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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내가 저지른 사랑 (107/110)


107화. 내가 저지른 사랑
2022.12.09.



 


“자, 그럼 이제 가 볼까?”

진한 입맞춤이 남긴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도하가 말했다.

지안은 그제야 잊고 있던 오늘의 진짜 이벤트가 떠올랐다.

운명 같은 드레스를 입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향하려 했던 바로 그곳.


“엇, 지금 몇 시예요?”

지안의 다급한 목소리에 도하는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빠르게 살피며 답했다.


“오후 세 시.”

“벌써…… 세 시라고요? 우리 예식은 1시였는데…….”

“걱정 마. 결혼 날짜가 잡히자마자 예식장을 통으로 빌려 놨으니까.”

그룹 오너의 결혼식인 만큼 스케일도 남달랐다.

예식 장소와 시간은 그렇다 쳐도, 오래 기다렸을 하객들은 어쩌지…….

지안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자 도하는 위로하듯 말했다.


“하객들이 다 가버렸으면 좀 어때. 이렇게 내 신부를 찾았는데.”

“……!”

“난 하객 천 명보다, 당신 한 사람이 더 중요해. 당신만 있으면 둘만의 결혼식을 해도 좋고.”

마음을 위로하고 믿음을 주는 단단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한없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도하는 그녀를 한 번 더 높이 들어 올려 품에 안정적으로 품어 안고는 차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갔다.

차 앞에 다다른 그가 차 문을 열려는데, 지안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빠르게 돌렸다.

그녀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던 그는 잽싸게 차 문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왜 그래?”

“…….”

지안은 질끈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뜨며 나직이 말했다.


“……못 타겠어요.”

자동차 쪽을 응시하는 다갈색의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잔뜩 겁을 먹은 어린아이의 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도하는 그제야 그녀의 눈빛에 담긴 두려움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낯선 차에 결박된 채 정처 없이 헤매었던 충격 때문에라도 차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한껏 움츠러든 작은 어깨가, 그 위에 내려앉은 공포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도하는 품에 안은 그녀의 등을 단단히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싫은 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

지안은 누구보다 저를 이해해주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결혼식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도로 한가운데에서 차를 탈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상황이 전부 다 미안했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녀의 눈빛을 따라가던 도하의 시선도 이내 같은 곳에 다다랐다.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출발하면 다시 아까처럼 호위하려는 듯 대기하고 있는 노크맨 오토바이 무리.

지안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도하 씨, 오토바이도 운전할 줄 알아요?”

물론 운전할 수는 있지만…… 정말 괜찮겠어, 라고 되묻듯 도하의 눈이 커졌다.

지안은 그런 그의 눈빛을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차에 오래 갇혀 있어서 그런지 오토바이 타고 시원하게 달리고 싶어요. 그럼 좀 씻길 것 같아요. 조금 전 그 두려운 기분들이.”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녀의 트라우마를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오토바이가 아니라 우주 비행선이라도 직접 운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만…….

도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엔진 소음도 시끄럽고, 바람도 많이 찰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지안은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이대로 다시 차에 오른다면 숨통이 막힐 게 분명했다.

그에 비하면 시끄러운 소음, 세찬 바람 같은 건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단단한 등 뒤에 기대어 숨을 수 있다면.

지안이 결단 어린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는 더는 묻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금세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있는 곳으로 간 그는 상황을 설명하고 한 대의 오토바이를 넘겨받았다.

먼저 지안을 오토바이 뒤쪽에 앉힌 도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직접 헬멧을 씌워주었다.

헬멧을 쓴 모습을 보자 입꼬리가 절로 위로 휘어졌다.

둥근 헬멧 속 이목구비가 아이처럼 귀엽기도 했고, 어울리지 않는 것의 조합으로 탄생한 이 순간이 재밌기도 했다.


“오토바이와 새 신부라…….”

“……!”

도하가 간만에 웃음기를 머금고 말하자, 지안도 멋쩍은 듯 웃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지안을 만난 뒤론 상상도 못 할 일이 끝도 없이 벌어져.”

“……그래서 별로예요?”

“아니. 그래서 좋아. 시시하던 내 인생이 특별해지고 있으니까.”

저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특별해지고 있다는 말.

그 말이 지안의 가슴을 더없이 뭉클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제 손으로 직접 돌보고 간병해 온 소중한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의 삶이 저로 인해 특별해지고 있다니.

간병인으로서도, 한 남자의 여자로서도 이보다 가슴 벅찬 찬사는 없을 것이다.

먹먹해진 감정이 코끝을 지나 명치 아래까지 내려가 가슴을 꾹 울렸다.

그래도 눈물만큼은 애써 참았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날이니까.

헬멧을 마저 쓴 도하는 턱시도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곤 자리에 앉았다.


“출발할게. 꽉 잡아!”

커다랗고 단단한 등 뒤에서 듣는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믿음직스러웠다.

그 말이 두 사람이 정식으로 시작하는 인생 2막에 대한 출사표로 들렸다면, 혼자만의 착각일까.

지안은 그의 말에 화답하듯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고개가 제 등허리를 파고들 듯 밀착되자, 도하의 입가에도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씽-.

바람을 가르며 달려나가는 오토바이.

지안이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이 천사의 날개처럼 아름답게 퍼덕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고 평화로운 기분이 두 사람의 온몸을 휘감았다.

거친 바람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과 초록빛 싱그러운 나무들, 그리고 무엇보다 든든한 사랑하는 남자의 뒷모습.

도하도 같은 마음이었다.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한 온기.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는 게 더없이 큰 감동으로 와 닿았다.

바람을 맞아 망가진 머리 스타일도, 구겨진 지 오래인 예복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멋진 신랑과 신부를 만드는 건 옷이나 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미소, 서로를 향한 사랑의 눈빛 말고는 없다는 걸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시내로 들어서자, 전보다 많은 사람이 보였다.

신호를 받아 오토바이가 멈추어 서자, 저만치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도하와 지안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곳을 응시하던 지안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배달 오토바이를 모는 잘생긴 턱시도 남과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은 웨딩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얼마나 훌륭한 비주얼인지.

그때 저만치서 한 여학생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잘 어울려요!”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터져 나오는 까르르, 듣기 좋은 웃음소리.

잘 어울린다는 말이 왠지 듣기 좋아서, 다신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하여.

지안은 그녀들의 호응에 화답하듯 살짝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이전보다 격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학생들의 손 인사 물결은 전염되듯 주변으로 빠르게 퍼졌다.

오토바이가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전보다 많은 인사의 물결이 보였다.

버스 정류장 안, 시장바구니를 든 키 작은 아주머니도, 이어폰을 낀 샐러리맨도, 엄마의 손을 잡은 어린 꼬마까지도.

웃음 띤 얼굴로 오토바이 위 수상한 남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 인사가 지안의 눈에는 마치 무한한 응원과 격려로 느껴졌다.

고단한 산행길에서 만난 등산객이 지나치는 낯선 등산객에게 응원의 인사를 건네듯.

저들도 그런 인사를 보내 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이제 울지 말고 행복하기만 하라고.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의 응원과 축하를 받으며 달려나가는 이 길.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결혼 행진이 있을까.

지안은 특별한 이 순간을 마음으로 깊이 누리며 간직하고 있었다.



***

숨 가쁘게 달려 도착한 케이원 호텔 앞.

이미 오래전에 도착했어야 할 예식장에 지각생으로 도착한 오늘의 신랑 신부의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미 가버렸을 줄 알았던 하객들의 대부분 남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두 사람을 놀라게 한 건, 행사장 전면 프로젝터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영상이었다.

많은 이들 중 도하와 지안을 가장 먼저 발견한 승훈이 부리나케 달려와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도하는 그의 말이 안 들리는지, 여전히 프로젝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한 팀장, 저 영상은 뭡니까?”

“아, 영상이요!”

승훈은 고개를 돌려 불규칙한 화질의 너튜브 영상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원래 준비된 식전영상이 계속 반복해서 한 시간 째 흘러나오고 있었는데요. 두 분이 나타나지 않자, 하객들이 웅성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 너튜브 알림이 와서 봤더니 저 영상이 찍혔더라고요.”

지안도 눈앞의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라이브로 찍어 올린 듯한 영상에는 불과 몇십 분 전, 도하와 지안이 도로 위에서 재회하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대의 차량을 둘러싼 노크맨 오토바이 호위부대와 요란한 사이렌 소리의 경찰차 그리고 그 장면을 담기 위해 서행하는 차량들.


“아무 이야기 없이 하객분들을 돌려보내는 것보다, 저 영상을 틀어주고, 두 분이 곧 돌아올 테니, 시간이 괜찮으신 분들은 기다려 달라고 양해 드렸습니다.”

큰일을 겪으면 보이는 또 한 가지.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도하는 한 팀장을 향해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랑 신부의 귀환을 알아차린 하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자리에서 일어난 하객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오늘의 주인공을 맞이했다.

심장을 울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듣자, 지안은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래 기다린 하객들이 지치지 않게 식순을 간소하게 줄인 예식의 시작은, 신랑 신부의 입장이었다.

이젠 절대 헤어질 일 없이 영원히 함께하자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맞추어 걸어나가는 길.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함께 버진로드 위에 선 지금 이 순간이, 두 인생의 가장 위대한 클라이맥스라는 것을.

사랑으로 두 사람을 품어준 정순을 향해 인사를 하는 시간.

그리고 서로의 이름 앞에 영원한 사랑을 서약하는 시간까지.

짧지만 숭고하고 경건한 예식의 차례들이 끝나고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의 삽입곡이 장내에 울려 펴졌다.

서로를 만나 더없이 아름다운 인생의 주인공이 된 두 사람의 마지막 결혼 행진.

도하는 그 길 끝에서 지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다시 깨어나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은, 당신을 내 여자로, 내 아내로 맞은 일이야.”

그의 말에 화답하듯 지안도 말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저지른 일 중 가장 잘한 일은, 당신을 사랑하게 된 일이에요.”

행진의 끝. 눈부신 플라워 샤워와 함께 아름다운 입맞춤 타이밍이었다.

도하는 온 마음을 담아 나직이 속삭였다.


“사랑해. 서지안.”

지안도 신부의 달콤한 미소로 답했다.


“사랑해요.”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과 꼭 잡은 두 손. 그리고 그 위로 반짝이는 결혼반지가 꺼지지 않을 두 마음을 닮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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