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클레어는 태연하게 말했다
[기계는 계속해서 발주하고 있어. 올해 안에 문직물 직조기만 3백여 대를 추가하게 될 거야. 방적기 1백 대를 넣을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있고, 계약도 이미 마쳤네.]
로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였다. 그만하면, 이 시대에는 대규모 공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대담하다고 자부했으나, 그렇게 큰돈을 확실하지 않은 시장에 한꺼번에 밀어 넣을 용기는 없었다. 하물며 시장을 만들겠다니.
[직공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고용하려면 임금도 엄청날 테지만, 한꺼번에 그 직조기를 다 돌릴 수 있는 숫자를 데려올 수도 없을 겁니다.]
[괜찮아. 내 직조기는 숙련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집에서 베틀을 돌려 본 적만 있어도 충분히 다룰 수 있지.]
클레어는 여유롭게 말했다.
[문양 샘플을 만들 장인도 확보했네. 나머지 방직 길드의 숙련공들은 모두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최고급품을 만드는 쪽으로 가게 될 거야.]
그리고 델포드 영지가 있는 남방 아렌은 원래 목화솜의 산지였다. 이곳에 오는 동안 로저는 끝도 없이 펼쳐진 목화밭을 이미 보았다.
게다가 방적업으로 꽤 유명한 도시가 가까이에 있었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주변 영지에 목화를 심으라고 설득하는 데에 꽤 심력을 들였지. 실패해도 무조건 사들여야 하니, 사실 전부 내 빚이야.]
[이곳에는 기차역이 있지요. 그것을 만들 때부터 생각하신 겁니까?]
[글쎄. 기차역 부지를 선정한 건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의 일이야. 사업 계획 같은 게 있었을 리가. 그렇지만 역세권은 못 참지.]
로저는 클레어가 말한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이해했다.
‘돈은 교통을 따라 흐르는 법이지. 철도 수송의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열 살도 되기 전에 깨달으신 건가.’
돈과 시장에 관한 통찰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놀라웠다.
그 정도 되니 확신을 가지고 델포드 남작가의 가산을 몽땅 털어 넣었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그 이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처음에는 제법 부유한 수도의 도시민을 대상으로 시작했으나 금세 고객이 늘어났다.
평민들도 평상복은 무늬 없고 질긴 옷감으로 해 입었지만, 특별한 날 입을 옷은 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옷감을 원했다.
예전에 문직물은 결혼 예복에나 쓸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위빙 상단에서 문직물을 풀기 시작한 이후로 주일에 문직물로 지은 재킷이나 드레스를 입고 교회에 가는 이들이 종종 보였다.
클레어는 비교적 수수한 것과 더 화려한 것도 만들었다. 비슷하지만 질감이 다른 흰 실을 이용하여 짜 낸 직물은 무늬가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부자와 귀족들 중에서도 셔츠로 만들어 입는 자들이 생겼다.
화려한 것은 숄이나 스카프로 쓰였다. 두껍게 짜 내어 집을 장식하는 태피스트리가 되기도 했다.
평민의 집에 태피스트리라니.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얇으니까 방한용은 못 되지만, 간단하게 집을 장식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하고 싶어 할걸.]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수요는 무제한이었다. 첫 2년 동안은 수익 대부분을 재투자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부터는 재투자한 것 이상의 수익을 쓸어 담았다.
위빙 상단은 작은 직물상에 물량을 공급함과 동시에 직영점을 계속해서 열었다. 그리고 직영점을 통해 문직물의 새로운 사용법을 제시했다.
도매도, 소매도 불타는 듯한 성업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클레어는 위빙 상단의 기존 거래처에서 장인을 흡수하여 최고급 직물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로저는 잠잘 시간도 없었다.
당연히 문직물 직조기를 베껴 간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공급하는 방식은 언제나 위빙 상단을 뒤따라가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직공을 빼돌려. 어차피 저쪽에서 이 가격에 맞추려면 말도 안 되는 착취를 하고 있겠지.]
[언제까지고 그렇게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이윤을 남기려면 지금도 직공의 임금을 낮춰야 합니다.]
[지금 공장을 못 늘리는 건 사람이 모자라서야. 어차피 문직물은 아주 조금 더 비싸더라도 아름다운 것을 사게 되어 있어. 승부는 장인들에게서 나는 거야.]
클레어는 기계에 투자하는 것만큼이나 장인과 화가들에게 투자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아예 막대한 자금력으로 새로 생기는 직물 공장을 사들였다.
그렇게 해서 클레어와 손잡은 지 4년이 지난 지금, 위빙 상단은 문직물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로저로서는 도저히 클레어를 놓칠 수 없었다.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하면 됐지, 아부할 필요 없어. 지금까지 투자해 놓은 게 얼마인데? 동업을 때려치우려고 해도, 그랬다간 시장 지배력을 잃는다니까.”
“이런,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아부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남작님을 좋아하는 거고, 그건 남작님의 탁월한 식견과 혜안 때문이지요.”
“이게 바로 아부지.”
클레어는 피식 웃었다. 로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지만, 진짜로 식견이나 혜안 따위가 아니다.
미친 자본주의 세상에서 갈리다 왔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을 뿐이었다.
로저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셔우드 씨와 결혼하실 겁니까?”
“그래.”
“차라리 저로 하시죠. 어차피 평민 남편이 필요하신 것뿐이라면.”
클레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로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로저가 남몰래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동자는 대체로 게으른 호박색이었는데, 가끔 이렇게 사람을 꿰뚫어 태울 듯이 강렬한 태양빛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그게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만드는지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엘리엇 도련님을 입적하기 위해서 형식이 필요한 것뿐이잖습니까? 그럴 거면 저처럼 남작님에게 남편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는 남자가 낫죠.”
“앉으면 눕고 싶다더니, 돈을 버니까 귀족이 되고 싶은가 봐?”
“결혼 동맹도 되고요.”
“동맹은 무슨.”
클레어가 문득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최상층에 도착한 것이다.
로저의 짧은 독점 시간은 끝났다. 클레어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문 한쪽 구석으로 옮겨 갔다.
“종 같은 걸 하나 달면 좋겠는데. 도착했다는 소리가 나게.”
“그러면 편리하긴 하겠습니다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할까? 바깥쪽 문에 달아 놓는 건 어때?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면 줄이나 지레를 건드리게끔 해서.”
“남작님은 발명가가 되셨어야 했습니다.”
“그냥 그러면 편하겠다고 말하는 거잖아.”
“귀족 나리라면 보통 사람을 쓰겠죠.”
“음. 그건 그러네.”
클레어가 잠깐 생각해 보고 대답했다. 하긴, 본 적은 없지만, 클라우제너 공작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면 층마다 사람을 세워 놓고 도착하면 열어 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귀족 나리의 표준을 에리히 클라우제너에 놓는 것은 맞지 않았다.
그는 로멜 귀족의 이데아를 구현해 놓은 것 같은 사람이니까. 이데아는 절대 평균이 아니다.
밖에서 문이 열렸다. 한 층 전체가 스위트룸이었기에, 내리자마자 바로 거실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먼저 짐을 들고 올라와 있던 집사가 클레어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 너머로 로저를 쏘아보았다.
“……휘유우.”
소중한 아가씨에게 치근대는 놈팡이 취급을 받은 로저가 휘파람을 불었다.
클레어는 아가씨가 아니라 주인님이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를 보살폈다는 집사에게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치근대는 놈팡이처럼 보이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만 취급하시니까 그렇지.’
클레어는 돈을 벌자 귀족이 되고 싶어진 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언감생심 델포드 남작 부군까지 넘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정부 정도도 괜찮은데 말이다. 애인이면 더 좋고.
물론 어느 쪽이든 고지식한 집사로서는 용납 못 할 일일 게 틀림없다.
클레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물었다.
“엘리엇이랑 마사는? 먼저 올라왔어?”
“도련님께서는 잠드셨습니다.”
“야단을 부리더라니, 그럴 줄 알았지.”
클레어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로저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내리려 했지만, 그 전에 집사가 가로막았다.
“주인님을 에스코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예…….”
로저는 떨떠름한 마음을 숨겼다. 델포드 남작가에서 집사의 실권은 꽤나 높았다. 밉보이면 큰일이었다.
클레어가 하하 웃었다.
“아무튼 나도 쉬어야 해. 오늘은 돌아가, 로저. 상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도로 올랐다. 집사가 엘리베이터의 바깥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로저는 거실 저쪽 문이 열리고 그레이 셔우드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클레어의 남편감으로 결정된 놈이었다.
“이……!”
그놈에겐 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이번 달에도 대부인께서 150만 골드 이상을 피복비로 지출하셨습니다.”
“도가 지나치십니다.”
출납을 관리하는 총관의 말에 이어 재정관리자 빌헬름이 비난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히는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귀부인이 품위 유지비를 쓰는 데 일일이 남자가 입 댈 일 아니니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벌써 9개월째입니다! 이미 1천만 골드를 넘어서 2천만에 다가갑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중간 규모 상단의 연매출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이라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금액이다.
남방 아렌에서라면 작은 규모의 영지를 작위와 함께 통째로 사들일 수도 있는 액수다.
그러나 에리히는 억양 없이 물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쓰시는 액수가 가산에 타격이 될 정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