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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263)

8화

에리히가 이넨호프 호텔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30분이 지나기 5분 전의 일이었다.

도어맨이 호텔 앞에 멈춘 마차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가 경악해서 얼어붙었다.

이넨호프 호텔은 종업원들에게 수도 유명 인사들의 얼굴과 특징을 외우도록 요구했고, 그게 아니라도 클라우제너 공작의 얼굴은 잘 알려져 있었다.

한번 보면 잊을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에리히는 초상을 밖에 내돌리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신문에는 세밀화가 실리곤 했다.

도어맨이 자리를 비킬 줄 모르고 가만히 있자 에리히가 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리지 말고 돌아가라는 뜻인가?”

“아, 아닙니다! 황공합니다, 공작 각하!”

도어맨이 뒤로 물러서며 경례라도 붙일 기세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황족이 아니다.”

“예, 황공합니…… 아, 아니, 죄송합니다.”

에리히는 호텔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호텔은 시설이 좋아도 종업원 교육이 충분하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도어맨에게 물었다.

“델포드 남작이 나를 막으라고 하던가?”

“예? 아, 아닙니다. 오신다는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긴, 그게 클레어다웠다. 그녀는 에리히와 안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보통은 자신이 방문한다고 하면 내세워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녀는 인맥으로도 치지 않는 것 같았다. 잇속에 밝은 여자가 말이다.

[혈관에 흐르는 빨간 피가 거부감을 일으켜서요.]

피가 당연히 빨간색이지, 나라고 해서 진짜로 파란 피가 흐르는 줄 아느냐고 대꾸하자 클레어는 ‘흐흥’ 하고 코웃음만 쳤었다.

그런 태도가 신선하기도 하고, 가끔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신경에 거슬리기도 했다.

지금은 명백히 그게 나았다. 남에게 미리 알려지면 자칫 추문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도 일부러 문장이 박히지 않은 수수한 마차를 타고 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거슬리는 기분이 있었다.

‘모르는 척하려고?’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호텔 정문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아앗, 안 돼!”

사내아이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오다가 에리히의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발치에 도르륵 유리구슬 하나가 굴러왔다.

“아야야!”

아이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식겁한 보모가 달려와 아이를 잡았다.

“도련님! 그러니까 구슬치기를 로비에서 하시면 안 된다고!”

에리히는 숨을 멈추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머리칼은 황금을 녹여 뽑은 듯한 선명한 금발이었고, 눈동자는 잡색이 섞이지 않은 로열 블루였다.

아직 어린 데도 눈매와 코에서 북방 로멜 귀족의 특징이 드러나 있었다.

에리히는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초상 속에서 그가 꼭 이런 얼굴이었다.

“…….”

그가 침묵하는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아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에리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감 같은 것이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그는 몸을 굽혀 구슬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아예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름이 뭐니?”

“엘리엇이요.”

엘리엇이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예쁘고 친화력이 좋은 영주관의 도련님은 잔뜩 사랑받고 자라서, 누구나 자신을 예뻐하리라고 믿었다.

“나이는 어떻게 되니?”

“네 살이에요.”

엘리엇이 고사리 같은 손가락 네 개를 쫙 펴 보였다.

“그렇구나.”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에리히.”

“그 구슬 저 돌려주실 거죠? 그게 제일 센 거거든요.”

“그래.”

에리히는 들고 있던 구슬을 엘리엇에게 내밀었다.

“너는 델포드 남작의 아들이지?”

“우리 이모를 아세요?”

“이모?”

“네. 우리 이모가 델포드 남작이에요.”

엘리엇이 한층 친밀해진 태도로 웃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랑 이모랑 하나두 안 닮았다고 하던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전 엄마를 닮았대요. 아, 아저씨는 이모의 손님이에요?”

“……그래.”

에리히는 아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분노를 씹어 뱉었다. 이모라고?

보모가 새파랗게 창백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련님, 주인님의 손님을 너무 방해하면 안 돼요.”

“응.”

엘리엇이 꾸벅 에리히에게 절하며 어디서 듣고 흉내 내는 듯한 말투로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래.”

에리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엘리엇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엘리엇이 에리히의 손에서 구슬을 받아 들고 뒤돌아서서 달려갔다. 보모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엘리엇을 뒤따라갔다.

에리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흘긋 돌아보자 쏠려 들었던 시선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서늘한 침묵이 로비에 감돌았다. 응접 테이블에 빈 의자가 없이 꽉 차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일어나서 에리히에게 접근하려 하거나 눈을 맞추려는 자가 없었다.

숨까지 죽인 채 에리히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수가 그와 아이의 얼굴을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다급히 달려 나온 호텔의 지배인이 황송스럽다는 듯 안내했다.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델포드 남작님을 만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안내하게.”

에리히가 고갯짓했다. 지배인이 그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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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는 전투태세를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태세라고 해서 뭐 별다른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허리를 폈다.

‘딱히 도망쳤던 거 아니니까.’

도망치긴 했지만, 에리히에게서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무슨 허튼소리를 했든.

클레어는 다시 생각해 봤다. 아니, 사실 지난 5년 동안 몇 번이나 그날의 대화를 되새겨 봤었다.

딱히 마음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더 할 이야기도 없었고, 들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공연히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 싸우고 헤어진 사람과 5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것 자체가 마음 편하지 않은 일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 전에도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여긴 것은 처음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를 꽤 좋아했었는지도 모른다. 미남이라는 것을 두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그는 클레어를 특이한 사람 취급할지언정 그녀의 말을 여자의 말이라고 해서, 혹은 자기보다 신분 낮은 이의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고 웃어넘기는 일은 없었으니까.

“걱정되십니까?”

그레이가 그녀에게 물었다. 클레어는 오히려 놀라서 물었다.

“걱정?”

“벨프 후작가는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인척이지 않습니까? 위빙 상단이 그것 때문에 북방에서 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클라우제너 공작령은 수도 다음으로 소비력이 있는 곳이니까요.”

“아아, 그런 일이라면 괜찮아. 그 사람은 진짜 로멜 귀족이니까. 귀족이 돈 같은 것 때문에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하지.”

“그렇습니까?”

“그래. 영지 경영을 잘하는 것도 백성에게 시혜를 베풀어야 하는 귀족의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걸.”

클레어는 빈정거렸다. 물론 귀족 중의 귀족인 그는 평민에게도 자신의 삶을 다스릴 권리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레이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면식이 있으신 줄은 알았지만, 친분이 깊으셨군요.”

“……친분씩이나. 아카데미에서 같은 지도 교수님에게서 같은 시기에 수학했을 뿐이야.”

고집스럽게 말했지만, 클레어는 자신이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년 전,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녀와 에리히의 관계는 분명히 남들이 친분이 있다고 여길 만한 사이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에리히가 무엇 때문에 찾아오는지 클레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리 좀 피해 주겠어?”

어쨌든 지난번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클레어가 그레이에게 부탁했을 때였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지배인이 바깥쪽 문을 열고 나와 허리를 60도로 꺾었다.

에리히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때까지는 억누르고 있었던 분노의 불길이 클레어를 보는 순간 활활 타올라 내딛는 걸음에까지 옮겨지는 듯했다.

“클레어.”

“뭐예요? 왜 또 그렇게 빡쳤어요?”

그가 화를 낸다고 움츠러들거나 겁을 먹었다면 클레어는 그와 싸운 적이 없었을 것이다.

에리히가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넌 부끄럽다고 생각도 안 하는 건가? 내 얼굴을 보고도 지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5년 만에 얼굴 보고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클레어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에리히가 비교적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구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북방 로멜 귀족의 전범(典範)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로멜 귀족의 미덕은 규율, 절제, 엄격, 정확성, 냉정 같은 것들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 분노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글거리는 눈을 하다니. 숱하게 싸워 봤지만, 클레어는 그가 이렇게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모라니?”

“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클레어는 멍하니 반문했다.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가 책임과 의무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이에게 무책임하게 굴 줄이야!”

그때까지 클레어의 반걸음 뒤에 서 있었던 그레이가 그 앞을 가로막으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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