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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263)

4화

2. 5년 후

마차가 수도의 성문을 넘었다.

그것만으로도 클레어는 피곤한 기분이 되어 눈을 감았다. 가능하다면 수도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상단의 일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대리인이 중요한 결정을 하러 와 주십사 읍소해도, 홀몸이었다면 차라리 손해를 좀 보고 말지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있으면 문제가 달랐다.

“이모! 이모!”

올해 네 살 하고 3개월이 된 엘리엇이 상념에 잠겨 있는 클레어를 소리쳐 불렀다.

클레어는 눈을 떴다. 엘리엇은 토실토실한 뺨을 흥분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클레어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하늘이 안 보여! 건물이 엄청 높아!”

“그래?”

클레어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기껏 해 봐야 8, 9층짜리 건물인데 하늘이 안 보이긴 뭘. 그녀는 48층 아파트에서 살아 본 적 있는 몸이었다.

하지만 평생 델포드 같은 시골에서 살아온 아이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일 것이다.

백 년도 넘는 세월 동안 델포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3층짜리 영주관이었다. 교회의 첨탑도 그것보다 낮았다.

새로 지어지는 상단 건물이 4층짜리였지만, 이제 겨우 3층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사가 엘리엇의 손을 잡았다.

“남작님은 피곤하세요, 도련님. 저한테 보여 주세요.”

“쩌어기 구름이 건물 지붕에 가려져 있어!”

그게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일이라도 되는 양 엘리엇이 신나서 말했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5년 전, 수도에서 도망치고 나서 아홉 달 후에 엘리사는 아기를 낳았다.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에는 기가 찼다. 몸을 아끼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클레어는 엘리사를 꾸짖었지만, 엘리사는 말갛게 웃으며 너무도 기쁜 일이라고 했다.

낳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피임도 어려운 일이지만, 안전하게 중절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엘리사가 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고용인들은 그녀를 불면 깨질세라 염려하고 조심했다. 친족들은 어쩌다 그런 일을 겪어서 몸을 더럽혔느냐며, 결혼 시장에 나가지도 못할 거라고 엘리사를 폐품 취급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런 소문이며 말들에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인걸. 아주 아주 귀한 아이야.]

[네 인생도 생각해야지.]

[내 인생은 그분을 만난 걸로 이미 끝났어. 끝장났다는 게 아니라 꽉 찼다는 뜻으로.]

그리고 그녀는 클레어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언니가 날 많이 도와줄 거지? 하나밖에 없는 조카니까 많이 예뻐해 줘야 해?]

그런데 클레어가 어떻게 아기를 사랑해 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천사 같은 엘리사가 아기를 낳다 죽었을 때도, 아기를 책망한다거나 미워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전생에는 조카가 없어서, 돌쟁이 아기 사진 백 장을 보라고 강요하는 친구를 보고 어이가 없었는데,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제 자식은 아니었지만 정말 예뻤다.

클레어가 고슴도치라서가 아니라 엘리엇은 실제로도 맑은 금발에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예쁜 아기였다. 뭐, 엄마가 워낙 예뻤다.

클레어는 어차피 결혼할 마음이 없었기에 엘리엇을 후계자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가계도에 입적을 해야 했기에 수도로 왔던 것이다.

하지만 양자를 들이는 절차는 상당히 복잡했다. 특히나 작위 계승자에게는 더 그랬다.

귀족의 혈통을 보호하고 배우자의 권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우자의 출신 가문 가계도에도 영향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혼외자를 입적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고, 친족으로부터 입양해 오는 경우에도 까다로운 여러 가지 조건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니 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수도로 오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엘리엇도 언젠가는 아카데미에 와야 하니까, 영원히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

로멜-아렌 제국의 모든 귀족은 열여섯 살이 되면 수도 로텐부르크의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려면 열 살이 되기 전에 반드시 수도의 귀족원 명부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괜찮을 것이다.

5년이나 지났다. 황태자 시해 사건의 여파는 이미 사라졌으리라.

그때 여정을 서두르느라 수도를 떠난 지 보름 가까이 되어서야 클레어는 그 소식을 들었다. 엘리사는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클레어도 자신이 짐작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5년 동안 추적은 없었다. 목격자가 있다는 것은 알아도, 누구인지는 몰랐던 것 같다.

‘황후도, 2황자도 이제는 잊고 있겠지.’

5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미 쓰러뜨린 정적의 꼬리를 끝없이 찾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실행범은 당시에 이미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고, 델포드와 연관시킬 만한 어떤 연결 고리도 없었다.

“마사! 저거 봐 봐, 구름을 팔고 있어!”

엘리엇의 엉덩이가 하늘을 날아다닐 지경이었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로텐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다. 아이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마차는 오래지 않아 이넨호프 호텔 앞에 멈춰 섰다. 10층 높이에, 증기 기관으로 움직이는 최신식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는 고급 호텔이었다.

문 앞에 나와 대기하고 있던 호텔 지배인이 마차 문을 열었다.

“이얏!”

“도련님!”

엘리엇이 다짜고짜 뛰쳐나가려다가 지배인과 부딪쳤다. 마사가 당황해서 얼른 엘리엇을 잡았다.

클레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엇, 사람한테 부딪쳤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앗! 아, 웅……. 죄송합니다.”

엘리엇이 배꼽에 손을 올리고 무릎까지 구부리며 사과 인사를 했다.

지배인이 당황하며 마주 엘리엇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도련님. 귀하신 도련님께서 이런 일로 고개를 숙이시면…….”

“그냥 사과를 받아 주세요. 어릴 때라도 겸손을 배워야죠.”

“송구스럽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남작님.”

클레어의 말에 지배인이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가 말했다.

“난 이게 편해요. 지배인은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닌데.”

그 말이 더 송구한 듯 지배인이 고개를 더 숙였다.

엘리엇은 그래서 용서를 받은 건지 아닌지 몰라 알쏭달쏭한 얼굴을 했다.

지배인과 함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위빙 상단주 로저 카슨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만 예의 바르게 하시지, 그렇다고 진짜로 온화한 분도 아닙니다. 만만하게 생각했다간 큰일 나실 겁니다.”

“제가 어찌 감히.”

지배인이 고개를 숙였다.

“먼저 보내신 짐을 최상층에 올려 두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목욕물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마워요.”

클레어는 평온하게 대답하고, 마사에게 엘리엇을 데리고 먼저 올라가라고 말했다. 엘리엇은 간식도 먹고 낮잠도 자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은 흥분해서 눈을 빛내고 있지만, 침대에 눕히면 잠들어 버릴 게 틀림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로저를 돌아보았다. 로저가 서글서글한 얼굴에 할 수 있는 한 한껏 매력적인 미소를 담고 클레어의 손등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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