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총관이 머뭇거렸다.
클라우제너 공작가는 부유했다. 단순히 가용 재산만으로 따진다면, 이미 황실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북방에 있는 공작령은 광대했다. 한때는 쓸모없는 황무지를 떠안고 있다고 여겨졌으나, 산업이 발달하면서 보물 상자가 묻힌 땅이 되었다.
제국 최대 규모의 석탄 광산이 공작령에 있었다. 구리와 납, 초석 광산의 중요성도 전과 전혀 달라졌다.
오래전부터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힘을 뒷받침해 온 거대한 철광도 한때 매장량이 바닥났나 싶었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채굴량이 크게 늘고 품질까지 상승했다.
지금도 기술자들은 새로 발견되는 광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막대한 자원에 힘입어 클라우제너 공작령은 제국에서 가장 빠르게 공업이 발달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금은광은 물론, 희귀한 보석이 산출되는 광산이나 수도에 가지고 있는 부동산도 이에 비하면 적은 재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빌헬름이었다. 그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면 그냥 둬.”
“대부인께서 정말로 1백만 골드짜리 드레스를 해 입거나 그 돈으로 보석을 사들이신다면,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인께서는 그 돈으로 직물을 사서 친정인 벨프 후작가의 상단을 통해 되팔고 계십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실 겁니까? 이 이상 벨프 후작가를 돕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에리히는 들릴락 말락,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번거로웠다.
벨프 후작가가 직물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한 것이 작년 일이었다.
원래부터 재정이 탄탄하지 못한 가문이었다. 벌써 오래전에 영지의 절반을 팔아넘겼다. 그렇다고 지금 가문의 직계들이 상업에 탁월한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에리히의 생각에, 영지를 팔아넘길 정도로 사업에 재주가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북방의 목장은 지금도 성업이었으니, 그냥 두어도 지대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릇에 비해 욕심이 많은 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근래에 거부가 되는 평민이 많으니 그런 모양이었다.
벨프 후작은 대리인을 시켜 직물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위기에 처했다.
루이자가 읍소해서 그는 자금을 융통해 주었다. 5천만 골드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돌려받지 못할 줄 알면서 주었다. 인척은 인척이니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깨끗하게 끊었다.
벨프 후작가는 그걸 에리히의 투자금이라고 생각했는지, 자꾸만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가져왔다.
주로 경쟁 상단을 고꾸라뜨리기 위해 힘을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에리히는 벨프 후작가의 편지를 모두 비서에게 답하도록 시켰다.
그 뒤로 굳이 챙겨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후작가의 상태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각하.”
빌헬름이 그를 재촉하듯 불렀다. 에리히가 결론을 내렸다.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머니가 갖고 계신 보석을 팔아 친정을 돕는다고 해도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으니까.”
빌헬름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벨프 후작가는 지원을 해 줄 만한 가치도 없는 곳이었지만, 차라리 돈을 퍼다 주는 게 낫지, 이건 낭비였다.
지금은 저쪽 상단 물건을 비싸게 사다가 싸게 팔고 있으니까 말이다. 돈이 애꿎은 곳으로 흘러갔다.
“저쪽 상단에도 공정하지 못한 일입니다. 각하의 돈으로 싸게 물건을 풀고 있으니까요. 공작령에 입점한 소매점을 강제로 인수하려다가 소송에 걸린 일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사들이고 있는 게 위빙 상단의 물건인가?”
“예? 아, 예.”
에리히가 직물상의 이름까지 알 줄 몰랐기 때문에 빌헬름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에리히가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도 내버려 둬. 어차피 벨프 후작가가 호되게 당할 텐데.”
“예?”
“어머니가 옷이나 보석값으로 쓰셔도 되는 돈에는 더 이상 상관하지 마. 내실의 일이다.”
에리히는 그런 문제로 루이자와 굳이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내실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써도 되었다.
에리히가 그렇게 말하니 빌헬름은 어쩔 수 없었다. 지붕 위에서 돈을 태워 뿌리는 것 같은 낭비였으나, 실제로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재정에 타격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 가 보라고 에리히가 고갯짓했다. 빌헬름과 총관은 일어서서 정중하게 그에게 절하고 물러갔다.
“후…….”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싸움을 걸 사람한테 걸어야지.’
에리히는 위빙 상단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관여하기 싫은 것이기도 했다.
빌헬름의 말마따나 공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상대였다면, 이렇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에 돈을 댄 셈이 되어 미안하다고 사과 편지라도 보냈을 것이다.
‘잊어버렸어야 하는데.’
눈에 안 띄어야 잊지.
하지만 알고 있었다. 클레어가 자기 입으로는 남방 아렌의 일개 남작이 어쩌고 해도, 결국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어디에선가 튀어나오리라는 것을.
그게 기계를 이용한 직물 사업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다. 공업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는 아렌 귀족치고는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도 클레어다웠다. 누구도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태연자약하게 저지르고, 배포 좋게 올인한다.
‘하긴, 돈 좋아했었지.’
자신은 금수저와 다르다 어쩌고 하며 에리히를 미워했었다. 아기 때 처음으로 선물 받은 수저는 금이 아니라 은으로 만든 것이었다고 말하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었다. 그래서 도리어 에리히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그녀도 은수저 정도는 갖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싫다는 여자를 강제로 찾아갈 작정은 없었다.
5년 전 그날, 황태자 시해 사건이 터져 입궁할 때에 곧바로 클레어에게 편지를 썼었다.
원래는 저녁에 방문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할 사정이 생겼으니 내일 가겠다고. 정세가 어지러워질 것 같으니 며칠만 조용히 집에 있으라고.
하지만 그 편지는 닿지 않았다. 심부름꾼은 델포드 남작가가 이미 영지로 돌아갔다더라고 전했다. 한나절 사이에 짐을 싹 챙겨서 빠져나가고, 멋모르는 하인들만 남아 있었다고.
그게 에리히 자신에게서 도망간 것이 아닐 가능성은 몇 프로나 될까?
어찌 보면 현명하긴 했다. 에리히는 원래 그날 저녁에 제대로 청혼할 작정이었다. 파벨을 시켜 보석상도 불러 두었다.
일단 청혼을 받고 나면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그건 에리히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시끄러워지기 전에 도망친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까지 싫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싫었다면, 그날 밤에는 왜 기꺼이 자신의 품에 안겼을까?
‘역시 이해가 안 가는군.’
그렇게까지 싫다는 여자를 쫓아가 잡는 것도 못 할 노릇이었다.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된 후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에리히는 아직도 불타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녹아내릴 것처럼 보드라웠던 입술도.
“멍청한.”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루이자에게 한마디쯤 해 두는 게 좋겠다. 빌헬름이 공작가 안주인의 씀씀이에 대해서 잔소리하게 놔둘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쓰는 돈이 어디로 가는지 에리히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였다.
파벨이 뒤뚱뒤뚱 달려왔다. 얼마나 뛰었는지, 얼굴이 시뻘겠다.
“공작님! 공작님!”
“뭔가?”
“큰일입니다! 큰일!”
“진정해. 무슨 일인가?”
“그게, 그, 허억!”
파벨이 숨을 몰아쉬었다. 에리히는 그가 시뻘건 낯빛에서 시퍼런 낯빛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 그분이 돌아오셨습니다! 호텔 앞에서 우연히 뵈었는데요!”
“그분이라니?”
“그분, 그분 말씀입니다! 제가 드레스를 사다 드렸던.”
파벨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렸다.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 또 나왔다. 그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런가. 그게 뭐.”
클레어가 수도에 오는 건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지난 5년 동안 발붙이지 않은 쪽이 놀라웠지.
하지만 파벨은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도 잊고 에리히의 팔을 잡아끌어 내렸다. 그냥 말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문제였다.
“그분, 아이가 있습니다.”
“뭐?”
“네 살쯤 되는, 황금 실타래 같은 머리칼을 가진 아주 귀여운 도련님입니다.”
에리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놀랄 것은 없었다. 위빙 상단이 하도 요즘 유명세를 타서 동향을 알고 있는 것이지, 클레어의 근황을 따로 알아본 적은 없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충분히 네 살이 될 만했다. 아니, 그것도 속이 뒤집어지긴 마찬가지였다.
파벨이 목소리를 더 낮춰서 속삭였다.
“제가 그래서 호텔 직원을 쑤셔서 알아봤는데, 아직 부군이 없으시답니다.”
에리히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