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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무엇도 막을 수 없는 (105/110)


105화. 무엇도 막을 수 없는
2022.12.02.



 
황량한 폐공장 앞.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지안은 자동차 조수석에 몸이 결박되고, 테이프로 입이 막힌 채 남자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한 시간 전, 눈앞에 나타난 낯선 웨딩 카에 절대 오르지 않았을 거다.

처음 보는 자동차 앞에서 그녀가 잠시 망설이자, 선글라스를 쓴 운전석 남자는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


‘오늘 결혼식을 위해 권도하 대표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웨딩 카입니다.’


‘……도하 씨는요?’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생기셔서 결혼식장으로 바로 오신다고, 서지안 사모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곧 도착한다던 그의 마지막 통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결혼이라는 행복한 이벤트 앞에 한없이 누그러진 경계심은 평소처럼 날카롭지 못했다.

그녀가 도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든 순간, 남자는 서둘러 말했다.


‘안내받으셨을지 모르지만, 예식장 사정으로 식전 리허설을 예정보다 빨리 진행한다더군요.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자연스러운 남자의 연기에 미처 의심하지 못했다.

결혼식 당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할 신부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지안은 그저 자신이 늦어 예식 일정에 지장을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모두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그냥 넘겨선 안 됐던, 어디선가 들어본 듯 귀에 익은 목소리까지도…….

자동차가 케이원 호텔이 있는 시내가 아닌 낯선 외곽을 향해가자, 그녀는 놀란 듯 외쳤다.


‘호텔은 이쪽이 아니지 않나요?’


‘시내 방면이 막혀서 지름길로 가고 있는 겁니다.’

남자는 그 말을 뱉은 뒤 더운 듯 걸치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탓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다른 곳에 남자에 대한 힌트가 있었다.

정장 속에 받쳐입은 반소매 셔츠 사이로 드러난 팔을 본 지안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언젠가 본 적 있던 시퍼런 용 문신.

문신을 본 순간, 어디선가 들어본 법한 목소리와 저를 향해 버럭 소리치던 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때 그 원룸…… 가짜 모델 지망생……!


‘……!’

놀란 지안의 두 눈이 한곳에 고정된 채 요동치듯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제 팔에 머무른 것을 확인한 제이슨은 일이 귀찮게 되었다는 듯 거칠게 차를 갓길에 멈춰 세웠다.

지안이 도망치려 문손잡이를 잡자, 제이슨은 거칠게 그녀를 막아서곤 미리 준비해둔 끈으로 시트와 몸을 하나로 칭칭 감았다.

단숨에 그녀의 가방을 찾아낸 그는 전원을 종료하고, 그녀가 어떤 소리도 낼 수 없게 테이프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출발한 차는 인적 없는 폐공장으로 들어섰다.

지옥 같은 순간을 떠올리던 지안의 눈에 통화를 마친 제이슨이 그녀의 휴대폰을 저만치 멀리 던져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는 자동차에 장식되어 있던 웨딩 장식을 거칠게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러곤 다시 차에 올랐다.

지안은 불의에 저항하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이슨을 노려봤다.

입술은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마음과 모든 생각을 담은 눈빛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 눈빛은 뭐지? 내가 원망스러워? 그런 거야?”

“…….”

“이봐, 당신 입으로 그러지 않았나? 인생은 누가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그러니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이 차에 제 발로 오른 건 서지안, 당신이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네가 네 발로 직접 선택한 결과라고!”

광기가 느껴지는 제이슨의 눈빛을 지안은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비록 몸이 묶이고 소리 낼 수 없었지만, 비열한 남자에게 겁먹거나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얌전히 가자고. 얌전히.”

제이슨은 야비한 미소를 삼키며 다시 액셀을 밟았다.

***

지안의 휴대폰 위치가 마지막으로 잡힌 서울 외곽의 폐공장에 도착한 도하는 미친 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예상했듯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주변을 맴돌던 도하의 눈에 회색빛의 폐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웨딩 카에 장식되었던 분홍빛 리본과 터져버린 풍선들.

그것들을 말없이 줍는 도하의 눈빛이 말 못 할 근심을 안고 크게 일렁였다.

그때 함께 온 강 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손으로 경찰차 본 네트를 짚은 채 전화를 받던 강 형사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뭐? 차량이 발견됐다고?”

-네. 30분 전, 만수 터널 입구로 1128차량이 들어간 게 찍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오는 곳 어디에도 1128차량은 없었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터널 입구로 들어간 차가 나오지 않았다는 소리야 뭐야?”

-아무래도 가변형 번호판을 단 게 아닌가 싶습니다. 롤 스크린 방식으로 가짜 번호판이 실제 번호판을 가리는 번호판 말입니다.

“뭐? 가변형 번호판! 이게 아주 재밌게 일을 꾸몄구먼.”

-같은 시간 터널을 통과한 차량 번호를 일일이 대조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인력 최대한 동원해서 빨리, 빠르게 찾아내야 해!”

통화를 마친 강 형사가 앞이마를 구긴 채 도하를 응시했다.

그의 표정만으로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란 것을 직감한 도하의 눈이 무겁게 흔들렸다.

도하를 지켜보던 강 형사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여긴 진작 떠난 것 같으니 이만 가시죠.”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도하는 아쉬움에 다시 한번 공장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천천히 공장 주변을 스캔하던 시선이 공장 바로 옆 버려진 지 오래돼 보이는 가문 논두렁에 잠시 머물렀다.

메말라 거칠게 뒤틀린 누런 흙더미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굳은 듯 서 있던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권 대표님!”

저만치서 부르는 강 형사의 목소리에도 도하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숙인 채 팔을 뻗어 무언가를 집어 든 도하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곳에 버려져 있던 건 다름 아닌 지안의 휴대폰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흔적에 도하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작은 휴대폰을 손에 쥐자, 불과 얼마 전 그녀의 손에서 전화기를 빼앗아 비밀번호를 걸었던 기억이 났다.

1010235.

번호에 담긴 유치하면서 간질간질한 의미에 함께 웃고 떠들었던 행복한 순간이 꿈속의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납치 차량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터널 부근을 향해 달려가는 차 안.

지안의 빈 휴대폰을 만지며 차창 밖을 바라보는 도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서지안, 어디 있는 거야.’

공허한 시선 끝에 빠르게 스쳐 가는 무채색 풍경들.

세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졌단 이유로 모든 것이 색 바란 듯 흐린 세상이었다.

그때 재킷 주머니에서 엷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 아닌 다른 연락은 모두 의미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지려는 순간, 왠지 모를 이끌림이 그의 손을 움직였다.

힘없이 휴대폰을 꺼내 확인한 도하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

식은땀 한줄기가 서늘하게 등줄기로 흘러내렸다.

기회가 찾아온 건 예상치 못한 시점이었다.

무섭게 질주하던 차를 멈춰 세운 건 주유 경고등 불빛이었다.

제이슨은 귀찮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인적이 드문 셀프 주유소를 찾아 들어갔다.

차가 주유소에 들어서는 순간, 지안의 머리에도 실낱같은 희망의 등이 켜졌다.

그리고 그 희망에 속도를 붙인 건 제이슨의 부주의함이었다.

안전 벨트를 푼 제이슨은 아까 벗어둔 정장 재킷에서 지갑을 꺼내선 카드 한 장만 남기고 그대로 시트 위에 두고 내렸다.

그가 내려 두고 간 재킷 사이로 흘러나온 휴대폰을 발견한 지안의 두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제 휴대폰은 제이슨의 손에 넘어가 먹통이 된 채 논두렁에 버려진 지 오래.

그 흔한 위치추적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한 SOS 수단이 되어 줄 수 있는 물건.

움직이는 위치추적 정보를 줄 수 있는 게 바로 눈앞에 있었다.

까맣게 선팅이 된 차창을 확인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운전석 쪽으로 기울였다.

몸이 꽁꽁 묶인 탓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몸을 기울인 뒤 손을 뻗었다.

몸은 조수석 시트와 한 몸처럼 묶여 있었지만, 손목은 묶이지 않아 짧은 거리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


‘조금만, 조금만 더.’

손끝에 휴대폰 끝자락이 기적처럼 닿는 순간, 이마에 맺힌 땀이 아찔하게 흘렀다.

힘껏 손가락을 뻗어 휴대폰을 비비듯 화면을 만지자, 기적처럼 화면이 열렸다.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 주유 안내 화면을 터치하는 제이슨이 보였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지안은 휴대폰 화면에 뜬 많은 앱 중 빠르게 메시지 아이콘을 찾았다.

메시지 창이 열리자마자 손끝의 감각을 최대한 사용해 빠르게 번호를 입력했다.

쫓기는 상황이라 그런지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었다.

잽싸게 도하의 번호를 입력한 후엔 고민의 여지 없이 무언가를 입력했다.

이 순간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자신을 알리고, SOS를 요청할 수 있는 문자.

중간중간 원치 않는 쉼표와 온점이 찍혔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어떤 오타가 섞여도 알아볼 수 있는 둘만의 신호가 있었으니.

[1,0;1.0..2,3.5.]

마지막 숫자를 입력한 그녀는 빠르게 보내기 버튼을 터치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카드와 영수증을 뽑은 제이슨이 그것을 확인하듯 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로 가기를 누른 후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렸다.

쾅.

그 소리에 지안은 심장이 터질 뻔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차 문을 열고 잠시 그녀와 운전석 시트에 헝클어진 재킷을 보던 그가 살짝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눈치챈 건 아닐까.

심장이 위태롭게 쪼그라들던 그 순간, 제이슨은 재킷 주머니 아래 흘러나와 있는 휴대폰을 대수롭지 않게 옷에 다시 집어넣고는 그대로 뒷좌석에 내던졌다.

지안은 소리 없이 안도했다.

다시 출발한 자동차는 거침없이 질주해 나갔다.

지안은 멍한 눈길로 차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을까.’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하고 난 직후라 온몸의 긴장이 쫙 풀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피로가 밀려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온다는 게 우스웠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그녀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근심이 내려앉은 무거운 속눈썹이 천천히 감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때려 밟는 소리에 지안은 악몽을 꾼 사람처럼 번쩍 눈을 떴다.

인상을 팍 쓴 제이슨의 시선이 백미러를 향해 있었다.

그때 익숙한 문양의 로고가 그녀의 시야를 휙 지나쳤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녀의 눈에 또렷이 들어오는 익숙한 로고.

노크맨 배달 오토바이였다.

노크맨이 딜리버리 업계 1위가 된 후론 요샌 어디서나 볼 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풍경이라고만 여기기엔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노크맨 오토바이가 한 대, 두 대, 세 대…… 점점 시야에 늘어났다.

대여섯 대의 오토바이가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안의 두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제이슨의 차를 둘러싼 오토바이들은 저마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발이 묶인 제이슨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믿기지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선발대 오토바이 바로 뒤로 또 다른 오토바이 행렬이 두 대의 자동차를 호위하듯 지키며 나타났다.

한 대는 시끄러운 사이렌을 켠 경찰차였고, 다른 한 대는 지안이 애타게 찾던 한 남자의 애마였다.

도로 한 편에 멈춰선 까만 세단 안에서 내리는 완벽한 턱시도 차림의 남자.

도하를 본 지안의 심장이 깊은 안도감과 감격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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