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치명적인 실수
“일어나.”
[이제 그만 일어나, 언니!]
천사 같은 금발 머리 소녀가 고사리손으로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일어나아아!]
목소리에는 울먹거림이 섞여 있었다. 제 나름대로는 절박한 것일 테지만, 네댓 살 아이 손으로 때려 봤자 고양이 솜방망이에 맞는 것 같았다.
‘아, 이거 옛날 꿈.’
소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클레어는 이게 언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날의 꿈이다.
체감적으로는, 죽은 다음 날이었다.
‘트럭에 치였지.’
젊고 잘생긴 재벌3세 본부장과 함께 야근을 하며 썸을 타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 3주째의 일이었다.
새로 온 본부장님은 젊고 잘생겼으며 그룹 오너의 손자였고,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다.
하지만 밤 10시까지 그 본부장님과 일을 하는 날이 3주 반복되자, 칼퇴시켜 주던 배 나온 부장님이 어찌나 그립던지.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권이지, 백마 탄 구원자가 아니었다. 본부장님의 차는 새하얀 포르쉐였지만.
태워다 준다는 것을 거절하며 잠시 실랑이하던 참에 트럭이 인도를 덮쳤다.
‘아마 그 운전사도 과로에 졸음운전이었을 거야…….’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운전사를 용서했다.
그게 만약에 환생 트럭이었다면, 뭐 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그녀는 델포드 남작가의 장녀 클레어로 다시 태어났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찾기 전, 클레어는 불만이 많았다. 고작해야 남작, 그것도 하필이면 시시한 남방 귀족인 것이 불만이었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영지인 것이 불만이었고, 멋진 오빠가 없는 것도 불만이었다. 빼어난 미모가 아닌 것이 또 불만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귀족이라니, 대박. 금수저까진 아닐지 몰라도 최소 은수저 정도는 되는 거잖아?’
인간은 본래 상대평가로 만족하는 법이다.
문명 수준이 현대보다 뒤떨어지긴 해도, 적어도 클레어의 생활 자체가 엄청나게 불편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즐길 거리는 확실히 모자랐지만, 대신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침에 알아서 밥이 나오고, 먹고 일어나면 누가 대신 치워 주고, 옷을 벗어 놓으면 누가 세탁해다가 옷걸이에 걸어 주고, 욕조 청소도 되어 있었다.
하녀를 불러 물을 떠 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물이 별로면 차를 타 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찻잎을 쓰레기통에 손수 버릴 필요도 없었다.
‘크, 귀족 인생 개꿀.’
이런 인생이라면 앞으로 30년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꺼이 잉여로 살 수 있었다.
뭐, 세상사가 그렇게 돌아가진 않았다.
[언니, 언니, 괜찮아?]
여동생이 울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여동생 엘리사. 클레어는 엘리사를 미워했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만.
클레어는 엘리사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미워했다고 했다. 더 이상 외동딸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엘리사는 클레어가 갖고 싶어 했던 예쁜 금발과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갖고 태어났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클레어에게는 별달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채 9년도 되지 않는 클레어로서의 기억은 전생의 기억에 압도되어 금세 희미해졌다. 엘리사는 클레어에게는 돌봐 줘야 할 어린아이였지,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진짜로 자신이 돌봐야 할 아이가 되었다.
불만은 없었다. 엘리사는 천사였다. 세상에 이렇게 예쁘고 순한 아이가 다 있을까 싶었다.
[언니, 다, 다행이다.]
[뭐가?]
[아무리 불러도 언니가 눈을 안 떠서, 죽은 줄 알았어.]
엘리사가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클레어는 소리 내서 중얼거렸다.
“나 안 죽었어.”
“안 죽은 거 아니까 이제 그만 눈을 뜨지 그래? 클레어.”
카나리아 같은 엘리사의 목소리 대신 우렁우렁한 남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클레어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코앞에 새파란 눈동자가 있는 것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엘리사의 눈동자도 푸른색이지만, 이렇게 깊고 짙은 빛깔은 아니었다. 엘리사의 눈이 맑은 하늘빛이라면, 이 눈은 북해를 연상케 하는 차가운 군청색이었다.
그 눈동자를 담고 있는 것은 깊게 파인 눈매였다. 속눈썹은 금갈색이었고, 눈썹은 그것보다 좀 더 금발에 가까웠다.
우뚝한 코가 클레어의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피부가 흰 것은 북방 귀족의 특징이지만, 이 남자의 피부는 하얀 점토로 구워 놓은 듯 잡티도 없었고 혈관도 비쳐 보이지 않았다.
흰 이마에는 선명한 황금색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클레어는 이런 미모를 지닌 남자를 한 명,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리히 선배……?”
맞닿은 피부가 따뜻했다. 얇은 이불 안이 후끈후끈 더웠다.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리지?”
에리히가 다시 말했다. 나지막한 진동이 몸을 타고 전해졌다.
그제야 클레어는 진짜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이불 안에 있는 몸이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
그녀는 반쯤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심 좀 해.”
에리히가 날카롭게 말하며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를 목까지 둘둘 싸맸다. 클레어는 마찬가지로 그에게 날카롭게 응대했다.
“나만 벗고 있어요, 지금?”
“남자랑 여자랑 같나.”
“다를 건 또 뭐람?”
클레어는 이불을 휙 내렸다. 그러자 에리히가 얼른 눈을 돌렸다.
가슴 까고 있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나마 시트로 허리 아래를 덮은 클레어와 달리 에리히는…….
아래로 내려갔던 클레어의 시선이 휙, 다시 위로 올라왔다. 뺨에 화기가 올랐다.
저건 말이 안 됐다.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도.
그러나 현실 부정을 하고 싶어도, 몸이 먼저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지만,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명백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죠?”
에리히는 그녀의 아카데미 시절 선배였다.
사이가 좋았던 적은 결단코 없었다. 클레어는 아랫사람 굴리기를 좋아하는 젊고 잘생긴 재벌 3세는 질색이었다.
자신이 굴려지는 아랫사람이 될 게 뻔한 관계라면 더더욱.
아카데미니 선후배였지, 현실이면 그는 무려 클라우제너 공작님이었고, 그녀는 남작 영애였다.
에리히가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조금 더 희한한 일이었다. 그는 대체로 남에게 관심이 없었고, 북방 귀족답게 아주 우아하시고, 아주 냉엄하셨다.
클레어를 유념해서 기억한 것은, 호의가 아니면 아첨밖에 받아 보지 못한 귀한 몸이 자기를 싫어하는 여자를 보고 신선하게 여겨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어쨌거나 평탄하지 못한 관계였지만, 그것도 3년 전의 일이다. 학창 시절의 일이란 건 금세 추억이 되기 마련이었다.
몇 년 만에 만나고 보니 꽤 반가웠다. 클레어는 어제 무척 들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그녀가 키운 여동생이 아카데미에서 수석으로 상을 받은 좋은 날이었으니까.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술을 잘 마셨고, 에리히와 자리를 옮겨서 이차를 했고…….
기억은 대충 그쯤에서 가물거렸다. 아무튼 정신을 차려 보니 키스하고 있었다.
그걸 정신 차린 상태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좋아서 한 것은 사실이었다.
에리히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기억이 안 나?”
“나긴 해요. 어쩌다가 그런 흐름으로 갔는지 모르겠단 뜻이에요.”
“……누가 할 소리.”
에리히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눈은 여전히 내리깐 채였다.
클레어는 코웃음을 쳤다.
“뭐예요? 간밤에는 짐승처럼 굴어 놓고 이제 와서 신사의 도리라도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건 사과하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별일이네요.”
“뭐가?”
“선배가 나한테 사과를 다 하고.”
에리히가 욱하며 다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어제 일은 실수였어. 그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그것도 사과예요?”
“그래.”
“뭐…… 실수한 건 피장파장이니까 괜찮아요. 사과 같은 건 안 해도.”
클레어는 한결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슬슬 가벼운 마음으로 방을 눈으로 훑었다.
기억에 따르면, 바닥 어딘가에 던져져 있어야 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방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클레어는 생각을 정지시켰다. 떠올라서는 안 될 게 떠오를 뻔했다.
“…….”
시선이 따가워서 돌아보니 에리히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운 게 아니었던가.
“왜요?”
“실수라고?”
“실수죠? 완벽히, 완전하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거잖아요.”
클레어는 과장된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에리히의 눈썹이 산처럼 솟구쳤다.
“넌 무슨 지갑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가볍게 말하는군.”
“지갑을 잃어버리는 건 실수가 아니라 큰 문제죠.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으니까.”
“없던 일로 하자고?”
무슨 이런 당연한 걸 묻는 건가, 이 남자는.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