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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외전1) 다시 쓰는 간병일기 (108/110)


108화. 외전1) 다시 쓰는 간병일기Ⅰ
2022.12.12.



 
꿈결처럼 지나간 결혼식과 신혼여행의 추억.

이제 단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지안은 눈앞에 쌓여 있는 이삿짐 상자 앞에서 옷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정든 저택을 떠나 신혼집에 들어온 지 보름하고도 나흘.

한 달이라는 짧지 않았던 허니문의 여독을 핑계 삼아 줄곧 미뤄 온 이삿짐을 이제는 정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큼지막한 건 이삿짐센터에서 모두 정리해 주었지만, 손수 정리하려고 따로 빼둔 물건들이 아직 산더미였다.

사실 짐을 마저 다 정리하지 않은 건, 단지 귀찮아서만은 아니었다.

정든 저택과 정순에 대한 향수병으로 혹시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도하가 퇴근과 함께 들고 온 커다란 결혼 액자가 신혼집 거실 벽면에 떡하니 걸리는 순간 깨달았다.

이제 이곳이 바로 부부의 집이라는 걸.

기쁜 날도, 슬픈 날도 모두 살아낼 새로운 보금자리.

정순도 새 둥지에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손자 부부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거라는 것도.

지안은 의지를 다잡은 눈빛으로 신혼집을 쓱 둘러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잘 부탁해, 신혼집! 우리, 잘해보자.”

그러곤 쌓여 있는 상자 중 하나를 낑낑대며 끌어내렸다.

이동 없이 저택에 오래 머물었던 시간만큼 짐도 많았다.

먼지 앉은 상자를 열자, 그 안에 각가지 서적과 노트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상자 안의 대부분이 도하의 간병을 맡은 후 공부를 위해 사들인 책들이었다.

의학에 대한 지식도, 전문적인 간병 교육도 받은 적이 없어서, 급한 마음에 닥치는 대로 책을 사서 공부했었다.

오래된 책장을 넘겨보는 그녀의 눈썹이 추억을 가득 싣고 깜빡였다.

그땐 자신의 무지로 도하의 상태가 나빠질까 봐 늘 노심초사했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그의 숨소리, 작은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몸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있는 권도하 전문가가 다 되었는데…….

행복한 격세지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입가로 절로 미소가 스며들었다.

두툼한 의학서적을 내려놓고 상자 안을 뒤적거리던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무채색의 서적들 사이에서 유독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노란색 다이어리.

지안은 오랫동안 잊고지낸 옛친구를 만난 듯 달뜬 얼굴로 다이어리를 들어 올렸다.


“여기 있었구나.”

마치 살아 있는 생명을 대하듯 다이어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천천히 다이어리를 펼치는 그녀의 안면 위로 이전과는 다른 오묘한 빛이 감돌았다.

한 글자 한 글자 꾹 눌러쓴 정갈한 글씨에 담긴 수많은 날의 기록.

지난 3년간 도하를 간병하며 하루도 빼먹지 않고 쓴 간병 일기였다.

중간중간 장기간 혼수상태였던 환자가 기적처럼 깨어났다는 해외토픽을 스크랩해 붙여둔 장도 보였다.

하루하루 그의 상태가 어땠는지, 특이사항은 없었는지, 앞으로 경과는 어떻게 예상되는지. 그리고 간병인으로서 오늘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기록해둔 내용까지.

그 시절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를 보는 내내, 지안은 추억에 젖어들었다.

[2020년 4월 12일 일요일

# 심박 수, 혈압, 뇌압 모두 정상.

# 오늘은 따듯한 햇살이 병실로 가득 드리운 날이었다.

봄꽃을 따다가 병실에 두었더니, 도하 씨도 기분이 좋은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였을까. 그 모습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아름다워서였을까.

강 박사님께 도하 씨가 웃었다고 말씀드리니,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셨다.

보호자나 간병인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자신들이 보고 싶은 모습을 봤다고 착각하는 거라나 뭐라나.

아닌데, 정말 웃어주었는데. 정말인데.

뭐가 사실이든,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착각이라도 좋으니 꼭 보고 싶다.

내 환자가 나를 향해 웃어주는 모습. 봄볕보다 더 따스한 그 미소를.

# 오늘의 잘한 일.

봄꽃을 따다가 병실에 둔 일.

# 오늘의 못 한 일.

도하 씨 초상권이 걱정돼서 웃는 모습을 찍어두지 못한 것.

다음엔 꼭 찍어서 내 착각이 아니란 걸 증명해야지!

회장님께서도 도하 씨 웃는 모습 보시면 정말 좋아하실 거야^^]

귀여운 다짐이 담긴 일기에 지안은 씩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때 진짜 웃어준 거 맞는데.”

대수롭지 않게 펼쳐 든 간병 일기는 이삿짐 정리라는 본분을 완전히 망각하게 했다.

처음엔 벽에 기대어 읽다가, 나중에는 바닥에 누워서 이쪽저쪽 자세를 바꿔가며 빠져들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다이어리를 가슴팍에 안은 채 잠들어 있던 그녀를 깨운 건 애타는 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서지안.”

멀리서부터 환청처럼 들리던 목소리가 또렷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지안은 스르륵 눈을 떴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도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도하 씨, 언제 왔어요?”

“방금.”

바삐 시계를 확인하고 난 그녀의 눈이 의아함을 안고 커졌다.


“어? 네 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퇴근한 거예요?”

짐 정리 때문에 휴가를 쓴 그녀와 달리 도하는 정상출근을 한 날이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좀 전까지 간병 일기를 읽었던 까닭인지, 몸이 안 좋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어디가 어떻게요?”

“점심때 음식을 잘못 먹은 건지 속이 좀 답답하고 울렁거려.”

“어떡해! 약은 먹었어요? 아니, 그것보다 점심때 뭘 먹었는데요?”

“바이어 미팅 때 프랑스 가정식을 먹긴 했는데.”

“……음식이 기름져서 그런 거 아녜요? 가만있어 봐. 소화제 가져다줄까요?”

“벌써 먹었어. 근데 소용없어.”

“제대로 체했나 보다. 어떡하지. 바늘로 따줄까요?”

“바늘?”

“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저 체했을 때마다 여기, 엄지 밑을 따주셨는데, 정말 효과가 좋거든요.”

도하는 내키지 않은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주삿바늘에 난자된 채 살았더니, 바늘 소리만 들어도…….”

지안은 그렇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레 속삭였다.


“그럼 어쩌죠? 강 박사님께 연락해 볼까요? 도하 씨 안색이 너무 안 좋은 게 단순히 체한 게 아닐 수도 있고…….”

그럴 리 없지만, 아니 그래선 안 되지만, 자꾸만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의 몸 상태라는 게 좋았다가도 나빠지고, 나쁘다가도 기적처럼 좋아지는 것을 자주 봤다.

혹시…… 다시 또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나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이지만, 그의 앞에선 어쩔 수 없이 환자를 걱정하는 간병인 마인드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였다.


“괜찮…… 우욱!”

괜찮다고 말하려던 그가 손으로 입을 거칠게 막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하 씨!”

지안도 무조건반사처럼 그를 뒤따라 갔다.

화장실 안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소리에 그녀는 잠긴 문손잡이를 만지며 말했다.


“도하 씨, 등 두드려 줄게요. 문 좀 열어봐요.”

“괜찮…… 우욱.”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은데…….

아픈 모습을 더는 들키고 싶지 않은 듯 그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크게 아프고 난 후라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란 묘한 보상심리가 있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다시 아플 수도 있다는 가정은.

순간 눈앞이 깜깜하고 심장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나온 도하의 얼굴은 핏기가 모두 증발한 듯 창백한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도하 씨?”

괜찮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도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정말 이상하네.”

“왜요?”

“구역질은 나는데, 게워내지는 건 하나도 없어.”

“……정말요?”

“응.”

체기로 구역질이 나는 거라면, 뭐든 게워내게 마련이었다.

지켜볼수록 이상한 증세에 점점 더 불안감이 몰려왔다.

잠시 고민하던 지안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되겠어요. 강 박사님 호출할게요.”

그녀가 말을 마쳤을 땐, 이미 휴대폰에서 통화연결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각종 검사 후 차트를 확인하던 강 박사의 이마가 잠시 구겨졌다.

결과를 기다리는 도하와 지안의 안면 위로 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검사 결과가 마땅치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 박사가 얼마 후 입을 열었다.


“검사상 큰 이상은 없습니다. 체한 것 같지도 않고요. 얼마 전 검진 때 위나 대장 쪽 내시경 결과도 모두 깨끗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인내심을 잃은 지안이 다급히 물었다.


“그럼요? 박사님, 그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글쎄요. 혹시 대표님, 요새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셨습니까?”

강 박사의 물음에 도하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결혼식에, 허니문에 스트레스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만.”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혹시 증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강 박사의 말에 도하는 제 몸 상태를 감지하듯 예리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강 박사님도 아실 겁니다. 마치 전날 밤 회식으로 각종 독주와 폭탄주를 마시고 난 다음 날의 컨디션 말입니다.”

“…….”

“전날 밤 대책 없이 과음한 상태로 쪽배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 같은 상태라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술병만으로도 괴로운데, 쪽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넌다고요? 뱃멀미는 또 어쩌려고요!”

“바로 그겁니다. 가만히 있어도 속이 느글거리고 헛구역질이 납니다. 머리도 깨질 듯 아프고요.”

도하의 말에 강 박사가 예리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어제 정말 과음을 하신 건 아니고요?”

“강 박사님!”

일찍 퇴근한 그와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신혼의 재미를 맛보았던 지안이 이번엔 증인이 되어 말했다.


“어젠 한 방울도 안 마셨어요.”

지안이 단호하게 말하자, 강 박사의 시선이 이번엔 도하가 아닌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대표님과 비슷한 증세를 호소하는 환자를 본 적이 있지 말입니다.”

“……어떤 병이죠?”

“그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뭔가 의심스러운 듯 저를 보는 강 박사의 시선에 지안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모님은 어떠십니까? 몸에 이상이 있다거나. 혹 무언가 몸의 중요한 의식을 거르고 있다거나.”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단체 식중독 같은 걸 의심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린 곳에 있던 달력을 보곤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해졌다.


“……엇!”


‘……무언가를 거르고 있다거나.’

강 박사의 말이 정확했다. 정신없이 지내느라 놓치고 있던 한 가지.

벌써 한 달 반이 넘도록 몸 안의 대자연이 역사하지 않고 있었다.

서, 설마!

지안이 벙찐 채 굳어 있자 도하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강 박사는 전보다 노골적인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검사는 대표님이 아니라, 사모님이 받으셔야 할 것 같군요.”

강 박사의 말에 그냥 지나쳐버렸던 지난 모든 변화에 의미가 부여되어 지나갔다.

평소였다면, 짐을 쌓아두는 꼴을 보지 못하고 밤을 새워서라도 정리했을 에너자이저가, 한없이 무기력해져 그대로 내버려뒀던 것도.

어디든 등을 붙이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도.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가 이유 없이 몸에 후끈후끈 열이 나는 것도 같았던 나날.

허니문 이후 시차 적응에 실패해서라고 여겼었던 새벽 무렵 잦은 화장실 방문도 어쩌면……!

무언가를 깨달은 지안의 심장이 두 배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심장이 함께 뛰고 있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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