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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263)

2화

“아니면, 뭐, 책임이라도 지시게요?”

“필요하다면 그래야지.”

에리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남방 아렌 귀족, 그것도 일개 남작가 따위는 도저히 클라우제너의 격에 맞는다고 할 수 없지만, 감수할 수밖에.”

클레어의 눈앞이 아뜩해졌다. 없던 고혈압이 생길 것 같았다.

아니, 그래. 에리히의 말은 세상의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제국 3대 명문 중 하나인 클라우제너 공작가에 일개 남작가라니, 격에 맞지 않았다.

아마 이 저택의 총집사도 남작 이상의 작위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 가문이라면 집사나 하녀장조차도 고용 관계가 아니라 대를 이어 섬겨 온 가신으로서, 귀족일 테니까.

클레어는 그것을 알면서도 짜증이 났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어이가 없어서 진짜.’

클레어는 운이 좋아 귀족으로 태어났고, 스스로 특권을 버리고 자유, 평등, 박애를 설파할 만큼 정의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역시 영혼 깊은 곳에서 조상님 누군가가 주장했다는 외침이 사라지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와도 ‘너희 집안 따위’라고 말하면 화가 날 판인데, 진짜로 공작 따위가 뭐라고.

고용주님이시라면 너 따위가 어쩌고저쩌고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꿀릴 게 없었다. 실수를 클레어 혼자 했던가? 전혀 아니었다. 그럼 자신이 유혹이라도 했었나?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어쩌다 보니 불이 붙었을 뿐이다. 혈기 왕성한 나이의 젊은 남녀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게 무슨 자신에게 큰 하자라도 생긴 것처럼, 격을 운운하고 남작가 따위 소리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책임져 주시겠다고 시혜를 베푸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누가 결혼해 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했나.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솔직히 고맙지도 않은데요.”

클레어의 대꾸에 에리히의 입매가 굳어졌다. 설핏 노기까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클레어는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건 피장파장이니까 없던 일로 해요. 한번 잔 게 뭐가 대수라고. 그게 공작님께도 나으실 텐데요.”

그녀가 공작님이라고 부르자 에리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신분에 걸맞게 분수에 맞는 호칭으로 불렀는데 뭐가 불만인가 하고 클레어는 턱을 치켜들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나더러 숙녀의 정결을 깨고도 책임지지 않는 쓰레기가 되란 말인가?”

“누가 처음이래요?”

그러자 에리히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동요가 내비쳤다.

클레어는 너무 되는 대로 내뱉었나 후회했다. 귀족 여성에게 혼전 순결은 중요한 미덕이자 혼수품이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뭐, 완전히 틀린 소리도 아니잖아.’

현생에는 아니지만, 전생에는 꽤 오래 사귄 남자 친구도 있었으니까.

어차피 에리히도 처음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더 짜증이 났다.

클레어는 그가 얼어붙어 있는 사이에 침실에 붙은 파우더룸을 열어 여자용 새 드레스 한 벌을 발견했다. 새 속옷과 함께 말이다.

“흠. 역시.”

준비성이 좋기도 하지. 귀족 상대는 클레어가 처음일지 몰라도, 여자가 없었을 리 없었다.

고용인이 알아서 착, 새 옷을 갖다 놓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조금 더 불쾌했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거 제가 입어도 돼요?”

“……거기 있다는 건 입으라고 가져다 놓은 거겠지.”

에리히가 뻣뻣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얼마나 가볍게 여자를 만나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어차피 서로 실수였으니.

연파랑색 드레스는 아주 고급품이었다. 무명인데도 매끄럽게 몸에 감기는 것이, 클레어의 파티 드레스 세 벌 값은 될 것 같았다.

자고 나가는 여자한테 다 이렇게 비싼 옷을 입혀 내보내는 건가? 아니면 옷 주인이 따로 있는 건가?

‘흠…….’

아니, 약혼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개된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때까지도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몰래 나가라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옷태가 완벽하게 맞지 않는 것을 가리라는 듯이 준비된 펠레린까지 걸쳤다.

파우더룸에서 나오자 에리히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마차를 불렀으면 하는데, 아무나 입 무거운 하인을 불러 주세요.”

클레어가 말했다. 에리히가 엉뚱한 말로 대답했다.

“아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야?”

“고귀하신 공작가의 혈통이 한 방울이라도 델포드 남작가 따위에게 튈 것 같으면 꼭 연락드릴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

“그러면 제가 감히 공작님께 연락을 드리지 말고 기다리면 될까요?”

“또 비비 꼬였지. 뭐가 불만이야? 책임진다고 했잖아.”

에리히가 설렁줄을 당기며 말했다.

곧 백발이 성성한 집사가 들어오더니 공손한 자세로 대기했다. 클레어는 펠레린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에리히가 말했다.

“냉정해지면 제정신이 돌아오겠지. 다시 연락할 테니까 기다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몰라도 공작님은 제정신이셨을 테니까.”

클레어는 싸늘하게 말하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우아한 동작으로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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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로 찜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미 생긴 일을 어쩌겠는가.

‘미쳤지. 두 번 다시 내가 술을 마시면 짐승이다, 짐승.’

이래 놓고 두 달쯤 지나면 슬그머니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의 혓바닥과 위장이었지만, 지금의 결심으론 그랬다.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델포드 남작저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델포드 남작가의 타운하우스는 손바닥만 한 정원 하나 없고, 옆집과 벽을 마주 대고 있는 작은 이층집이었다.

영지에서 멀고 먼 수도에 가주가 올 일은 거의 없었다. 모든 귀족의 의무에 따라 자녀들이 아카데미에 수학하는 동안에 쓰기 위해 장만한 것이었다.

수도의 집값은 천정부지라 가난한 델포드 남작가로서는 이만한 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주인님! 주인님! 어딜 갔다가 이제 오셨습니까?”

집사가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클레어는 후드를 내리며 말했다.

“목욕물 좀 준비해 줘. 난 어제 별일 없었어.”

클레어는 자신이 어제 말도 없이 외박해서 걱정한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옷까지 갈아입고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젊은 여주인이라지만, 그는 클레어를 염려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클레어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클레어는 어릴 때부터 주인이었지,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주인님을 걱정하겠습니까? 엘리사 아가씨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엘리사가?”

클레어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사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집사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어제 새벽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셨습니다. 혼자서요.”

“뭐? 마사는?”

“마사 부인은 아침에야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부인을 따돌려 놓고 혼자 어딜 가셨던 모양입니다. 밤새 찾아다녔다더라고요.”

“그래서?”

“아가씨께서 돌아오셨는데,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으십니다. 그, 울음소리 같은 것도 들리고…….”

“뭐?”

몸이 말할 수 없이 찝찝했지만, 클레어는 곧바로 엘리사의 방으로 향했다.

귀를 기울이자 진짜로 문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쿵쿵.

클레어는 행여나 엘리사가 듣지 못할세라 문을 세게 두드렸다.

“엘, 나야. 언니야. 문 좀 열어 봐.”

문 너머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걱정하던 것과 달리 엘리사는 부스스 다가와 문을 빼꼼 열었다. 먼지와 진흙 얼룩이 잔뜩 묻은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언니.”

“무슨 일이니, 엘?”

엘리사가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클레어의 팔을 잡아당겼다. 문이 조금 열리면, 바깥으로부터 숨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방의 덧문도 모조리 닫고 커튼도 친 채였다. 거기에 더해서 엘리사는 제가 움직일 수 있는 가구는 모두 밀어다가 창문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클레어가 들어오자 방문까지 잠그고 나서야 엘리사는 겨우 망토를 머리 아래로 내렸다.

“엘, 너……?”

클레어는 엘리사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희고 고운 얼굴에는 멍과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팔에는 찢어진 상처가 있었고, 망가진 드레스 자락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이제 보니 진흙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망토의 얼룩도 핏자국이었다.

“무슨 일이니?”

클레어는 심호흡을 세 번이나 하고 물었다.

어제는 엘리사를 비롯해 아카데미 졸업생들의 성인식 날이었다. 사교계에 데뷔한 날이었다.

클레어는 그 데뷔 파티에 참석하러 수도에 왔다.

어제 엘리사는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

클레어가 그녀를 그냥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가 밤에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 파티를 할 거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엘리사가 그녀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언니, 언니, 어떡해?”

커다란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나, 보면 안 되는 걸 봤어.”

“무얼?”

“말할, 말할, 말할 수 없어.”

엘리사가 세 번이나 숨을 삼키며 겨우 말했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호흡했다.

클레어는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엘. 무슨 일인지 말해 봐. 언니가 해결해 줄게. 뭘 본 건데?”

“마, 말 못 해. 언니도 위험해져.”

그녀가 벌벌 떨며 클레어의 팔을 잡았다.

“내가 봤다는 게 알려지면 모두 죽을 거야. 도망쳐야 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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