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클레어는 손바닥으로 엘리사의 눈물 젖은 뺨을 닦았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남자 친구는?”
그렇게 물은 것은 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사에게서 기숙사 파티 이야기를 들었지만, 클레어는 그 말을 반만 믿었다.
실제로 여학생 기숙사에서 파티가 벌어지긴 했겠지만, 엘리사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은 친구들이 아니라 남자 친구였을 것이다.
엘리사에게 동갑내기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엘리사는 상대의 정체를 비밀로 숨겼지만, 있다는 것까지 비밀로 하진 않았다.
다른 집이라면 야단을 부리며 딸을 단속했겠지만, 클레어는 그러지 않았다.
엘리사는 스무 살이 다 되었다. 남자 친구가 생겨도 이상할 나이는 아니었다. 금지해도 소용없을 것이고, 오히려 숨기려다가 엇나갈 가능성이 더 컸다.
대신 클레어는 두 가지만 약속시켰다.
자신의 몸을 아낄 것,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할 것.
상대의 신분도 알아 두고 싶었지만, 엘리사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서도 입을 꼭 다물었다.
[신분이 높은 분이야.]
언니 못 믿냐고 농담처럼 채근해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들끼리 약속한 것이 있어서, 그게 어느 정도 현실적이 되고 나면 제일 먼저 말해 주겠노라고 했다.
스무 살짜리들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엘리사가 그릇된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어제는 성인식 파티였고, 엘리사는 예쁘게 보이려고 온 힘을 다해 치장했다.
남자 친구가 함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의 물음에 엘리사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들었다. 무얼 떠올리는 건지, 겁에 질린 몸이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흑, 흐윽, 언니, 안 돼. 안 돼.”
클레어는 엘리사를 꽉 안아 주며 말했다.
“언니가 너 추궁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정말로 뭔가…… 심각한 문제를 목격한 거라면, 네 남자 친구도 도움이 되지 않겠니? 집안도 좋다면서.”
“아, 안 돼.”
“부모 허락 없이 교제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면 언니가 잘 말해 줄게.”
“그이는, 그, 이는, 주, 죽었어……! 으흐으윽!”
엘리사가 클레어의 팔을 잡은 채 무너지듯이 울다가 마침내 까무러쳤다.
달칵.
문이 열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통곡 소리에 이제나저제나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던 집사가 얼른 돌아보았다.
“주인님, 아가씨는 무사하십니까?”
“잠들었어. 괜찮아. 어제 뭐 좀 놀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클레어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얼굴을 닦아 주고 싶으니까 뜨거운 물을 가져다줘.”
“하녀에게 시키지요. 주인님의 목욕물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목욕은 됐어. 마음이 바뀌었어. 갈아입을 옷만 좀 갖다줘. 그리고 짐을 싸.”
“짐이요?”
“그래. 준비되는 대로 바로 델포드로 돌아가자.”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그래. 다른 건 묻지 말고.”
집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가위로 엘리사의 드레스와 망토를 잘라 조각냈다.
“젠장.”
수십 번이나 가위질을 하려니 손이 아팠다.
클레어는 잘게 자른 옷 조각을 자신이 입고 온 펠레린에 쌌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엘리사가 입고 있던 망토도 고급품이었다. 그녀가 입고 온,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것만큼이나.
‘남자 친구가 신분이 높다더니.’
그녀는 엘리사의 말을 믿었다. 어젯밤에 엘리사는 무언가 끔찍한 일을 봤고, 남자 친구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전근대 사회.”
이 시대에 사람의 목숨은 생각 이상으로 파리 목숨이다.
귀족이라면 좀 낫긴 하지만, 권력자에게 대어 놓은 줄 하나 없는 시골 남작가 따위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일행을 모조리 살해하고 어디 늪에 처넣으면 누가 알겠는가. 치안이고 법률이고, 진짜 천상계의 귀족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뭘 본 거니, 대체?’
그녀는 엘리사의 핏기 없는 얼굴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 주고, 손톱 사이에 말라붙은 얼룩도 꼼꼼히 닦았다.
그러는 사이에 준비가 끝났는지,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클레어는 일어서서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사의 유모인 마사가 함께 와 있었다.
“세상에, 엘리사 아가씨…….”
멍들고 상한 엘리사의 얼굴과 팔다리를 보고 마사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사, 보면 알겠지만, 남한테 이야기할 수 없는 사연이 있어.”
“네, 네!”
“상처가 나을 때까지 가능한 한 모든 시중을 마사가 직접 들어. 이 일이 밖에 알려져서는 안 돼. 알았지?”
“네. 아가씨의 명예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마사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는 알았지만, 클레어는 일부러 그렇게 알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는 길에 하녀에게도 살짝 말을 흘릴 것이다. 엘리사에게 흠이 되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진짜로 그녀가 위험한 것을 보았다면, 차라리 그런 문제로 서둘러 수도를 떠났다고 여겨지는 쪽이 나았다.
간단한 여행 준비가 끝나 있었다. 클레어는 옷 조각 꾸러미를 직접 들었다. 수도를 벗어나서 여관에 들르면, 조금씩 태울 작정이었다.
나이 든 집사가 이불로 싼 엘리사를 직접 업어 마차에 눕혔다. 클레어는 그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길이가 맞지 않는 드레스가 발에 걸렸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에리히의 저택에서 입고 온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잡념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이미 저지른 실수,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리히 클라우제너는 그날따라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냥 붙들어 두는 게 맞았나?’
평소처럼 집사가 가져오는 오전 신문을 들고 티테이블에 앉았지만, 좀처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저택에 클레어가 오래 있어 봐야 좋을 일이 없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시선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
결국 거기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다 보면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에리히 자신에게는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어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추문이 될 것이다.
‘내가 뭐 하러 걱정해.’
클레어라면 자기 일쯤은 보통 사람의 스무 배 이상으로 똑 부러지게 해결할 텐데.
그녀가 무엇 때문에 화를 냈는지 그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순서가 어긋나기는 했다. 제대로 된 남자라면 절대로, 미혼의 숙녀에게 청혼하기 전에는 키스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나 클레어도 좋아하지 않았나. 어젯밤에는 진짜 술에 만취해서 광란이라도 한 건가.
하긴, 클레어는 원래 그를 싫어했다. 에리히는 그녀가 무엇에 스위치가 눌려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태반이었다.
화를 내면 냈지, 또 화가 날 때마다 과례하며 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클레어의 나쁜 버릇이었다. 활활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서.
그럴 때마다 에리히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그때였다. 문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파벨, 소식을 갖고 왔나?”
“무슨 소식을 기다리고 있니, 에리히?”
“……어머니.”
들어온 것은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 루이자였다.
계모였지만, 에리히는 딱히 그녀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부친이 재혼했을 때, 그는 일곱 살이었지만 이미 자신의 혈통과 권리, 의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친의 정을 굳이 루이자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거부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공작 부인의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자는 그에게 살가웠다. 에리히는 그만큼 그녀에게 정중하게 대했다. 받은 만큼은 돌려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왜 들였느냐고 하인을 꾸짖을 수도 없었다.
에리히는 들리지 않게 혼자서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니? 집에 있는데, 식당에 나오지 않아 궁금하게 여기던 참이란다. 나는 당연히 네가 아침 일찍 외출했을 줄 알았지.”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에리히의 얼굴을 훑었다. 에리히는 덤덤하게 그 눈빛을 흘려 넘겼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서재가 아니라…… 침실에서 해야 할 일?”
“사생활입니다, 어머니.”
“아니, 물론 이 어미도 이해를 해요. 너도 다 자란 남자니, 어미에게 말할 수 없는 사생활도 있겠지. ……파벨이 에델바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드레스를 사 갔다고 들었는데, 네가 시켰니?”
“사생활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루이자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대로 묻고 넘어가기에는, 그녀에게는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냥 애인이니? 결혼은 생각하지 않는?”
탁.
에리히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것뿐인데, 루이자는 찔끔해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사생활입니다. 뭔가 결정되면 말씀드리죠.”
결혼은 가문 간의 결합이고, 상대를 결정하는 것은 부모의 일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태연자약하게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클레어와 결판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한나절 가까이 지났으니, 그녀도 머리가 식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의 제안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도 이해할 것이다. 성격이 괄괄해서 그렇지, 똑똑한 여자니까.
그때였다.
“각하!”
비서관이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에리히는 새파란 눈동자로 비서관을 노려보며 물었다. 비서관이 숨을 한 번 흡 들이켜고는 빠르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뭐?”
“조금 전에 모드랄 숲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암살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종 둘이 함께 죽은 채 발견되었고, 호위 기사는 행방불명인데 지금 찾는 중입니다.”
에리히는 숨을 들이켰다.
“입궁하겠다.”
“예.”
비서관이 준비하기 위해 뛰어나갔다. 루이자는 에리히의 팔을 잡았다.
“괘, 괜찮겠니?”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에리히는 그녀의 손을 쓸어내리듯 치우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