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외전 2) 다시 쓰는 간병일기Ⅱ
(109/110)
109화. 외전 2) 다시 쓰는 간병일기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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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외전 2) 다시 쓰는 간병일기Ⅱ
2022.12.16.
[오늘의 간병일기]
# 도하 씨 현재 상태 : 심한 울렁거림, 헛구역질, 두통, 냄새에 극도로 민감 (쌀밥 X, 고기 X)
# 강 박사님 말씀이 도하 씨가 ‘쿠바드 증후군’이란다.
통계적으로 예비 아빠의 30%가 겪는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도하 씨에게도 그 증세가 나타났다고…….
보통은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남편에게서 증상이 발현되곤 하는데, 도하 씨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라고 했다.
도하 씨의 입덧(?) 증세 때문에, 내가 임신을 한 건 아닌지 의심해보게 되었으니까.
임신 테스트기 결과, 정말 우리에게 축복이 찾아와 주었다.
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뜬 두 줄을 보고 얼마나 눈물이 쏟아졌는지, 얼마나 심장이 떨렸는지.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가슴 벅참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내 안에 소중하고 신비한 생명을 품게 되었다니!
이제 우리가 부모가 된다니!
원인 모를 통증으로 온종일 고통받은 도하 씨도 우리에게 찾아온 축복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서 잠시 입덧(?)의 고통을 잊었다고 했다.
그러고도 증상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맥이 다 빠져 기진맥진한 얼굴로 누워 있는 도하 씨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도하 씨는 그런 내가 되려 걱정이 되는지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야. 당신이 아니라 내가 아파서.”
“도하 씨.”
“약속했었잖아. 아픈 건 내가 다 하겠다고.”
“…….”
“원래 아픈 것도 아파본 사람이 잘하는 거야. 그리고 오랜만이라서 좋네.”
“뭐가요?”
“당신이 이렇게 걱정스럽게 나를 봐주고, 간병해 주는 모습 보는 거.”
“……그게 뭐예요.”
“왜, 당신이 그러지 않았나. 한 번 간병인은 영원한 간병인이라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한 번 환자는 영원한 환자. 그것도 당신의 영원한 환자. 그러니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라고.”
아픈 건 혼자 다 하겠다니.
도하 씨는 가끔 보면 바보 같은 구석이 있다.
자기가 아프면, 나도 같이 아프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걸까.
어쨌든 빨리 도하 씨의 증상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가야, 엄마 아빠에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엄마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너라는 축복이 우리에게 와 주었다니.
정말 여기 엄마 배 속에 있는 거 맞니?
아가야…….
모든 게 꿈만 같은 엄마를 위해서라도, 이제 아빠 말고 엄마에게도 좀 티를 내줄래?
엄만 속이 울렁거리고, 메슥거려도 마냥 좋을 것 같아.
우리 아가가 이 안에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그러니까 아빠랑만 놀지 말고 엄마한테 와. 꼭 이야, 알았지?
이 일기장의 이름은 아무래도 간병 일기보다, 태교 일기로 바꾸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름이 뭐가 됐든.
우리에게 찾아온 이 축복, 이 순간의 떨림, 약간의 아픔을 비롯해 모든 순간을 잘 담아내고 싶다.
나중에 우리 아기에게 ‘이게 우리의 모든 기록이란다.’ 하며 보여줄 그 날까지.
# 오늘의 잘한 일.
이삿짐 정리는 여전히 끝내지 못했지만, 간병 일기장을 찾아낸 것.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
우리에게 찾아온 축복을 비로소 알아차린 것.
# 오늘의 못 한 일.
침대에 누워 있던 도하 씨가 급히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차가운 물은 속에 좋지 않을 것 같아 미지근한 물을 떠다 줬다.
미지근한 물을 입에 댄 도하 씨의 울렁거림이 더 심해졌다.
미지근한 음식이 입덧(?)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도하 씨, 미안해요.
입덧은 당신도, 나도 모두 처음인지라…….]
일기장을 덮은 지안의 입가로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또 다른 시작, 새로운 축복 앞에서 쓰고 싶은 말이, 남기고 싶은 말이 아직 무척 많지만, 오늘보다 더 기대되는 내일을 기약하며, 간신히 펜을 놓기로 했다.
***
까만 초음파 화면 위로 흰색의 콩알만 한 무언가가 잡히는 순간, 지안과 도하의 눈이 함께 커졌다.
“선생님, 지금 보이는 게 혹시…….”
도하가 믿기지 않는 듯 묻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기예요. 아직은 0.3cm 정도밖에 안 되지만, 이거 한번 보실래요?”
초음파 화면 속 콩알만 한 아기의 작은 몸체에서 무언가가 연신 번쩍거렸다.
“여기 반짝, 반짝하는 거 보이시죠?”
지안은 누운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도하도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아기 심장이에요. 우리 아기, 얼마나 건강한지 한번 볼까요?”
의사가 초음파 화면 속 반짝이는 부위를 클릭하자,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고작 0.3cm짜리 천사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우렁찬 심장박동.
수쿵수쿵- 수쿵수쿵-.
흡사 기차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초음파실 안을 가득 울렸다.
건장한 성인의 심장 소리라고 해도 믿길 만큼, 강하고 힘찬 소리에 지안은 작은 입술을 꾹 물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묵직하게 올라오는 진한 감동.
작고 소중한 존재가 여기 있다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아가, 너 정말 거기 있구나.
지안의 붉어진 눈가와 초음파 화면 속 아기를 번갈아 보는 도하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촉촉해 보였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속에 숨 쉬고 있는지 몰랐다.
콩알만 한 아기 천사는 어른보다 힘찬 심장박동으로 세상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고,
그 인사에 감격한 엄마는 꽃처럼 붉게 눈가를 적시고 있다.
도하의 심장 속에 뜨겁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살아 숨 쉬는 동안, 영원히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두 존재와 영원히 잊지 못할 오늘.
산부인과를 나온 지안의 손에는 분홍빛 산모 수첩이 들려 있었다.
작은 수첩이 정식으로 엄마가 되었다는 징표인 것 같아 괜스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산모 수첩 첫 페이지.
‘기특해요’라는 글자가 박힌 스티커로 고정해 놓은 초음파 사진을 보던 지안의 눈에서 별이 총총 쏟아졌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사진이 아닐까.
초음파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가 아기를 닮은 천진난만한 미소로 물었다.
“우리도 이렇게 조그마할 때가 있었겠죠?”
“……그럼.”
사진을 보는 지안의 눈동자가 조금 다른 빛깔로 깊어졌다.
콩알처럼 작은 아이의 사진 속에 비단 아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사진 속 아기처럼 작은 존재였을 너와 나, 우리가 보였다.
많은 이들의 사랑과 정성을 먹고 자라났을…… 그 시절의 나와 그 시절의 당신들.
지안은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으로 코끝이 시큰해졌다.
‘할머니, 내가 엄마가 된대. 내 안에 콩알만 한 생명이 자라기 시작했대.’
살아 계셨더라면, 누구보다 기뻐했을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저렸다.
그래도 다시 웃을 수 있는 건, 아직 그녀에겐 한 명의 소중한 할머니가 더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소식을 부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할 한 사람. 황정순 회장님, 우리 할머님.
***
도하 부부의 차가 도착했다는 얘기에 정순은 앞이마를 살짝 구겼다.
“아니, 애들이. 또…….”
분가 후 지안이 틈만 나면 저택에 놀러 와서 가지 않으려는 눈치여서, 정순은 내심 마음이 쓰였다.
분가는 그녀 딴에 고심하고 또 고심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자꾸 지안이 찾아와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 저도 마음이 약해질 것이 두려웠다.
‘녀석들, 이 늙은이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고 발목 붙잡고 안 놓아주면 어쩌려고.’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방문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언제 와도 반갑고 좋았다.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정순은 바삐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님!”
언제 들어도 청량하고 기분 좋은 손자며느리의 음성.
“할머니, 저희 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손자의 목소리.
겨우 인사 두 번에 그들과 거리를 두려던 마음이 다 허물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만면에 가득한 반가움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또 무슨 일이야. 분가까지 한 녀석들이 아주 우리 집에 출근 도장을 찍는구나.”
반가운 표정과 모순된 퉁명스러운 말이 주는 묘한 이질감이 지안은 싫지 않았다.
지안은 정순에게 다가가 냉큼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할머님, 오늘은 그냥 놀러 온 게 아니라, 드릴 게 있어서 잠깐 들른 거예요.”
“줄 게 있어? 나한테?”
지안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 테이블에 찻잔이 놓이고, 정순은 찻잔을 얼른 지안 앞으로 옮겨주며 말했다.
“이거 우리 지안이가 좋아하는 원두로 내린 커피야.”
평소였다면 신이 나서 냉큼 뻗었을 팔이 오늘은 나가지 않았다.
정순이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모으자, 지안은 더는 망설일 수 없어 옆에 둔 쇼퍼백을 열었다.
쇼퍼백 안에서 작은 선물 상자 하나를 꺼낸 그녀는 천천히 정순의 앞에 내려놓았다.
“할머님, 이거요.”
“……이게 뭐야, 갑자기? 오늘 내 생일도 아닌데.”
정순은 뭔지 알면 힌트 좀 주라는 듯 도하를 쳐다봤지만, 도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한번 열어보세요.”
지안이 재차 권하자, 정순도 더는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주름진 손으로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여는 순간,
상자 뚜껑 안에 적힌 글씨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 이게 뭐야!”
놀란 눈동자가 거기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었다.
[할머니, 저는 반짝이라고 해요. 곧 세상에 나가면, 할머니를 마구마구 귀찮게 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저 예뻐해 주실 거죠? -반짝이-]
“바, 반짝이?!”
놀람과 감격이 뒤섞인 진실의 미간이 마구 꿈틀거렸다.
정순은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듯 지안과 도하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무언의 긍정이 담긴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정순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에 담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고 까만 사진 속, 콩알처럼 작고 앙증맞은 존재.
“아이코!”
주름진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그 안에 그득히 담고 있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할머님!”
지안도 겨우 참았던 눈물을 함께 쏟았다.
“장하다, 우리 지안이 장해.”
“할머니임!”
정순은 지안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끄억끄억 울어댔고, 지안도 어깨를 들썩이며 정순의 품 안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한바탕 눈물로 기쁨의 폭죽을 터뜨린 두 여자는 비로소 진정한 듯 얘기했다.
“그래서 몇 주라고?”
“6주요.”
“지안아,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임신 초기가 제일 위험할 때야.”
“네. 할머님.”
“도하야! 지안이한테 절대 힘든 일 시키면 안 돼. 절대!”
정순의 단호한 목소리에 도하는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힘든 건 제가 혼자 다 할 거니까요. 그게 입덧이라 할지라도요.”
그 말에 정순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하야, 너도 혹시 입덧하니?”
“……그걸, 할머니가 어떻게!”
“너희 할아버지도, 네 아빠도 전부 그랬단다. 인제 보니 이게 집안 유전이었구나!”
아내를 목숨보다 사랑하는 남편의 피가 대대손손 전해져, 오늘날 도하 또한 쿠바드 증후군에 걸렸다는 새로운 정보였다.
권 씨 집안 남자들의 팔불출 역사는 도하에겐 새로운 도전 정신을 심어주었고, 지안에겐 묘한 위안과 든든함이 되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저녁 시간이었다.
***
분만대 위에 오른 지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때론 힘들었지만, 그 힘듦마저 잊힐 정도로 아기와 수없이 교감했던 지난 280일의 여정.
처음 겪는 호르몬의 작용과 몸의 변화에 당황했던 순간에도, 늘 곁에 도하가 있어 씩씩하게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가장 소중한 존재가, 그 사랑이 늘 함께하고 있기에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경험하는 지금 이 출산의 공포와 두려움도.
지안은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아기를 불렀다.
‘우리, 어서 만나자. 반짝아.’
쏟아지는 땀과 눈물, 힘겨운 신음과 간절한 외침…….
그 끝에 기적처럼 천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애응애-.
불완전하던 한 남자와 그 옆의 또 한 명의 불완전하던 여자가 만나 싹 틔운 사랑의 완전한 결실.
가장 순수하고 눈부신 사랑의 결정체가 빛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