세워진 오토바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
지안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눈을 맞추며 물었다.
“도하 씨?”
도하는 여전히 그곳에 눈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누가 저기 있는 것 같아서.”
지안은 주변을 쓱 돌아보고는 의아한 듯 말했다.
“아무도 안 보이는데요.”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도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결혼 기사가 발표된 날이라 그런가.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릴 지켜보는 느낌이야.”
“……뭐라고요?”
지안이 헛웃음을 치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올라탄 차가 홀연히 그곳을 떠난 후, 제이슨은 천천히 가로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저만치 멀어져가는 도하의 차를 바라보는 제이슨의 입가로 저열한 미소가 번졌다.
***
신데렐라 앞에 요정이 나타나 멋진 유리구두와 호박 마차를 준비해 주었듯, 운명 같은 웨딩드레스를 만난 후론 모든 게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능력 있는 웨딩 플래너는 요술 봉을 휘두르고 다니듯 복잡하다는 결혼 준비를 단숨에 완성해냈다.
결혼식장은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국내 신랑 신부들의 워너비 1순위로 꼽히는 케이원 호텔의 야외 예식장이 낙점되었다.
가까운 하객들은 물론, 케이원 그룹 직원들도 누구나 찾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예식을 만들기로 했다.
언젠가 공원에서 만났던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두 사람의 웨딩 화보가 담기기까지.
지안은 빠르게 흘러간 지난 시간이 여전히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쉬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결혼식 D-1.
내일, 벌써 내일이라니.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언젠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진짜 짝을 만나면 말이야. 눈 감았다가 뜨면 결혼식장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니까.’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안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운명은 무엇으로도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 강한 힘이 일하기 시작하면, 나약한 인간은 소용돌이치듯 운명의 이끌림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놀라운 힘에 얼떨떨해하며 눈을 떴을 때, 남은 생을 함께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옆에 있다는 걸.
웨딩 테이블에 올라갈 사진을 최종으로 확인하던 지안의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눈부시게 휘었다.
지안은 모니터 속,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멋진 남자의 얼굴을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하염없이 보고 싶어진다는 건. 운명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금세 애틋해진 눈동자가 깊게 빛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안이 거기 있니?”
정순의 목소리였다.
“네. 할머님.”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정순은 오랜만에 정원 데이트를 신청했다.
언제 걸어도 좋은 고즈넉하고 푸릇한 정원.
도하가 의식 없이 잠들어 있을 땐,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이곳을 거닐곤 했었다.
초록의 정원은 근심을 안고 누볐을 때도 큰 위안을 주었지만, 근심 없이 걸을 때 더 큰 행복감과 여유를 안겨 주었다.
말없이 울창한 나뭇잎을 올려다보던 정순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기분이 어떠니? 내일 새신부가 되는데.”
“……떨려요. 아직 실감도 안 나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지안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정순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서 우리 지안이는 잘할 거야.”
“……네?”
맞는 말인데, 어감이 이상해서 지안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정순도 뒤늦게 깨닫고는 정정하듯 말했다.
“말이 좀 이상한가. 누가 보면 재혼인 줄 알겠구나. 하하.”
“하하하.”
지안이 따라 웃자 정순은 주름진 손을 펴 지안의 마른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고맙다. 지안아. 이렇게 할미 앞에, 우리 도하 앞에 나타나 줘서.”
“……할머님.”
정순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보자, 지안도 코끝이 시큰해졌다.
정순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툭툭 누르며 말했다.
“할미가 기뻐서 그래. 너무 행복해서.”
지안도 행복했다. 행복해하는 정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몰래 눈물 흘리던 정순의 아픈 시간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지안은 정순이 행복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이제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때 저만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도하 왔구나.”
“어. 도하 씨,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지안이 의아한 듯 혼잣말을 하자, 정순이 말을 받았다.
“내가 불렀다. 두 사람한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
테라스로 자리를 옮긴 세 사람 앞으로 향이 깊은 허브 티가 놓였다.
따뜻한 차로 목을 축인 정순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두 사람을 부른 건…….”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정순답지 않게 말끝이 하염없이 흐려지자, 두 사람의 눈가에 조금씩 긴장이 스몄다.
“……말씀하세요. 할머니.”
도하가 말하자, 정순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여길 떠나려무나.”
“……!”
“……!”
약속이라도 한 듯 도하와 지안은 굳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먼저 입술을 뗀 건 도하였다.
“떠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순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깊은 눈망울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팠던 기억, 기약 없이 기다린 기억. 가슴 졸이고 힘들었던 기억이 없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무나.”
“……할머님.”
정순의 무얼 걱정하는지, 그 마음이 느껴져서 지안은 목소리마저 먹먹해졌다.
“진작에 두 사람을 분가시켰어야 했는데, 이 늙은이 욕심에 여태껏 여기 둔 게 아닌가 싶어. 이제는 정말 보내줄 때가 되었지.”
“…….”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이곳은 내가 잘 관리하고 지키고 있을 테니. 이제 남들처럼 풋풋하고 싱그럽게 살렴. 깨소금 냄새 풀풀 풍기면서, 신혼 재미도 마음껏 즐기며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지안은 사고 체계가 멎은 듯 멍해졌다.
정든 이곳은 물론이고, 정순과 떨어져 사는 건 상상이 안 됐다.
몇 번을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할머님, 하지만…….”
순간 도하가 지안의 말을 막듯 끼어들었다.
“할머니 뜻이 정 그러시다면…… 저희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해 보겠습니다.”
지안은 진심이냐는 듯 도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인 건지 도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달뜬 미소로 말했다.
“대가족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신혼 땐 신혼만의 낭만과 추억을 만드는 것도 중요할 테니까요.”
신혼만의 낭만과 추억이라는 말을 그가 힘주어 말하자, 지안은 그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신혼의 낭만과 추억…….
정순은 도하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렇고말고. 지금 당장은 떨어져 지내는 게 서운할 수 있지만,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거란다, 그렇게 진짜 부부가 되는 거고.”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진짜 부부가 되어간다.
지안은 밤이 깊도록 정순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그녀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걸 느낀 도하가 나직이 속삭였다.
“잠이 안 와?”
“네.”
“내일 결혼식 때문에?”
“결혼식도 결혼식이고, 분가도 분가고.”
지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자, 도하는 일부러 씩씩한 투로 말했다.
“내가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
“결혼식장에도, 새로 시작할 집에도 내가 있잖아. 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
“난 서지안만 있으면 되는데.”
“……도하 씨.”
“나만 믿고 따라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뒤에서 금세 지안을 꼭 안은 도하가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늘 당신 옆에 내가 있다는…….
아름다운 영어 노랫말의 자장가가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결혼 전야, 잠 못 드는 신부의 귓가에 은은하게 스며드는 감미로운 세레나데.
그리고 가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
긴장 상태였던 몸이 거짓말처럼 풀리며 그제야 기분 좋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