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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263)

9화

에리히가 사나워진 눈초리로 그레이를 노려보았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넌 뭐야?’라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실례지만,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자네는 누군가?”

결국 큰 차이 없는 말이 에리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때까지 그는 그레이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하녀든 정장을 입은 고용인이든 그에게는 똑같이 시야 밖에 있는 존재였다.

그것을 깨뜨린 자에게 에리히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나선 것이 젊고 헌칠한 남자였기에 경계심이 돋아 올랐다.

그레이는 무표정을 깨뜨리지 않은 채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태도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델포드 남작가의 법률 고문, 그레이 셔우드라고 합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법률 고문?”

에리히의 낯빛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클레어에게 향한 것과 다르게 가라앉은 태도로 말했다.

“일개 법률 고문이 끼어들 일이 아니네. 물러가게.”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레이가 대꾸했다.

“저는 일개 법률 고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델포드 가문의 가족이라도 되나?”

이대로 있으면 이야기가 더 골치 아프게 된다. 비로소 첫 번째 타격에서 벗어나 제정신을 차린 클레어가 말했다.

“그레이, 물러가.”

“남작님.”

“걱정하지 않아도 돼. 괜찮으니까 물러가 있어.”

그레이는 단순한 법률 고문이 아니라 가족에 더 가까웠고, 이제 곧 그렇게 될 사이였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지나치게 사적이었다.

그레이가 잠깐 움찔했지만 그 이상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뒤 거실에서 물러갔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가 지끈거렸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요.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레이가 끼어든 덕택에 잠깐 입을 다물게 된 에리히가 퍽 진정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클레어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기색은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시기가 무척 공교로웠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엘리엇은 내 아이가 아니고, 조카라고요.”

“아이 얼굴을 보고도 그런 거짓말이 나오나?”

“지금 엘리엇이 금발에 푸른 눈이라고 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진짜. 내 동생도 금발에 푸른 눈이었어요.”

“단순히 머리칼과 눈동자 색만 두고 말하는 게 아니야. 어떻게 봐도 내 아이가 분명한데, 그런 식으로 거짓말해서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클레어도 언성을 높였다.

“지금 내가 임신 안 한 척하려고 내 아이를 동생 아이로 만들어서 키웠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어!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걸 인정하라는 거지!”

“어이가 없네, 진짜. 그 애가 진짜 선배 애면, 선배가 상종 못 할 쓰레기네.”

클레어가 내뱉었다.

“아직 아카데미 졸업도 안 한 어린 여자애를 유혹해서 건드리기라도 했어요? 그것도 내 동생을? 그래 놓고 나랑 잤어?”

“뭐? 내가 그딴 일을 할 리 없잖아!”

“내 동생이 엘리엇을 낳았는데, 걔가 선배 애면 결론이 그것밖에 더 돼요?”

클레어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턱을 바짝 치켜들고 에리히에게 다가섰다.

에리히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얼굴이 모욕감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카데미도 졸업 못 한 어린 여자애를, 그것도 청혼하려던 여자의 동생을 유혹했다고?

그가 비록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올바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감히 그런 쓰레기 같은 오해를 할 수는 없었다.

“왜요? 아주 한 대 치고 싶으세요?”

“너 이거 아주 실수하는 거야. 엘리엇이 내 아이라면 클라우제너의 후계자이고, 제5위 황위 계승권자야.”

“걘 내 조카고, 델포드 남작가를 물려받을 거예요. 턱도 없는 착각 그만두고 이만 꺼져 주세요.”

“클레어!”

클레어가 우아한 동작으로 드레스 자락을 쥐고 절을 했다.

숙녀의 축객령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리히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런 식으로 도망 못 쳐, 클레어. 나는 내 아이가 그렇게 자기 권리 하나 제대로 못 얻고, 부모도 잃은 채 자라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거야.”

“그 잘난 클라우제너의 힘으로 가서 조사라도 해 보시든가 그러세요.”

클레어가 말했다.

에리히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빼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그리고 화를 가라앉혔다. 이런 얼굴로는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다시 오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이를 박박 갈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뒤에 남은 클레어는 본격적으로 콕콕 쑤시기 시작하는 옆머리를 눌렀다.

“미쳤나.”

5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때 실수쯤은 대충 물에 흘려보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어딘가의 사교 모임에서 마주치면 하하 호호 웃으며 인사해 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따금 클레어도 그때 생각을 했지만 그건 밤에 혼자서 이불을 걷어찰 때나 하는 거고. 사람이 대외적인 얼굴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뭐, 됐다. 어차피 아니니까.

한 몇 주…… 아니, 열흘만 있어도 에리히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철도가 있으니 사람 하나 델포드로 보내서 조사하는 것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결과지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얼굴에 날려 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게 나오려면 혁명 수준의 시대 변혁이 두 번은 더 필요하다.

‘알고 나면, 어디 사과하러 오나 보자.’

클레어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다른 방으로 피해 있던 그레이가 돌아왔다.

“클레어, 괜찮습니까?”

“엉? 아, 응.”

낯선 부름에 클레어는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그레이가 그녀에게 젖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얼굴이 붉습니다.”

“아, 열을 냈더니.”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그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그레이가 창문을 열었다.

“그보다, 공작 각하께서 찾아오신 용건이 무사히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데.”

“머리가 식으면 제정신이 들겠지.”

구멍 난 이불 2백 채라도 보내 주면 직접 사과하러 오지 않아도 용서해 주마.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들렸어?”

“두 분 다 소리를 지르셨으니까요.”

“민망하네.”

딱히 잘못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애니 아니니 실랑이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소리 질러 외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손부채질을 하는 클레어를 그레이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클레어에게 과거에 몇 명의 애인이 있었든.”

“응?”

“우리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러 오겠습니다. 오늘은 마음이 불편하신 것 같으니 이만 쉬십시오.”

그레이가 서류를 챙겼다.

클레어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지만, 그레이를 잡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은가? ‘애인 아니었어’는 변명 같아서 이상하고 ‘애인이었어’는 진실이 아니었다.

그레이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클레어는 황당해진 채 의자에 늘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엘리사, 살려 줘…….”

한탄해도, 웃어 줄 엘리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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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까지는 평화로웠다.

호텔 지배인은 프로답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훌륭한 정찬을 가져왔다. 클레어의 식탁에 함께 앉은 것은 엘리엇과 엘리엇의 식사 시중을 드는 마사뿐이었다.

마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오늘 저녁은 그레이와 함께 드시기로 하지 않았어요?”

“그게 좀…….”

“무슨 일 있으셨어요? 공작님이라는 분이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마사도 들었어?”

“그럼요. 온 호텔이 그걸로 수군수군 난리인데요. 혹시, 설마…….”

마사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사 아가씨의……?”

여기에도 오해하는 자가 또 한 명 있었다. 물론 갖고 있는 정보량이 다르니 오해는 전혀 반대 방향이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주인님, 혹시 진짜로 그 사람이라면, 혼자 만나시면 안 돼요.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런 쓰레기는 아니야.”

먼저 모욕당한 건 자신인데, 왜 자신이 변호를 해 줘야 하는 건가. 클레어는 슬퍼졌다.

멋모르는 엘리엇은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포크를 휘두르려다가 마사에게 잡혔다.

“도련님, 그러시면 안 돼요. 옆 사람을 치게 돼요.”

“앗.”

엘리엇이 얼른 팔을 내렸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맛있니?”

“응! 우리 집 밥보다 훨씬 맛있어!”

엘리엇이 천진난만하게, 영주관의 요리사가 들으면 눈물 날 소리를 했다.

웃는 얼굴이 천사 그 자체였다. 클레어는 하루 동안 피폐했던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무심코 엘리엇의 얼굴을 유심히, 하나씩 뜯어보았다.

‘닮았……네?’

클레어는 엘리엇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먹다 말고 방해받은 엘리엇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엘리엇의 머리칼과 눈동자는 엘리사를 닮았고, 이목구비도 상당히 그랬다.

하지만 엘리엇에게 로멜 귀족다운 특징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선배가 로멜 귀족의 이데아 같은 얼굴이긴 하지만.’

여태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엘리사의 남자 친구가 로멜 귀족인 것은 확실했으니까.

황태자 시해 사건 때 황태자와 함께 죽은 자가 여럿 있었고, 다수가 젊은 로멜 귀족이었다. 클레어는 그중 하나가 엘리사의 남자 친구이리라 생각했다.

시종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백작 가문의 직계 이상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시중을 든다기보다는 사실상 황태자의 친구 역할이었으니까, 엘리사가 조심스러워할 만했다.

하지만 이렇게 뜯어보니 그 이상으로 닮았다.

그리고 클레어는 자기 자신의 일이니 아이 생모를 오해할 수가 없었다. 진짜로 엘리사의 남자 친구가 에리히가 아닌 이상,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죽은 황태자……. 선배의 친모가 선황의 황녀였지.’

그러니 황태자와 그는 사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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