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외전 3)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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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외전 3)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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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외전 3)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
2022.12.19.
4년 후.
알람이 울기도 전인 이른 새벽, 지안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20대에는 알람이 울기 전에 먼저 일어난 적이 거의 없었는데, 30대가 되니 알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침잠이 많이 줄었다.
아니, 잠보다 더 달콤하고 소중한 것이 많아졌다는 표현이 맞겠지.
포근한 이부자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천천히 이불 밖으로 나서던 그녀를 붙잡은 건 솥뚜껑만 한 남자의 손이었다.
“엇.”
“……어디 가게.”
낮게 잠겨 유독 더 관능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지안은 잠시 그대로 멈췄다.
한 이불을 덮고 잔 지도 이제 적잖은 시간이 흘렀는데…….
이렇게 자다 깬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선들거리는 걸 보면, 그녀에게 도하는 남편이자, 아이 아빠이기 이전에 여전히 남자였다.
까맣고 짙은 속눈썹이 가지런히 감긴 두 눈, 그 아래로 조각처럼 날 선 콧대와 붉고 도톰한 입술까지.
상쾌한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치명적이고 후덥지근한 공기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공기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녀는 이미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잠을 안 자겠다고 떼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재우느라, 녹초가 된 초보 부부에게 이른 아침은 밤보다 더 여유롭고 에너지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부부는 종종 아침 시간에 뜨거워지곤 했다.
그중 대부분이 지금처럼 솥뚜껑만 한 손이 날아와 나가려는 그녀를 막아선 순간이었다.
‘오늘은 안 돼.’
지안은 단호히 다짐하며 도하의 손을 거뒀다.
“아직 시간 많이 있잖아.”
도하가 어린아이처럼 뱉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지만, 지안은 이번에도 잽싸게 빠져나가며 말했다.
“오늘 시온이 어린이집 졸업식인 거 잊었어요?”
“……잊긴. 그래서 더 오늘을 기념하자는 건데.”
도하가 특유의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농담을 던지자 지안은 벙찐 듯 굳어 있다가 말했다.
“기념이요?”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녀석이 제 몸체보다 큰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등원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그래서요?”
“녀석을 저렇게 장하게 키웠으니, 우리도 포상 하나쯤은 받아야지.”
도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또 한 번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이불 속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안 돼요. 오늘 또 늦으면 어린이집 선생님 뵐 면목이 없다니까…….”
엄마 아빠의 불찰로 어린이집 지각부문 개근상을 타게 될지도 모를 아이를 생각하면, 오늘만은 이러면 안 되는데…….
지안은 건강하다 못해 힘이 남아도는 남자의 유혹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다른 부부들은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거치며 애정이 눈에 띄게 식기도 한다는데.
이 부부의 집엔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온몸으로 뜨겁게 공격해오는 도하를 보며 지안은 속으로 푸념 아닌 푸념을 하곤 했다.
‘아무래도 내가 간병을 잘해도 너무 잘한 탓이야.’
한때 환자였던 그가 이토록 강하고 뜨거울 수 있다는 사실이 해가 더해질수록 놀랍고 신기했다.
그 탓에 죄 없는 아이는 매일 아침 지각을 하고 있지만.
살짝 열린 암막 커튼 사이로 은은한 아침 햇살이 파도치듯 새어 들어왔다.
밤새 충전된 힘을 서로에게 나눈 부부는 뜨거운 포상이 안겨준 여운을 안고 다시금 스르르 잠을 청했다.
***
띠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다시 눈을 뜬 건, 날카로운 알람 소리 때문이었다.
일찍 일어나 알람이 울기 전에 껐지만, 한 시간 뒤에 다시 울림이 자동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최악을 면할 수 있었다.
지안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졌지만, 알람이 다시 울리지 않았다면, 아이는 인생에 한 번뿐인 어린이집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할뻔했다.
“후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간 그녀의 눈에 바로 옆 방이 보였다.
안방 바로 옆에 자리한 다섯 살 꼬마 왕자의 침실.
방문 앞에 붙어 있는 유명 애니메이션 포스터와 불규칙한 간격으로 붙어 있는 로봇 스티커가 딱 봐도 장난기 많은 남자아이의 방을 연상케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방 안에 밴 은은한 아기 냄새가 먼저 그녀를 반겼다.
언제 맡아도 좋은 천연의 향기가 부산스럽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차분하게 만들어줬다.
지안은 천천히 다가가 침대 위에 잠든 아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권시온.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
엄마 아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아이.
때론 넘치는 체력과 상상도 못 한 기발한 질문으로 엄마 아빠를 당황하게 하지만, 부족한 체력과 창의력을 키워서라도 친구가 되어주고 싶은 아이.
그래도 모름지기 자고 있을 때가 제일 예쁜 아이.
지안은 시온의 트레이드마크인 흘러내릴 듯 빵빵하게 차오른 두 볼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아이의 자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었지만, 엄마에겐 아이를 깨워야만 하는 지독한 사명이 있었다.
매일 매 순간 천사로 기억되고 싶지만, 원치 않게 하루에 몇 번씩은 마녀의 탈을 쓸 수밖에 없는 엄마의 서글픈 숙명.
곤히 잠든 얼굴에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지만.
“권시온!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
아이는 역시 미동도 없었다.
신생아 시절에는 갓난아이가 통잠을 잔다며, 효자가 따로 없다고 조리원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땐 그게 효도인 줄 알았는데, 조금 커보니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아이만큼 힘든 게 없었다.
지안은 잠든 아이의 팔을 흔들며 본격적으로 기상 전쟁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한쪽 눈썹이 꿈틀, 입술이 삐짹, 기상의 신호가 포착되었다.
지안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기의 겨드랑이와 다리 쪽을 장난스레 간지럽혔다.
“간질간질. 시온 왕자님, 자. 인제 그만 자고 일어나셔야죠.”
“……끅.”
아이는 간지럼을 타면서도 꾹 감은 눈만은 절대 뜨지 않았다.
보통은 이쯤에서 눈을 떠서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여 주곤 했었는데.
“권시온, 눈 떠야지? 어서 눈 떠서 맘마 먹고 어린이집 가야지?”
“……시르.”
대답하는 걸 보니, 깨어난 게 분명한데 어째 아이가 눈도 안 뜨고 꾸물거렸다.
“엄마가 어제 말했잖아. 오늘은 지각하면 절대 안 되는 날이라고.”
“그럼 나도 잠자는 숲속의 왕자처럼 해줘.”
느닷없이 날아온 말에 지안은 잠시 벙쪄 있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뭐?”
“잠자는 숲속의 왕자! 공주가 마법에 걸려 잠든 왕자를 깨울 때처럼. 엄마, 어옹~.”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말하는 건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지안의 눈에 마침 아이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는 책이 보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역시, 저거였구나.
그제야 영문을 알 것 같았다.
매일 밤 아이가 잠들기 전, 도하는 아이 옆에 누워 직접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었다.
하루는 백설공주가 되고, 하루는 돈키호테가 되어 또 하루는 마녀로 분해 다양한 목소리 연기를 하는 그를 보며 지안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가 대단한 것인지, 아빠라는 이름이 그를 구연동화의 황제로 만들어 버린 것인지.
그리고 어제 그 유명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아이의 귀에 들어가, 촉촉한 뇌와 가슴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게 분명했다.
지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시온이, 아빠가 어제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읽어주셨구나.”
“아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 말고 왕자!”
“왕자?”
요샌 주인공 성별이 바뀌어서 나오나.
지안은 의아한 눈으로 다시 협탁 위에 놓인 책을 확인했다.
책 표지에는 분명 ‘공주’라는 글자가 굵게 박혀 있었다.
지안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시온이 갑자기 도하를, 정확히는 구연동화를 하는 그를 흉내 내며 말했다.
“옛날, 옛날 어느 왕국에 권도하라는 왕자가 살고 있었어요.”
과장된 목소리와 좌중을 사로잡는 손짓이 흡사 구연동화의 황제, 도하를 똑 닮아 있었다.
누가 그 아빠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무서운 마녀의 저주로 3년간 긴 잠에 빠진 도하 왕자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났어요.”
“…….”
스토리의 기본 뼈대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두 주인공의 이야기.
지안은 저도 모르는 사이 아이의 구연동화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 여인은 옆 나라 궁궐에 사는 지안 공주였어요!”
시온이 제 이름을 불러주자, 지안은 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냥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아이가, 제 이름을 익혀 재잘재잘 불러주는 그 순간의 감동이란.
지안은 열심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이에게 화답하듯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요?”
“지안 공주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심히 왕자를 보살폈어요. 그렇게 3년째 되던 어느 날, 왕자가 위독하다는 얘길 들은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왕자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했어요.”
“……!”
“그런데 그 순간! 3년간 잠들어 있던 왕자가 벌떡 눈을 뜬 거예요! 죽을 줄 알았던 왕자가 마법이 풀려 깨어났던 거예요!”
“우와.”
지안이 감탄사를 뱉자, 시온은 신이 나서 말했다.
“엄마 이제 알겠지? 잠자는 숲속의 왕자처럼. 도하 왕자를 깨울 때처럼 해줘야지.”
그 아빠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인생 5년 차 능구렁이의 사랑스러운 외침에 지안은 손 써보지도 못하고 무장해제되었다.
“알았어. 내일 아침부턴 엄마 말고 지안 공주 보고 깨우러 오라고 전할게.”
“쪼아!”
잠시 동화의 세계에 빠져, 현실 세계를 그만 잊을 뻔했다.
현실로 돌아온 지안 공주, 아니 지안은 서둘러 아이를 씻겼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도하는 주방에 머물며 분주히 아침을 준비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저를 똑 닮은 아이의 입으로 들어갈 음식을 준비하는 아빠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
“지금부터 새싹 어린이집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졸업 모와 졸업가운을 제대로 갖춰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등장하자, 환호하는 부모들의 목소리가 장안을 가득 메웠다.
105cm의 키에 17kg.
아담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의젓하고 씩씩한 오늘의 졸업생, 권시온.
졸업 모를 쓴 시온을 보는 도하와 지안의 눈에 대견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한명 한명 호명되어 어린이집 수료증을 받는 시간.
대기하고 있던 지안은 시온의 이름이 호명되자, 서둘러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늠름한 걸음걸이부터 수료장을 받은 뒤 원장님께 올리는 90도 절도있는 폴더인사까지.
영상을 찍던 지안이 옆에 있던 도하에게 속삭였다.
“우리 아들 씩씩한 것 좀 봐요. 내일 당장 군대 보내도 되겠어요!”
“군대? 시온이 군대 보내면…… 우리 둘이 뭐하게?”
“……네?”
이젠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이 몹쓸 으른(?) 농담.
지안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도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깍지를 끼며 말했다.
“고생했어. 우리 시온이 예쁘게, 건강하게 키워줘서.”
“제가 뭘요. 도하 씨가 더 고생했죠. 아기 기저귀 한번 못 갈게 한 사람이 누군데.”
“당신이 없었다면 이런 기쁨, 아마 평생토록 모르고 살았을 거야.”
“…….”
“나를 똑 닮은 아이,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내,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지켜내야 할 우리 가족.”
“……도하 씨.”
“당신이 없었으면 절대 몰랐을 거야. 이런 감정, 이런 마음.”
“…….”
“고맙고 사랑해. 서지안.”
“…….”
지안은 대답 대신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벅찬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목소리가 장 안에 퍼졌다.
“자, 지금부터 졸업생과 가족분들 사진 촬영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만치서 들려오는 꾀꼬리처럼 맑고 우렁찬 목소리.
“엄마! 아빠!”
시온이 졸업 모를 흔들며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조금 늦게 도착한 한 사람.
오늘의 지각생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꼬마 졸업생이었다.
“할무니!”
시온이 입구 쪽을 향해 소리치자, 도하와 지안도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할머님!”
“할머니, 오셨어요.”
시온은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정순의 품에 폭 안겼다.
“내 강아지 졸업가운 입은 것 좀 봐. 아이구 예뻐 죽겠어, 예뻐, 너무 예뻐.”
정순은 시온의 통통한 두 뺨에 무자비한 뽀뽀를 날렸다.
시온은 정순을 쓱 훑어보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할무니…… 머리가?”
“아, 머리. 할머니가 내 강아지 졸업식 오려고 물들였어. 흰머리가 너무 많으면 우리 강아지가 할머니 창피해요, 할까 봐.”
그때 다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음은 권시온 졸업생 가족분들 나오셔서 사진 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록달록 풍선 위에 ‘졸업을 축하해요’라는 글씨가 박힌 장식 앞에 선 네 식구.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시온을 가운데에 두고 선 도하와 지안 그리고 정순의 행복한 미소가 프레임 안에 가득 담겼다.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완벽한 그림.
완전한 가족의 완성이었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